여수의 동화같은 섬 <월호도> <화태도>와 <돌산도 향일암> 일출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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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24. 오전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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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섬학교의 한겨울에도 따뜻한 답사길 [프레시안 알림]
 

*강의 마감됐습니다^^

월호도는 달섬입니다. 달섬. 섬은 대체 어떤 달 모양일까요. 만월일까요, 반달일까요, 초승달이나 그믐달일까요. 섬이 보름달 모양이었으면 만월도라 했겠지요. 초승달이었으면 미월도라 했겠지요. 아마도 섬이 달섬이었던 것은 형태가 달 모양이 아니라 섬 앞 바다에 비친 달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을까요. 달빛 바다가 호수 같아서가 아니었을까요? 월호도 앞바다는 인근의 섬들 금오도, 개도, 자봉도, 화태도 등이 감싸고 있어 그대로 호수입니다. 큰 파도에도 안전한 호수. 새해 2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79강은 2월 2일(토)부터 3일(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그 달의 호수 부근 여수의 섬들로 떠납니다.

▲월호도 바다는 섬들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고요하다.Ⓒ섬학교

달섬, 월호도를 거닐고 화태도 갯가길을 걷고, 돌산도 향일암 일출도 맞이합니다. 월호도는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할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그래서 섬살이의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연륙이 된 화태도 갯가길을 따라 오르는 꽃머리산의 풍경은 막혔던 속을 펑 뚫리게 할 정도로 시원스럽습니다. 새해가 되면 일출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돌산도 향일암은 한국불교의 4대 해수관음 기도처로도 유명합니다. 남해 보리암, 석모도 보문사, 낙산 홍련암과 함께 소위 '기도빨'과 '영빨'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지요. 숙소가 향일암 바로 아래 마을에 있어서 숙소에서도 그 아름답다는 일출을 볼 수 있습니다. 향일암 동백도 한창일 때입니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남쪽 섬나라로 초대합니다.

▲여객선은 섬 주민들의 마을버스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여수 월호도, 화태도와 돌산도 향일암>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달뜨는 밤이면 호수의 섬으로 오라
월호도행 여객선은 여수의 돌산 군내리항에서 뜨지만 오늘은 기관 정비 때문에 휴항이다. 더없이 푸른 하늘과 잔잔한 바다. 널빤지 같이 작은 어선들도 쉽게 오가는데 월호도로 가는 길은 꼼짝없이 묶였다. 이십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정기여객선이 운항을 중단하자 뱃길이 끊긴 것이다. 기관고장으로 정비에 들어갔다고 배 안 띄우면 그만인 정기항로. 육지에서는 노선버스 고장이면 다른 버스로 대체해 준다. 하지만 섬 주민들에게 그런 혜택은 없다. 섬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다른 선박이라도 투입해 해주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섬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오늘 꼭 섬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어서 결국 돌산과 다리로 연결된 화태도 독정이항에서 대절선을 불렀다. 부둣가에서 배를 기다리는데 방파제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마치 인형극 같다. 역광 때문일 것이다. 사는 일이 뭐 그냥 한바탕 꼭두각시 인형극이긴 하다만! 실상 가까이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숲을 나와야 숲이 보이듯이. 삶의 진실이란 거리를 둬야 제대로 보이기도 한다.

대절선이 출발했다. 잘 가던 배가 멀리서 오는 배 한 척이 보이자 선수를 급히 돌려 화태도로 돌아간다. 해경 경비정일까 단속이 두려워서다. 단속선이 아니란 것이 확인되자 어선은 다시 출발해 순식간에 월호항에 닿는다. 헌법에는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섬사람들은 이동의 자유도 없다.

▲월호도 최고의 전망대, 글썽이언덕Ⓒ섬학교

월호도는 작은 섬이다. 주민등록상에는 77가구 165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어느 섬이나 그렇듯 실제 인구는 다르다. 57가구 100여 명이 살아간다. 섬은 비교적 젊은 편이다. 65세 이상이 55명, 65세 미만이 45명이다. 70대 이상이 태반인 섬들도 많아 상대적으로 젊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7개 마을에 1000여 명이 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옛 일이다. 월호, 달의 호수. 섬의 이름이 참 고즈넉하다. 섬의 모양이 달처럼 둥글다 해서 월호도라 했다고 전한다. 월도, 대리도, 달도, 달섬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달과 연관된 지명들이다.

달섬. 섬은 대체 어떤 달 모양일까. 만월일까, 반달일까, 초승달이나 그믐달일까. 섬이 보름달 모양이었으면 만월도라 했겠지. 초승달이었으면 미월도라 했겠지. 아마도 섬이 달섬이었던 것은 형태가 달 모양이 아니라 섬 앞 바다에 비친 달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을까. 달빛 바다가 호수 같아서가 아니었을까? 월호도 앞바다는 인근의 섬들 금오도, 개도, 자봉도, 화태도 등이 감싸고 있어 그대로 호수다. 큰 파도에도 안전한 호수.

작은 섬이지만 월호도에는 아직도 학교가 있다. 학생 2명, 교사 1명인 섬마을 분교. 학생이 단 2명뿐이지만 폐교되지 않고 학교가 살아있다는 것은 섬에 희망이 있다는 증거다. 미취학 아동 2명이 더 있으니 학교는 당분간 폐교 걱정이 없다. 학교가 있어야 젊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고향 섬에 돌아오고 싶어도 못 오는 이들도 많다. 교육청은 자꾸 경제논리를 내세워 작은 학교들을 폐교하려 들지만 교육을 경제논리만으로 따질 일은 아니다. 백년대계가 아닌가. 오히려 섬에는 작은 학교를 권장해야 맞다. 섬이라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섬도 지속가능하다. 작아야 제대로 교육이 될 수 있다. 잠시 학생이 없어졌을 때는 폐교가 아니라 휴교를 해야 마땅하다. 학교를 없애기는 쉬워도 다시 세우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부둣가에서 만난 윤근조 이장님은 우체부 복장을 하고 있다. 이장이면서 우편배달부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포스티노’인 이장님이 섬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여름에 좋아요. 그런데 겨울엔 좀 추워.” 섬은 북서쪽으로 마을이 들어 앉아 있어 겨울에는 북서풍을 직격탄으로 맞으니 춥다. 지난 겨울에는 해안 전체에 고드름이 생길 정도였다. 월호도는 섬이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밭에서 일한다, 비탈밭을 일구는 할머니들이 자주 눈에 띈다. 밭에 주로 심는 것은 ‘시호’라 부르는 약초다.

시호는 간에 쌓여있는 울화를 풀어 없애주는 홧병에 명약으로 알려진 약초. 간에 생기는 염증인 간열 증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한마디로 간에 좋은 약초다. 시호는 그 뿌리를 한약재로 사용한다.꽃은 8∼9월에 노란색으로 피는데 유채꽃과 비슷하다. 11월쯤에 뿌리를 캐서 말린 뒤 약재상에 판다. 월호도의 노인들은 1년에 600kg 정도의 시호 뿌리를 판매해 소득에 보탠다. 평지가 거의 없는 월호도의 밭들은 대부분 비탈밭이라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어 노인들이 직접 호미로 밭을 갈아서 시호를 재배하니 그 고단함이 크다.

▲월호도 큰마을 전경Ⓒ섬학교

월호도 사람들은 2000년대 들어서기 전에는 가두리양식을 많이 했다. 1980년대 여수에서 가장 먼저 가두리양식을 시작한 부자섬이었다. 마을 입구의 창고 건물은 양식장 사료를 저장하던 창고였지만 지금은 비워져 있다. 대부분 가두리를 접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과잉 생산이었다. 양식업자들이 많아지니 활어 값은 떨어지는데 사료 값은 자꾸 올라갔다. 20년 전에 농어, 참돔 등 양식어류가 1kg에 2만원이었던 것이 지금은 8천원밖에 안 한다. 반면에 사료 값은 10배 이상 상승했다. 지금 월호도 어민들은 대부분 어선 사업으로 전환했다. 30가구가 어선을 부린다. 가두리양식은 두 가구뿐이다. 섬 주변의 다른 가두리들은 외지인에게 임대해준 것들이다. 어선들은 봄, 여름에는 도다리, 갑오징어를 주로 잡고 여름에는 갯장어(하모)를 많이 잡는다. 통발로 문어도 잡는다. 소득이 있으니 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추억 돋는 월호도 분교의 책 읽는 소녀상Ⓒ섬학교

섬은 작지만 숲이 좋다. 특히 섬의 첫 입도조인 윤씨 선산이 있는 곳의 잣밤나무 숲은 원시림처럼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숲을 도산수라 한다. 큰마을 초입 쪽에 있지만 숲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땔감을 해서 연료로 쓰던 시절에는 쉽게 오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잡목들이 우거져서 발 디딜 틈이 없다. 개나리골짜기, 가마바구끄터리는 개지(키조개)가 많이 나는 탓에 외지 다이버들과 섬 주민들 간에 충돌이 잦은 곳이다. 동찌라고도 하는 동백포는 6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폐촌이 돼버렸다. 글썽이마을도 11가구가 살다가 역시 폐촌이 되고 말았다. 저인망어업(고대구리)을 금지시키면서 다들 떠났다.

섬들을 다닐 때마다 고대구리 조업금지 때문에 바다가 더 황폐화됐다는 어민들의 주장을 자주 접한다. 물론 물고기가 더 많아졌다는 섬들도 더러 있지만 아주 먼 남쪽바다 섬의 일부다. 대부분의 섬들은 고기가 씨가 말랐다고 하소연이다. 바닥까지 그물을 내려서 끌며 싹쓸이 하는 조업방식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고대구리배가 청소부 역할을 하며 바다 바닥을 뒤집어 주니 해초들도 잘 자라고 물고기도 모여들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고대구리어선이 바다밭을 갈아주는 경운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태풍이 와서 바다를 한번 뒤집어줘야 바다 생태계가 건강해진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고대구리가 없어지면서 바다 바닥이 온통 불가사리나 쓰레기들이 쌓여버려서 바닥이 썩어가니 해초도 자랄 수 없고 물고기도 살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외지에서 온 큰 통발배들은 통발을 몇 천개씩 뿌리고 주낙배들도 어장을 싹쓸이 해가는 것은 단속하지 않으니 섬지역 어민들의 불만이 크다. 정부정책대로라면 고대구리 어업금지로 어장이 좋아졌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고 더 악화됐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부는 어민들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 마땅하다.

초등학교 뒤편에는 글썽이까지 길이 나 있다. 글썽이마을이 있던 지역이 지금은 무인지경이 됐지만 언덕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경은 압도적이다. 글썽이란 이름은 글씨가 써진 바위가 있는 까닭에서 유래했다. 예전에는 언덕 아래 ‘서불과차’란 글이 써진 바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대체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으러 동남동녀 3백씩을 태우고 막대한 자금을 챙기고 진나라를 떠났던 서불은 이 나라 섬들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 그것이 전설일지라도 전설이 생긴 것은 서불의 이야기가 섬들 곳곳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니 결코 그냥 전설일 리가 없다. 그와 함께 흘러왔던 동남동녀의 후예들이 지금 이 나라 해안지방에 살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밀진포도 한때는 융성했었다. 30여 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달랑 한 가구만 남았다. 부부 둘이 사는데 두릅 재배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이장님이 귀뜸해 준다. 한때는 일본 무역선들이 들어와서 갯장어를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가던 기항지였다. 당시에는 가게들, 술집들도 많았다. 색시가 나오는 방석집도 여럿 있었다. 큰 마을에도 선술집이 5개나 있었지만 색시집은 밀진포에만 있었으니 사내들은 밀진포로 몰려들었다. 밀진포에는 ‘이께스’라 부르는 수조가 많았다. 잡아온 갯장어를 보관해 두었던 수조. 이께스는 오동나무를 이용해 배 모양으로 만들었다. 갯장어 꼬리가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어서 만들어졌던 어구다. 그 모습도 장관이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다.

비자금마을에는 5가구가 살고 있다. 비자금은 대두라도와 인접해 있는데 이 해협의 수심이 깊고 자갈이 많은데도 적조가 자주 발생한다. 잔(작은)비자금은 가장 안전한 피항지다. 섬들로 둘러싸여 있는 까닭에 태풍에도 안전하다. 그래서 가두리들이 제법 많다. 5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모두 떠나고 양식장만 남았다. 그런데 인근 소나무숲은 온통 왜가리들 차지다. 왜가리 때문에 섬 주민들은 골칫거리다. 철새였던 녀석들이 텃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가두리양식장의 치어들을 몰래 잡아먹고 산다. 왜가리를 퇴치하려는 주민들과 환경단체 사이에 가끔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인간의 먹거리를 노리는 왜가리와 인간의 공존,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 늘 딜레마다.

‘기도빨’ 센 향일암과 관음신앙
해마다 새해 첫 일출의 장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도량. 향일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화엄사 말사다. 다리로 연결되어 이미 뭍이 된 여수 돌산도 금오산 자락에 있다. 향일암은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고 그 아래는 가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암자는 고통의 바다를 건네주는 자비의 배[苦海慈舟]다. 그 바다의 섬들 또한 그저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항해 중이다. 향일암 왼쪽 바다에는 중생(衆生)의 서원(誓願)에 해수관음보살이 감응했다는 감응도, 정면에는 부처가 머물렀다는 세존도, 오른쪽 바다에는 아미타불이 나투었다는 미타도가 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된 향일암은 <여수군지>와 <여산지>에 따르면 659년(백제 의자왕 19) 원효대사가 원통암(圓通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하고 또 950년(고려 광종 9) 윤필(允弼)거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원통암을 금오암(金鰲庵)이라 개칭하였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1713년(숙종 39)에 돌산 주민들이 논과 밭 52두락을 헌납한 지 3년 뒤인 1715년에 인묵대사(仁默大師)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향일암>이라 했다. 1986년 대웅전과 관음전·용왕전·삼성각·종각·요사채·종무실을 새로 지었는데 2009년 12월 20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대웅전과 종각·종무실이 전소되고 말았다. 지금은 다시 복원됐다.

▲향일암 여명. 도량 안은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가득하다. ⓒ여수시

향일암은 한국불교의 4대 해수관음 기도처로 유명하다. 남해 보리암, 석모도 보문사, 낙산 홍련암과 함께 소위 '기도빨'과 '영빨'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나한 기도처로 유명한 운문사 사리암까지 포함해서 소위 기도빨을 잘 받는다는 암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바위산이나 바위 위에 있다는 점이다. 바위에서 나오는 에너지 덕일까? 그런 때문인지 이런 기도처들에 가면 도량 안은 온통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가득하다.

천정에는 빈틈없이 연등이 달리고 기도객들은 불상 아래서 수도 없이 절을 한다. 시주를 하면 도량에서 기도를 대신해 주기도 한다. 사람들의 기원은 대체로 가족 건강과 사업 번창, 학업 성취 등의 소망이 많다. 돈을 많이 벌게 해주고, 자녀들 좋은 대학 가게 해주고, 가족들 건강히 오래 살게 해달라는 소망들. 소망은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연히 보여주는 증표다. 연등에 걸린 신도들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스님들은 조석으로 기도를 대리한다.

향일암에 이르는 길은 가파르다. 향일암의 해수관음보살을 친견하려면 험한 산길을 오르는 수고를 해야 한다. 대개 영험하다는 기도처들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산중턱이나 언덕의 끝자리에 있다. 그런 기도처의 창설자들은 적어도 인간 심리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녔던 것이 분명하다. 기도가 자기 정화의식의 정수란 사실을 그들은 이미 눈치챈 것이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땀 흘리며 높은 곳으로 오르는 동안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의 찌꺼기들은 걸러진다. 몸과 정신은 자연스럽게 정화되고 고양된다. 그러므로 마침내 기도처에 도달한 순간 기도객들은 이미 기도의 반은 성취하는 셈이다. 기도가 시작되기도 전에 영험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바위의 에너지가 아니더라도 영빨이 세고 기도빨이 쎄다고 소문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오랜 세월 해수관음에 대한 이 땅 사람들의 신심은 투철했다. 관음신앙은 미륵신앙, 지장신앙, 정토신앙 등과 함께 불교의 대표적 타력신앙이다. 관음신앙은 한국, 일본, 중국, 티베트 등에서 특히 활발하다. 티베트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여긴다. 티베트의 포탈라궁은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전설의 보타낙가산을 조형화한 것이다.

관음보살은 범어(산스크리트어)로는 '아바로키테스바라'. 한자로 번역한 것이 관음, 광세음, 관세음, 또는 관자재, 관세자재 보살이다. 관음보살은 세상의 음성을 관찰하여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주고’[悲]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慈] 자비(慈悲)의 화신이다. 하지만 이 견뎌야만 하는 땅, 사바[忍土]세계 어디에 자비의 화신은 계시는 걸까. 뭇 중생들의 바람과는 달리 언제나 소망은 끝이 없고 성취는 기약 없다.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생이 오고 갔을 것이다.

▲화태도 독정이항, 역광 속 낚시꾼들의 모습이 꼭두각시 춤처럼 아련하다.Ⓒ섬학교

돌산도와 다리로 연결된 화태도
화태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 여수시 남면의 부속 섬이다. 2.171㎢의 면적에 월전, 화태, 묘두 마을에서 40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아간다. 2016년 화태대교로 연륙되어 이제는 언제든 자유롭게 육지를 오간다. 화태마을에는 조선시대에 말을 조련했다고 전해오는 기마장터가 있다. 월전마을은 ‘달밭구미’라 했는데 마을 앞 바닷가에 묻혀 있는 바위가 마을의 수호석이라 전해진다. 묘두마을은 섬의 북서쪽 끝단에 있는데 형상이 고양이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묘두다. 화태도는 어류 양식업이 유난히 발달한 섬이다. 주민들의 80% 정도가 어류 양식에 종사 중이다. 주민들은 화태도에 연륙교가 생긴 뒤 없던 것 3가지가 새로 생겼다고 말한다. 도둑, 쓰레기, 이웃 간의 분열. 다리 건설을 그토록 염원했던 섬 주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래서 복잡 미묘하다.

2월 섬학교 제79강 <여수 월호도, 화태도와 돌산도 향일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월 2일(토)>
07:00 서울 출발(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9강 여는 모임
-여수 도착
-점심식사(서대회무침요리)
-화태도 독정이항 출항
-월호도 도착
-월호도 걷기(4km)
월호선착장-마을안길-월호도분교-밀진포-글썽이-밀진포-분교-월호마을회관
-월호도 출항
-화태도 도착
-화태도 갯가길 꽃머리산 걷기(2km)
-향일암 숙소 도착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요리)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2월 3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남도백반)
-향일암 탐방
-향일암 출발
-점심식사(장어탕요리)
-수산시장 장보기
14:00 서울 향발. 제79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여수 월호도, 화태도와 돌산도 향일암> 답사 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장갑,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 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2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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