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향토대백과 인물정보관 : 문화 · 예술
구본영
구본영 원본보기
분류 | 인물정보관>문화 · 예술>회화 · 조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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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922. 10. 16. ~ 1993. 10. 24. |
출신지 | 서울시 |
직업 | 화가 |
서울시 통인정에서 출생하여 1941년에 개성에서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형 구본식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중학교시절에 두차례에 걸쳐 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 이름난 미술가였던 오지호의 집에 자주 찾아다니며 그림지도를 받고 미술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그후 미술전문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에 제국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학비문제로 1년만에 중퇴하였다. 해방 후 개성에서 공립중학교 교원, 서울공업중학교 교원, 남조선미술가동맹 서울지부 등에서 일하면서 유화 ‘농촌의 아침’(1945, 20호), ‘목장’(1946, 15호), ‘농촌풍경’(1946, 15호) 등을 창작발표하였다.
지난 6 · 25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와 예술단의 미술가, 평양수예연구소의 미술강사로 있으면서 주로 후비양성사업을 하였다. 10년간 미술강사로 있는 기간 제1기로부터 제3기까지 수예가들을 키웠는데 이들은 오늘 우리나라 수예가대렬의 핵심들로 되였다.
이 기간 유화 ‘서대문형무소해방’(1955, 100호), ‘설경’(1956, 12호), ‘농촌풍경’(1957, 6호), ‘일요일’(1958, 100호), ‘대동강풍경’(1958, 30호), ‘풍경’(1958), ‘협동의 봄’(1959, 50호), ‘평양역이 보이는 풍경’(1959), ‘육문중학교 동맹휴학’(1960, 60호), ‘청류벽’(1961, 6호) 등을 그려 여러 전람회들에 발표하였다. 그중 ‘대동강풍경’, ‘일요일’, ‘풍경’, ‘평양역이 보이는 풍경’ 등은 형상이 우수하여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였다.
1963년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북도위원장사업을 하였다. 이 시기 유화 ‘만경대생가’(1968, 30호), ‘청류벽’(1968, 20호) 밖에 창작하지 못하였다. 그의 유화작품들은 색이 진중하고 화조가 어두운 편이였다.
1972년 이후 구본영은 조선화 화가로 전환하였고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여 실천적 모범을 보였다. 조선화 ‘만경대의 봄’(1972, 60호), ‘묘향산풍경’(1972, 30호), ‘노을비낀 해금강’(1975, 1000호, 합작), ‘만경대의 봄’(1975, 189×218cm), ‘삼지연’(1976, 150호, 합작), ‘만물상’(1976, 500호, 합작), ‘꽃피는 만경대’(1977, 100호), ‘만경대의 봄’(1978, 80호), ‘련주담’(1979, 30호), ‘만경대’(1980, 50호), ‘만경대’(1982, 50호), ‘봄’(1984, 12호), ‘4월의 봄’(1987), ‘상원동의 봄’(1988) 등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그중 여러 점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였다.
1982년 이후 구본영은 평안북도미술창작사 창작가로 마지막시기까지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벌렸다. 구본영은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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