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웅의 고지도이야기 78] 영호남 해안의 군사지도 ‘영호남연해형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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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연해형편도의 영남 쪽 9폭에서 12폭 부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세기 이후 조선은 국방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진보와 성곽, 산성 등의 군사시설을 정비하거나 신설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와 같은 군사목적의 관방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18세기 들어서는 ‘청구관해방총도靑丘關海防摠圖’와 같은 전국의 관방關防과 해방海防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대형 군사지도까지 제작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제작된 관방지도는 대부분 북방 접경지대를 대상으로 그려졌는데 반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의 요충지를 그린 ‘영호남연해형편도嶺湖南沿海形便圖’는 유일한 해안지역의 군사지도이다. 지도는 가로 20.4cm, 세로 59.7cm 크기의 첩帖으로 이뤄졌지만, 40폭으로 접지된 지도를 펼치면 그 길이가 8m 16cm나 되는 엄청나게 큰 지도이다. 지도의 첫 폭과 마지막 폭은 산수화로 장식되었고, 영남 쪽은 지도 12폭, 지리지 4폭이고, 호남 쪽은 지도 16폭, 지리지 6폭이다.


지도는 종이에 채색필사로 제작되었고, 지도에 그려진 범위는 경상도 동해안의 영해寧海(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에서 남해안을 거쳐 전라도 서해안의 용안龍安(지금의 익산시 용안면)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쪽 해안 전 지역으로, 방위를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는 해안선이 조밀하고 작은 섬까지 빠짐없이 그려졌는데, 멀리 떨어진 흑산도黑山島와 가가도可佳島(지금의 가거도)까지 그려지고, 제주도는 완도 남쪽의 도곽 변에 한라산漢拏山만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 간기刊記가 없어 확실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92년(정조 16)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된 강응환姜膺煥이 재직 시에 동래좌수영의 화사군관畫師軍官을 시켜 그리게 한 ‘고려중요처도高麗重要處圖’라는 지도가 ‘영호남연해형편도’의 영남 부분과 필치나 지도의 내용이 유사해 영호남연해형편도의 제작 시기는 1792년에서 1794년 사이로 추정한다.


경상도 영해에서 하동까지의 해안 형세를 그린 ‘고려중요처도’는 견지에 채색으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67cm, 가로 3m42cm에 16폭으로 이뤄졌으며 이 중 12폭은 지도이고, 4폭은 지리지이다. 따라서 ‘영호남연해형편도’는 영남 해안을 그린 ‘고려중요처도’와 호남지역의 해안을 그린 지도를 합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호남연해형편도’의 내용 표현도 영남 쪽과 호남 쪽이 다르다. 전체적으로 해안선과 섬들은 먹선으로 뚜렷하게 그리고, 해안바위와 바위섬까지 구분해 표시하고, 육지와 섬의 산지는 회화식으로 간략하게 묘사한 위에 녹색으로 채색했다. 군현명은 영남 쪽은 사각형 내에 표기하고 적색으로 채색한 반면, 호남 쪽은 성곽을 그린 원 기호 내에 표기하고 짙은 검붉은색으로 채색해 구별된다. 통영統營과 수영水營, 병영兵營, 진영鎭營 등은 영남 쪽은 타원형 내에 표기하고 적색으로 채색했고, 호남 쪽은 성곽을 그린 원 기호 내에 표기하고 짙은 검붉은색으로 채색해 차이가 난다. 


기타 군사기지는 타원형 내에 표기하고 적색으로 채색했고, 제민창濟民倉·해창海倉·조창漕倉·현창縣倉 등 창고와 선소船所는 작은 원 기호에 짙은 검붉은색을 채색하고 명칭을 표기했는데, 호남 쪽은 선소와 선창船滄을 함께 표시했다. 봉수는 기둥 모양에 짙은 검붉은색으로 채색하고 명칭과 읍邑까지의 거리를 표기했다. 육로는 굵은 적색 선으로, 항로는 가는 적색 선으로 그려져 있다. 


항로 요충지에 대한 기록은 물론 해저의 험악하고 순편順便한 정도, 폭풍을 만났을 때 대피할 만한 유박지留泊地, 선박의 대소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포구의 한도, 연안 각 고을 간의 이정里程과 연안 각지로부터 내륙의 중요한 군읍 간의 거리도 기재되어 있다. 또 각 선소와 포구에는 접안 가능한 선박 수와 해로에서 피해야 할 험애처險隘處, 바람의 종류까지 자세히 표기했다. 특히 섬에는 사람이 거주한다는 뜻의 ‘인거人居’라는 글자를 표시해 유인도와 무인도를 구분했다. 


영남 쪽의 군사기지로는 울산에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과 동래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삼도수군통제영인 통영統營, 진주에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통할하는 해상 방어 총사령부로 1603년(선조 36) 경상도 통영에 세운 이후, 1895년(고종 32)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을 폐쇄할 때까지 292년간 존속되었다. 통제영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세병관洗兵館만 남아 있다.


지도상에 통영과 미륵도 사이에 교량이 그려져 있고, ‘굴항포掘項浦’라고 표기된 곳은 원래 통영반도와 미륵도가 사취砂嘴로 이어져 있었으나, 배가 다닐 수 있도록 파낸 곳이라 하여 ‘판대목’ 또는 ‘송장나루’라고 불리던 곳이다. 한산대첩 당시 왜군이 패주하다 이곳에서 물길이 막히자 손으로 모래를 파낸 곳이라는 유래도 전해진다. 


1757년(영조 33) 이곳에 나무다리를 놓았고, 그후 여러 차례 철거와 재건이 되풀이 되었다. 1932년 해저터널이 건설됨과 동시에 그 위로 통영운하가 개통되었다. 굴항포 밑에 써진 ‘촌통일척寸通一隻’은 ‘작은 배 한 척만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고, ‘물살이 매우 급하다’고 적혀 있다.


호남 쪽의 군사기지로는 순천(현재의 여수)에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 해남에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이 표시되었으나, 강진의 전라병영全羅兵營은 위치가 맞지 않아 지도에는 없다. 고금도古今島와 조약도助藥島 사이 해상에는 ‘선박 300척이 정박하고 북풍을 피할 수 있다容三百隻北風順’고 적었고, 조약도 남쪽에는 선박 200척이 정박할 수 있다고 적었다. 강진 남쪽 남당포南塘浦에는 100여 척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다고 적혀 있는데, 남당포는 강진에서 제주도로 가는 포구로 각종 선박이 대규모로 정박할 수 있어 제주도 특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관방지도는 관북과 관서지역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고, 남부 연안지역의 지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영남과 호남의 해안과 크고 작은 섬들까지 망라한 ‘영호남연해형편도’는 영호남 해안 일대의 해방 요충지와 관방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로, 우리나라 지도사地圖史에서도 특기할 만한 지도로 평가된다. 


필자 한국지도학회 부회장, 한국지도제작연구소 대표, 한국산악회 자문위원.


[최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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