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테이션 게임과 앨런 튜링

24시간마다 바뀌는 해독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암호 시스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이용하던 암호 시스템인 에니그마를 풀어낸 영국인 천재 수학자와 그의 영화 같은 삶.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은 수학자 앨런튜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미테이션 게임과 앨런 튜링

지난 2012년은 앨런튜링 탄생 100주년이었다. 한 해가 더 지난 2013년 영국 정부는 앨런튜링의 사후 사면을 공식 확정지었다. 영화에서 보듯 그는 1952년 영국에선 당시 절도나 살인과 동급 범죄로 인식되던 동성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호르몬 요법으로 화학적 거세 조치를 받았지만 1년이 지난 1954년 6월 7일 41세 나이에 청산가리를 묻힌 사과를 베어 물고 사망했다.

이미테이션 게임과 앨런 튜링

하지만 튜링의 짧은 생은 동성애에 묻혔던 59년보다 더 빛났다. 그는 컴퓨터의 기초를 만든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가 없었다면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컴퓨터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ACM 튜링상(ACM Turing Award) 역시 그가 컴퓨터 과학과 수학계에 공헌한 의미를 되짚고 있다.

이미테이션 게임과 앨런 튜링

튜링은 1912년 태어났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을 보였던 소년은 뇌가 신경섬유로 형성된 조직이며 인간의 마음은 이런 네트워크의 결합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케임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에 입학해 수학을 전공한 그는 1936년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문제의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는 논문을 쓴다. 그는 논문에서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기계에 비유한 구상을 밝혔다. 튜링머신(Turing machine)이라는 계산 기계로 컴퓨터의 이론적인 원형으로 꼽힌다.

물론 이 논문을 발표한 시점에서 튜링이 컴퓨터를 발명하려고 한 건 아니다. 튜링머신은 필요한 계산을 수행하는데 작업 하나를 위한 것이다. 튜링은 특정 작업을 위한 튜링머신 동작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범용 튜링머신(Universal Turing Machine)이라는 개념을 더했다. 범용 튜링머신은 입력 받은 어떤 튜링머신 동작도 그대로 흉내내주는 이미테이션 기기인 것이다. 범용 튜링머신은 어떤 프로그램이든(튜링머신) 테이프로 데이터를 입력 받아 처리하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튜링은 영국 암호학교 암호해독반 수학팀장을 맡아 독일군 암호 시스템인 에니그마 해독에 나서게 된다. 당시 영국 보급선은 독일 잠수함인 U보트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독일은 모든 명령을 에니그마(Enigma)라는 자동 암호문 작성기로 만들어 보냈다.

에니그마는 알파벳 26자로 이뤄진 키보드형 기기를 이용해 그 날의 설정에 따라 보내고 수신기에서도 동일한 설정이 되어 있다면 해당 암호문이 원래 문장대로 나오는 구조다. 하지만 이 설정은 천문학적인 숫자 조합이었다.

이런 암호를 풀기 위한 작업은 암호화 시스템을 모방(이미테이션)해 움직임을 논리적으로 추측하고 그 날의 설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계산한다면 족히 수천 년은 걸린다. 튜링은 암호를 해독하는 전기와 기어로 움직이는, 영화상에서 크리스토퍼로 부른 기계를 이용한다. 실제로는 이 기계는 튜링이 다 만든 게 아니라 폴란드에서 에니그마를 풀기 위해 만든 암호 해독 전용 기계를 개량한 것이라고 한다. 튜링은 이 기계를 계속 개선했고 해독 기술을 더했다.

이어 튜링은 1944년 컬로서스(Colossus)라고 불리는 암호문 해독을 위한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당시 만든 기술이나 지식은 1970년대까지도 부분적으로 이용될 정도였다고 한다.

컬로서스는 열전자관 1,500개를 갖추고 있어 속도가 빨랐다. 해석한 메시지는 5비트 텔레프린트 코드로 테이프를 통해 천공 처리했다. 초당 거의 5,000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에서도 대포 탄도 계산을 위해 폰 노이만이 빠른 계산기인 애니악(ENIAC)을 개발 중이었다. 애니악은 종전 직전인 1945년 완성, 대대적으로 존재를 공표했지만 튜링이나 컬로서스는 군사 기밀로 처리되면서 존재 역시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존재가 알려진 건 반세기 이후였다.

종전 후 튜링은 암호 해독 대신 어릴 때 읽은 뇌와 마음의 관계를 전자 두뇌(Electronic Brain)라는 시스템으로 제공하는 걸 꿈꿨다. 이를 위해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 개발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50년 인공지능 관련 논문(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을 발표한다.

여기에 나오는 게 바로 그 유명한 인공지능 실험인 튜링 테스트다. 튜링 테스트는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져 기계에 지능이 있는지 판별하는 테스트를 말한다. 사람과 컴퓨터 양쪽에 타이포그래프를 이용해 문자를 입력해 질문을 한 다음 어떤 응답이 컴퓨터인지 판정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지난 2014년 영국에선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슈퍼컴퓨터가 등장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튜링 테스트는 30% 이상 컴퓨터와 인간을 판별할 수 없으면 합격 판정 처리를 하는데 당시 슈퍼컴퓨터는 33%를 기록했다고 한다.

튜링이 인공지능에 매달린 건 어린 시절 요절한 친구인 크리스토퍼 모컴, 영화상에서 그가 사랑했던 친구를 되살리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나오듯 앨런 튜링이 선행한 정보 기술을 살렸다면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린 어떨까. 차별이나 공정하지 못한 룰 탓에 잃고 있는 건 없을까.

전자신문인터넷 테크홀릭팀

이석원기자 techholi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