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골목식당'의 비결 [이 책을 댁으로 들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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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2.11. 오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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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골목 도쿄

ㆍ공태희 지음

ㆍ페이퍼로드 | 342쪽 | 1만6800원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술관이 하나 있습니다. 점심 예약을 하려고 둘러 보니 그 미술관 근처에 일본 가정식집만 네 곳이더군요. 생선회나 초밥, 돈까스를 파는 일식당이야 원래 많았습니다만, 일본 가정식을 표방한 집들이 이렇게나 늘어난 건 아마도 <심야식당> <고독한 미식가> 같은 드라마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 일본을 밥 먹듯 드나든 사내가 있습니다. 200번쯤 세고는 더 이상 세지도 않았답니다. 출장도 많았지만, 어떨 때는 장을 보러 1박2일도 다녀왔답니다. 원래 여행으로 밥 벌어먹던 사람은 아닙니다. 라멘 한 그릇 먹으러 전용기 타고 일본에 다녀올 정도의 갑부도 아닌 것 않습니다. 직업은 음악 프로그램 PD이고, 여행 덕후랍니다. “나 홀로, 초단기, 갑작 여행이어도 악기는 꼬박꼬박 들고 가는 게 풍류”라고 허세를 부렸다가도 “미안해요, 아저씨라서”라고 꼬리를 내릴 줄 압니다. 공PD가 일본의 골목과 골목식당에 대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지금부터 만나봅니다.

도쿄 신주쿠 가부키초 골든가 골목 어딘가에서 밤 12시가 되면 슬며시 문을 여는 <심야식당>. 드라마를 보고 나면 절로 ‘나도 가부키초에 가서 이런 식당을 찾아봐야겠어’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자 왈 “미안해, 심야식당은 없어요”

도쿄에서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신주쿠이다 보니 가부키초의 가게들이 밤 12시쯤 문을 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원하는 대로 메뉴를 만들어주고, 말하지 않고도 음식으로 위로를 주고받는 그런 심야식당은 없답니다. 일본에서 <심야식당>이 원작만화, 드라마, 영화까지 큰 성공을 거둔 건, 판타지라서 그렇답니다. 그런 식당이 실제로는 없어서 열광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여행상품 설명에서 ‘심야식당’을 발견하면 그 상품은 거르랍니다. 아마 인테리어만 비슷한 식당만 가보게 될 테니까요.

신주쿠의 뒷골목 가부키초는 실제 일본 최대의 향락가입니다. 친근하게 말을 거는 호객꾼들을 따라갔다가는 ‘호갱님’되기 십상이라죠.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골든가는 가부키초에서 다소 후미진 외곽에 있는 다소 쇠락한 느낌의 골목입니다. 이곳에 있는 가게는 단골들만 드나드는 ‘멤버십 전용 술집’과 접객원이 있는 ‘스낵바’가 대부분이라 합니다. 멤버십 전용 스낵바도 있다는데, 이른바 ‘지인 찬스’로 그곳에 간 저자가 여장남자 주인에게 문화적 충격을 꽤 받은 듯합니다. 거기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오니상~! 이 수상쩍은 동네는 처음이야?”

그렇다면 오래된 골목의 낡았지만 정갈한 음식점에서 오랜 단골들이 가게 주인과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는 그런 풍경을 체험하는 건 불가능한 걸까요? 아닙니다. 도쿄의 골목에 현실판 ‘심야식당’은 많답니다. 다만 심야영업을 안할 뿐.

공PD가 추천하는 식당들은 거의 오래된 노포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식당이 30년 정도만 되어도 노포의 대열에 올라선다지만, 일본에서는 80년은 되어야 한답니다. 적어도 3대가 대를 이어 식당을 해왔다는 뜻이니까요. 맛있고도 오래되었는데, 프랜차이즈로 만들어 돈을 더 벌어보겠다는 생각 따위는 포기하는 패기도 필요합니다. 노포의 맛은 대량복제가 어려우니까요. 주인도 맛에 대한 철학도 대를 이어야 하지만, 손님들도 대를 이어 단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노포만 살아남습니다.

이 노포들은 대부분 ‘골목식당’입니다. 상권이 좋으면 임대료가 높지만, 주택가 안쪽 골목으로 가면 임대료가 싸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인도 손님도 한 동네에 몇십년씩 살아오며 정이 듭니다. 덕분에 계절 따라 고급진 재료도 저렴한 가격에 턱하니 내놓습니다.

프랜차이즈와는 차별화된 맛, 계절 특선 메뉴, 그러나 번화가보다 저렴한 가격, 역에서 걸어서 5분 이내, 편안한 복장도 오케이…. 이런 노포를 찾아간 어떤 아저씨가 ‘혼밥’으로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대는 드라마가 <고독한 미식가>였습니다. 이 드라마 속 식당들은 실제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맛집이라기보다, 동네사람들이 가는 소박한 식당들이 대부분입니다. 저자가 일 때문에 만난 현지인에게 소개받아 종종 들렀다는 닌교초의 튀김덮밥집처럼요.

그러나 식당도 존재하고 <고독한 미식가>의 저주도 존재합니다. 방송에 나오고 폐업한 가게들이 꽤 됩니다. 방송을 탄 가게 앞에는 대기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원래 인기 있던 집은 줄이 더 길어지고요. 그러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손님이 몰리면, 단골들은 불편을 느끼고 맛 또한 유지되지 못합니다. 노포의 기본은 단골. 단골이 떠난 식당의 미래는 불보듯 뻔합니다. 저자는 방송을 탄 가게에 줄이 길어지는 걸 “일본인의 혀는 뇌에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표현하지만 남일 같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방송에 나온 집’ 플래카드 걸린 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잖아요. 심지어 ‘방송에 나올 집’에도 낚이는 판이죠.

도쿄에는 대규모 도시개발을 해도 살아남아 독특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골목길이 많다고 합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거리는 앞서 소개한 신주쿠 골든가와 닌교초 외에 니혼바시, 긴자4번가, 신주쿠 오모이데 요코초, 시부야 논베 요코초, 신바시 고가철로 등입니다. 에도시대 최고의 상권이었던 니혼바시는 곳곳의 문화재 때문에 대규모 재개발이 어려웠으나, 곳곳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면서 대규모 복합빌딩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합니다. 덕분에 고급 백화점 뒷골목에 130년된 스시 노포가 살아남았다죠.

저자는 책에서 사라진 피맛골에 대한 사랑과 그 자리에 들어선 D타워와 그랑서울에 대한 아쉬움을 여러 차례 표합니다. 재개발 때문이 아니라도, 서울의 뜨는 거리는 죄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습니다. 올라간 임대료에 원주민과 오래된 가게들은 다 사라지고, 돈 많은 프랜차이즈들만 몰려옵니다. 결국 그 거리의 매력은 다 사라지고, 손님들의 발길도 줄어듭니다. 저자가 추천하는 골목식당들 이야기를 읽으니, 동네 골목식당들을 자주 찾아가서 노포를 만들어주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 페이지에 머물다

<골목 도쿄> PP.328-329


일 때문에 72시간 동안 30분 이상 잠을 못 잘 때, 일을 하다 길을 잃었다 싶을 때, 갑자기 마음이 무너질 때, 머릿 속에서 ‘푸슉’ 혹은 ‘트듭’ 하는, 구스다운 바람빠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려올 때….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할까요?

훌쩍 떠나랍니다. 물론 여행을 떠난다고 뭔가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쉼표 하나 찍고 돌아오는 겁니다.

‘나 없으면 회사는 어떡하지’ 걱정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이렇게도 덧붙입니다.

“여러분이 제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단 며칠간의 부재로 삐걱거릴 회사나 조직이라면 그대로 망하게 두는 편이 좋습니다”

자꾸 떠나다 보면 공PD처럼 ‘골목 이자카야’와 서서 먹는 ‘다치노미야’도 가보고, 일본요리의 짠맛과 농후한 감칠맛의 차이도 깨닫고, 일본주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징어 국수 원정기’까지 따라하기는 무리일 것 같지만요.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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