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비자림, 제주도가 품은 천년의 보물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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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4.12.24. 오전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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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어느 계절이 제일 좋았는지 생각해 보면 11월 중순이 떠오른다. 11월 초순에도 한 번, 11월 중순에 두 번 다녀왔는데 11월 중순이 좋았다. 물론 신록이 짙은 5월도 무척 좋지만, 날씨가 변덕스러운 제주도에서는 늦가을부터 한라산에 눈이 쌓이기 전까지가 기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다. 또한 한라산의 고지대는 물론 중산간지대의 단풍이 일기예보나 통념보다 훨씬 더 늦게, 11월 중순에 절정을 이룬다. 제주도에서만 제 맛을 즐길 수 있는 고등어회와 방어회의 한창 제 철도 이 때다.

◇ 언제 찾아도 안온하고 포근한 숲

그러나 12월은 애매하다. 지난 4일 비와 눈과 우박이 번갈아 내리다가 잠시 해가 비치는 궂은 날에 비자림을 찾았다. 원시림의 기운을 내뿜는 비자림은 늘 푸른 나무들이 주종이라서 4계절 언제 찾아도 안온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중산간지대 가운데 해발고도가 높지 않으면서 평탄지에 조성된 자연림이다. 남녀노소와 장애인이 모두 편하게 걸을 수 있는 탐방로를 갖췄다. 동행한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김찬수 소장은 “산림생태계로서의 가치, 보전 정도 등에서 비자림이 제주도 최고의 숲이라고 생각한다”며 “생각날 때마다 와서 걷고 나무의 상태 등을 살핀다”고 말했다.

사실 제주도에서 가치에 비해 저평가되고, 덜 알려진 곳을 들라면 비자림이 빠지지 않는다. 이른 봄에는 비목의 높은 가지 끝에 범상치 않은 모양의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비자나무를 중심으로 후박나무, 천선과나무, 자귀나무, 예덕나무, 때죽나무, 팽나무, 곰의말채나무, 푸조나무, 아왜나무 등 교목들이 하늘과 햇빛을 가린다.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비자나무 사이사이에 붉은 물감을 뿌려놓는다. 그리고 겨울, 아직 눈에 덮이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불고 우박이 떨어지는 궂은 날씨에도 비자림 속은 방풍효과 덕분인지 포근하다. 김 박사는 “지금은 비자림 일부에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지만 옛날에는 실습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고 헤맨 적도 있다”고 말했다.

◇ 나무와 덩굴의 더부살이

비자나무는 주목과 비자나무속의 상록침엽교목이다. 암꽃과 수꽃이 각기 다른 나무에서 피는 비자나무는 다 크면 높이 25m, 가슴높이 지름이 2m에 이른다. 잎은 줄기를 중심으로 깃털처럼 나 있는데 끝이 뾰족하며 길이는 손가락 두 마디쯤 된다. 소나무와 잣나무 잎의 수명을 2~3년이지만, 비자나무 잎의 수명은 6~7년이나 된다. 바람에 날려 온 수꽃의 꽃가루가 4월쯤 피는 암꽃 머리에 앉으면 그 다음해 가을 붉은 자주색 열매를 맺는다.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난대성 나무라서 제주도와 남해안에 주로 분포하며, 전북 정읍의 내장사가 북방한계선이다.

약 45만㎡의 비자림에는 수령 400년 이상인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생한다. ‘고려 문종 7년(1053년) 탐라국 왕자가 비자나무와 열매 등을 특산품으로 바쳤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근거로 ‘천년 숲’으로 불린다. 비자나무는 관상용으로도 매우 수려하지만, 판재 또한 아름다워 바둑판 등의 목재로서도 가치가 매우 높다. 게다가 열매는 구충제, 강장제, 기침감기·황달의 약재, 등불기름 등으로 용도가 넓었다. 비자 열매의 약효는 예로부터 유명해서 하루에 일곱 개씩 7일간 복용하라는 처방전이 남아 있을 정도다.

비자림에서는 다양한 양치식물을 볼 수 있다. 더부살이 고사리, 가는쇠고사리, 십자고사리, 바위고사리, 넉줄고사리, 쇠고사리, 잎이 큰 양면고사리, 도깨비고비, 관중 등 다양한 고사리류가 땅바닥을 뒤덮고 있다. 높은 나무의 줄기나 가지로 눈을 옮기면 송악, 콩짜개덩굴, 일엽초, 우단일엽, 줄사철나무 등 여러 가지 덩굴식물 및 착생식물이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찬수 박사가 비자나무 고목을 감싸고 올라간 착생식물 석위를 가리킨다. 김 박사는 “덩굴성 식물은 스스로 에너지 생산을 하지 않고, 다른 식물을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이용하는 쪽으로 진화했다는 점에서 진화전략이 진일보한 식물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는 저서 ‘나무와 숲이 있었네’에서 “비자나무 숲에서 가장 오래 된 800년생 비자나무의 등걸에 붙어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콩짜개덩굴은 마치 비늘로 덮인 거대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 삶을 위해 삶을 걸고 지켜낸 숲

비자나무 숲이 어떻게 1000년 이상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는지도 신기하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왕실이 비자나무 숲에 금표를 세워 직접 보호·관리했다. 금강소나무 숲을 보호하기 위해 황장금표를 곳곳에 세웠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식물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정밀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식물의 효용성이 높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민들이 번을 서가며 총을 들고 숲을 지켰다고 한다. 척박한 화산토 위에서 밭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한 구좌·조천 지역 주민들은 곶자왈, 용암동굴과 같은 지형이 농사에 필요한 물을 머금는 소중한 곳이라는 인식이 예로부터 절박했다. 그런 연장선에서 주민들이 비자림을 목숨 걸고 지켰던 것이 아닐까.

비자림에도 근년 들어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제주도에 따르면 2006년에 연간 11만명, 2011년에는 20만 명에서 지난해에는 46만2000여명이 입장했다. 올 들어서는 11월말까지 52만5000여명의 탐방객이 찾았다. 비자림이 뛰어난 접근성에도 불구하고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1500원씩의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도 무분별한 이용을 막아 보전에 도움을 준다. 울창한 난대림의 신비와 우리 역사의 애환을 간직한 비자림은 자손대대 물려줘야 할 보물임에 틀림없다.

제주=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비자림 ‘천년의 숲 사랑길’ 들머리 / 콩짜개덩굴 / 새천년 비자나무 / 남오미자 열매 / 비자림 탐방로 목책길 / 비자나무 우물 / 고즈넉한 숲길 / 비자림 제주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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