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세 100년, ‘신 삼대’의 삶, 한국 현대사가 되다 [신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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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2.11. 오후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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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2부> 다시 100년의 꿈 … 공존과 평화로 ① ‘新삼대’
ㆍ억척 어머니·민주화 목말랐던 아들·새 세상 꿈꾸는 손자…
ㆍ삼대의 굴곡진 삶 속에 녹아든 우리들 ‘보통 사람’의 꿈



1919년부터 2019년까지의 100년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첩첩이 쌓인 ‘생(生)의 탑(塔)’이다.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같은 역사의 분절점이나 정권의 변동 따위로 자를 수 없는 모두의 하루하루가 모인 시간이다.

세 사람이 있다. ‘36년생 강금선’, ‘65년생 은종복’, ‘97년생 은형근’. 어머니와 아들, 손자다. 이들 삼대(三代)가 살아온 이야기는 그 시절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가장 전형적이라거나 보편적인 사례도 아니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0원도 아껴가며 자식을 키운 80대 억척 어머니, 새마을노래에 잠을 깨고 최루탄 냄새와 함께 청년기를 보낸 50대 아들, 녹록지 않은 현실에 때로 불안해하면서도 다른 삶을 꿈꾸는 20대 손자 이야기는 우리들 이야기처럼 낯설지 않다. 지난 100년 각자 헤쳐온 삶은 그렇게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역사는 개인의 삶과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움직인다. 일제의 강제징용과 한국전쟁, 산업화를 떠받친 저임금 노동자와 대거 생겨난 도시 빈곤층,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 대안적 삶에 대한 욕구 등이 이들 삼대의 삶에도 녹아들었다. 어떤 교차점에선 직접 뛰어들었고, 어떤 교차점은 스쳐 지나갔다. 개개인의 선택이 삶이 되고, 그 삶들이 모여 지금의 국가 공동체를 만들었다.

지난 2일과 9일, 10시간에 걸쳐 삼대의 인생사를 들었다. ‘다 같이 만들어온 세상(다·만·세) 100년’ 2부는 지난 100년의 가려진 주인공, 보통 사람들의 ‘신(新)삼대’ 이야기로 시작한다.

■ 36년생 강금선

일본 오사카 출생…9세 때 광복 맞아 고국으로…

14세 때 한국전쟁, 19세 결혼, 22세 상경 …다락방·판잣집·벽돌집 옮기며 네 아들 키워

꿈꾸는 나라? “뭣이든 한가지만 꾸준히 하면 성공하는 나라”




“오카상(엄마), 하늘에서 사토가리(설탕) 내린다. 먹고 가자!”

이야기는 1945년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부산항에 도착한 해방귀국선에서부터 시작된다. 항구에 내린 아홉 살 금선은 경북 군위군으로 가는 길 위에서 “하야이”(하얗게란 뜻의 경상도 사투리) 쏟아지는 눈을 맞았다. 오사카에서 나고 자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눈이다. 해방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뛸 듯이 기뻐했지만 귀국 배편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느날 아버지가 서둘러 떠나야 한다고 했다. 살림살이도 못 챙기고 귀국선에 올랐다. 그렇게 닿은 낯선 모국의 첫 기억이 ‘설탕이 내리는 하늘’이었다.

금선은 1936년 12월17일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국권을 빼앗긴 지 6321일째 되던 날이다. 그해 2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가 중국 루쉰 감옥에서 눈을 감았고, 여름엔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뛴 마라토너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뒤 고개를 떨궜다.

금선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비단 등짐을 지고 와 일본에 파는 비단장수였다. 그 덕에 오사카에서도 배를 곯지 않고 지냈다. 일제의 토지·식량 수탈로 고통받던 시기, 한반도 농촌에선 일본이나 만주로 떠나 새로운 터전을 꾸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사토가리’ 외의 일본어는 잊었다. 그래도 금선의 언니는 여전히 그를 ‘미요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부른다.

돌아온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 설탕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군위군 소보면 새기터 산골마을에 자리 잡고 열 살 무렵부터 집안일을 도왔다. 낮에는 누에를 치고 밤에는 베틀로 명주 비단을 짰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학교는 가지 못했다.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이 넷이었다. 금선까지 공부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또래들이 검은 보자기를 허리에 묶어서 책보를 메고 산길을 졸졸졸 가는데 그렇게 좋아보이는 거야. 하루는 빈 보자기를 묶고 학교에 따라가봤지. 운동장만 밟아보고 집에 돌아왔는데 고무신으로 어찌나 맞았던지…. 그 뒤로 학교 가겠단 생각을 못했지.” 1955년 무학이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여성이 100명 중 97명이었다. 그보다 몇 년 앞선 금선의 유년기 산골마을 사정이 나았을 리 없다.

14세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새기터에도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직접 포화가 미치지 않았지만, 먼 산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면 밥을 짓다가도 숨었다. 밥이 까맣게 타도록 소나무 밑에서 가슴을 졸였다. 전쟁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멈췄다. 2년 뒤인 1955년 겨울, 19세 금선은 집안 어른들의 소개로 인근 마을 청년과 결혼했다. 남편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혼례를 치르고 일주일 뒤 복귀했다. 결혼 당일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이였지만, 지난해 남편이 세상을 뜨기까지 63년간 흔한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살았다.

시댁은 금선의 마을에서 걸어서 1시간30분쯤 걸리는 군위군 소보면 화실이었다.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정지꾼’(부엌일하는 사람·경상도에서 며느리를 부르는 말)이 돼 15명쯤 되는 시댁 식구 살림을 챙겼다. 큰 항아리에 쌀을 채워놓고 살 정도는 됐지만, 금선은 다른 미래를 꿈꿨다. 남편과 함께 1958년 3월2일 쌀 한 말과 차비만 들고 서울로 왔다.

시외숙모가 일하던 기름공장에 자리를 얻었다. 방 하나에 여자 열 명이 쪽잠을 잤다. 금선은 장사를 꽤 잘했다. “다른 사람들은 참기름에 식용유를 반씩 섞어가지고 파는데, 나는 조금만 섞었어. 그러니 한 번 먹어본 사람은 내 걸 찾았지.” 이후 한 평쯤 되는 다락방을 구해 부부의 첫 보금자리로 삼았다. 남편은 서울 종암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이름) 앞에서 풀빵 장사를 시작했다. 1960년 큰아들을 낳고 금선은 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등에는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광주리를 이고 길을 나섰다. 참외를 들고 청량리에 나간 첫날, 단속반이 광주리를 걷어찼다. 참외들이 바닥에 흩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서러워도 돈은 벌어야 했다. 다음날부터 참외 대신 오이며 호박 같은 채소를 광주리에 담았다.

상경 2년 만에 부부는 4·19혁명을 맞았다. 이승만 정권은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을 군과 경찰을 동원해 진압했다. 학생 수백명이 죽거나 다쳤다. 남편은 그 혼란통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선의 손을 잡고 창경궁을 구경하고는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남겼다. 사진이 귀한 시절이었다. 얼마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란” 굴곡진 인생은 계속됐다. 다락방에서 다락방으로, 다시 작은 전셋집으로 금선네는 동대문구 휘경동을 떠돌았다. 다락방이 불에 타고, 도둑이 들고, 전세금을 떼이고…. 그런 삶에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1960년대 연탄은 생활필수품이었지만 금선네 가족은 이조차 아꼈다. 제지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남편이 가져오는 종이 찌꺼기를 태워 방을 데웠다.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산 양은 소쿠리와 냄비도 60년 넘게 쓰고 있다. 금선은 지금도 입버릇처럼 “나한테는 10원 한 푼 안 들어갔다”고 말한다.

500원, 1000원씩 ‘차곡차곡’ 강금선씨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42년 전 새마을금고 통장. 1977년 4월 개설한 통장엔 500원, 1000원을 모아 차곡차곡 저금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은종복씨 제공


1963년 100달러를 갓 넘긴 1인당 국민소득은 1977년 1000달러를 돌파했다. 그사이에도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적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금선은 1977년 만든 새마을금고 통장에 500원, 1000원씩 저금을 하며 도장을 찍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나, 1972년 10월유신 같은 신문지상의 일은 금선이 지나온 세월을 기억하는 단위가 아니다. ‘첫째를 잃어버렸다 찾았을 때’ ‘둘째를 낳았을 때’ ‘막내가 걸었을 때’ 같은 일들로 기억을 되짚는다.

고단했을 법한 삶이지만, 금선은 “항상 행복했다”고 말한다. “아들들이 속 안 썩이고 착했고, 내 돈을 떼일지언정 떼먹은 일 없어.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가족이 중요해.” 네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결혼할 때 집을 마련해준 게 최고의 자랑이자 그의 인생 자체였다. 지금도 새벽 3시에 일어나 폐지를 모아 판다. 그렇게 번 돈을 매일매일 장부에 기록한다. 20년쯤 된 일상이다. “요즘엔 일하는 양을 많이 줄였어. 자식들이 하지 말라고도 하지만 운동 삼아서 하는 거니까. 나는 놀고는 안되거든. 구정에도 설날 빼고 일했지. 나는 놀고는 안돼.”

■ 65년생 은종복

휘경동 판잣집에서 태어나…

대학시절 ‘5월 광주’ 실상 알게 된 뒤 민주화 투쟁 가담…

인문과학서점 운영하다 ‘국보법’ 위반 옥살이

IMF도 견뎠는데 세상은 점점 책과 멀어져 결국 서점 떠나기로 결정…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남북이 평화로운 세상 꿈꾸죠”




1965년 7월16일, 서울에 108.8㎜의 비가 쏟아졌다. 29세 금선은 휘경동 판자촌에서 셋째 아들을 낳았다. 산업화로 농촌 인구가 대거 서울로 몰려들면서 서울 곳곳엔 무허가 정착지, 소위 ‘판자촌 달동네’들이 속속 들어섰다. 장마철이면 수재민이 자주 나왔던 시절이다. 그날 금선네에도 물이 찰방찰방하게 들어찼다. 무허가 판잣집이지만 그즈음 9만원을 주고 서울에서 처음으로 가진 내 집이었다. 복이 굴러들어왔다고 셋째 이름을 ‘종복’이라 했다. 이후 이곳을 불하받아 벽돌집을 지었다. 2003년 장안동으로 떠날 때까지 40여년간 가족의 터전이 된 곳이다.

뒤이어 태어난 막내아들까지 4형제의 집은 복작복작했다. 어린 시절 종복의 하루는 오전 6시 마을 확성기에서 나오는 새마을노래와 함께 시작됐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통장 일을 한 부모는 새마을교육을 받고 오기도 했다. 학교에선 매주 월요일 ‘애국조회’를 열고, 때때로 반공웅변대회를 했다. 한 학급에 80명씩 있던 ‘콩나물시루’ 교실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박정희 1인체제였으니, “이 세상에 대통령은 박정희밖에 없는 줄 알”고 지냈다.

어린 종복의 눈에 어머니 금선은 ‘돈, 돈, 돈’ 하는 사람이었다. 그즈음부터 부모님은 집 지하실에 플라스틱 공장을 차려놓고 일했다. 저녁때가 되면 어머니는 다시 집을 나서 채소 다듬는 일을 돕고는 푸성귀를 얻어왔다. 라면 하나에 그보다 더 싼 국수 한 다발과 푸성귀를 넣고 저녁을 지었다. “침이 고이는 냄새가 났지만 먹기는 싫은 모양새였어요. 돈 아끼려고 엄청 자주 해주셨죠.”

고등학생이었던 종복은 1980년 5월 광주를 모르고 지나갔다. 데모도 싫었다. 인근 대학생들의 시위로 최루가스가 날아올 때면 ‘자기 위치에서 고쳐나가면 되지 왜 데모로 표출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84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몸이 아파 바로 휴학한 뒤 이듬해 복학했다. 문학회에 들어가 5·18 관련 사진물과 비디오를 돌려보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사진들을 보고 눈이 뒤집어졌어요. 이게 정말인가.” 그즈음부터 데모가 있는 날이면 빠짐없이 거리로 향했다.

1987년에도 그랬다. 학교 안까지 들어온 전경에게 직격탄을 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그 한 달쯤 뒤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즈음 연세대에서 열린 연합집회에 참여했을 땐 다연발 최루탄, 소위 ‘지랄탄’에 맞았다. 깨어나보니 근처 건물 여자화장실로 옮겨져 있었다. 그해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다. 가슴 뜨거운 기억이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얼마 전 영화 <1987>을 보는데 가슴이 쓰리더군요. 권투도 헤비급과 라이트급은 서로 못 싸우게 하는데, 그 뒤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변했나 싶어서요. 좀 더 맞서야 했는데 싶어서 한이 맺히더라고요.”

그 시기 금선은 전경으로 데모를 진압하는 둘째, 거리에 나서는 셋째를 동시에 걱정했다. 하루는 전경차에 귤 두 상자를 넣어주고, 다른 날은 종복이 데모한다는 소리에 따라나섰다. 1991년 강경진압으로 사망한 성균관대생 김귀정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에도 종복을 따라갔다. 학생들로 가득 찬 지하철에서 “계집애 하나 죽었다고 난리야!”라고 소리치는 금선을 종복은 급히 막았다. “그래도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을 데려오면 밥을 해 먹이고 재워주고 그러셨죠.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선 뭐든 하시는 분이니까요.”

늦깎이로 대학을 졸업한 뒤 1993년 성균관대 앞 인문과학서점 ‘풀무질’을 인수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을 꿈꿨다. 금선이 건넨 종잣돈 7000만원이 있어 가능했다. 그때부터 10년이 종복이 기억하는 책과 사람을 나누던 ‘책방’ 시절이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난이 찾아왔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종복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뒤에도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던 장소다. <전태일평전>, 월간 ‘말지’ 등을 판 게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판매죄라고 했다. 금선은 ‘아드님이 빨간 물이 들었어요’라는 경찰 말에 “내 아들 빨갱이 아니거든!”이라고 악을 썼다. 종복은 남영동에서 2주, 서울구치소에서 2주를 보내고 나왔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는 책방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큰돈을 만지지 못해도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보다 무서운 건 책과 점점 멀어지는 세상이었다. 언젠가부터 은행 빚이 쌓여갔다. 서가 구석에라도 수험서를 들여놓아야 했다. 결국 돌아오는 6월 풀무질을 떠나기로 했다. 풀무질 ‘일꾼’이 된 지 26년 만이다. 남은 빚 1억5000만원은 낡은 아파트를 팔아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제주도에서 작은 인문과학서점을 열 생각이다. 실패한 걸까. 괴로운 순간들이 때때로 찾아온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 버팀목이 되고 그가 힘들 때 내가 버팀목이 되고…. 풀무질이 작지만 그런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걸 쭉 지키지 못해서 괴로운 상태예요. 하지만 또 헤쳐나가야죠.”

부쩍 약해진 어머니를 생각한다. “내가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 수 있을 때 어서어서 앞으로들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 어머니에게 전화할 때면 “앉으나 서나 아들만 생각하는 어머니 맞습니까”라고 첫인사를 한다. 수화기 저편에선 “새들도 지 새끼는 먹이거든?”이라는 애정 어린 핀잔이 돌아온다.

■ 97년생 은형근

제천간디학교 4학년 때 동갑 친구들 ‘세월호 참사’ 보며 분노…

1년 뒤 광화문서 국민상주단으로 나서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도 참여…

헬조선이란 말 낯설지 않지만 “자유롭고 존중받는 개인의 공동체 소망”




형근이 태어난 날은 아버지 종복이 기억하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1997년 11월4일 병원 분만실 밖에서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런 큰 소리는 처음 들었어요. 하늘이 노란 것도 파란 것도 아니고,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늘 색깔이 확 바뀌는 거예요.”

형근은 어린 시절 ‘풀무질의 아이’로 자랐다. 종복은 책방 한쪽에 형근의 자리를 마련해두고 일했다. 바쁠 때면 책방에 들른 성균관대 학생들이 형근의 형, 누나가 돼 돌봐주곤 했다.

2004년 삼각산재미난학교 1기로 입학했다. 초등학교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다. 부모 손을 잡고 가 본 학교는 자유롭고 재미있어 보였다. 할머니 금선은 이 선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자 손을 붙잡고 집 근처 초등학교에 출석시켜 하루를 보내게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대안으로 보지 않으세요. 제가 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할머니 시대를 살았다면 저라고 크게 달랐을까 하는 마음도 들어요.”

뒤이어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6년 과정의 제천간디학교에 들어갔다. 간디학교 4학년이던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희생자들은 그와 같은 나이였다. “국가에 대한 믿음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경계마저 무너졌단 생각이 들었어요.” 열일곱 살 형근은 국가가 공동체 구성원을 보호하는 ‘울타리’인지, 가두는 ‘철창’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1년 뒤 광화문 분향소의 국민상주단으로 검은 옷에 노란 리본을 달고 섰다.

또래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거쳐온 데 따른 불안함을 때때로 느낀다. 후회하진 않지만, 마음이 복잡하다. “어렸으니 온전히 저의 선택이라고만 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입시공부를 했으면 어땠을까 궁금할 때가 있어요. 학력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회에서 제 가치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 중이고요.”

성인이 되고 나선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고 조금씩 생활비를 낸다. 학비와 용돈을 모두 지원받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대학과정을 1년쯤 다니다가 자퇴한 뒤론 아르바이트와 ‘페미니즘’ 등의 세미나를 병행하고 있다. “페미니즘은 제가 몰라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히고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배워보게 됐어요. 장래희망, 사회적 위치 같은 걸 떠나서 개인적으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짬이 나면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축구경기를 보고, PC방에서 게임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푼다.

대한민국의 과거·현재·미래인 ‘삼대’ 지난 9일 서울 동대문구 장안2동 자택 앞에서 강금선씨(오른쪽)가 이날 새벽에 모은 폐지를 쌓아둔 리어카 앞에서 아들 은종복씨(가운데), 손자 형근씨와 함께 서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요구 촛불집회 즈음에도 주말이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는 “우리 나이대에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게 좋다”고 했다. 이해가 갔다. ‘삼포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용어가 그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 자신도 일을 하느라 집회에 매주 나갈 수는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더 분했다. 자신이 이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하는지 형근은 아직 답을 모른다. 다만 그간 배워 온 커피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다. 종복의 ‘책방’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커피’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도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형근은 인터뷰를 마치며 “서로 상처 주지 않고, 자신도 옆의 사람도 자유롭고 존중받는 개인이 되는 공동체”를 말했다. 아버지 종복은 “온 세상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남북이 평화로운 세상”을, 할머니 금선은 “이 길 저 길 기웃하지 않고 뭣이라도 한 가지를 꾸준히 하면 성공하는 나라”를 말했다.

역사와 서로 흔적을 주고받으며 이어진 삼대의 인생이 이들에게 던진 소망이자 과제다. 같은 시간 이 공동체를 떠받치고 지탱해온 모두들이 그리는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 특별취재팀

강병한·유정인·심진용·박광연 기자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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