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쌀 5000여 톤 외지로 반출

▲ 담양역 터. 아파트 위쪽 공터가 옛 담양역 자리다.
 1922년 7월 광주역이 생기고 6개월 뒤 광주와 담양 간에 철도가 연결됐다. 이 철도는 1944년까지 운행되다 철거됐다. 그리고 1960년대 잠깐 복원시도가 있었으나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지금도 국가계획상으로는 광주~대구 간 철도 부설이 검토되고 있으나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광주~담양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몇 개의 역이 새로 생겼다. 광주 쪽부터 헤아리자면 망월역, 장산역, 마항역, 담양역 등이 그것이다. 망월역은 북구 운정동 270번지 일대, 장산역은 담양 고서면 원강리 85번지 일대, 마항역은 담양 봉산면 마항마을 근처에 있었고 담양역은 담양읍 백동리 248번지 일원에 있었다.

 이들 역은 오늘날 거의 잊혀진 상태다. 역이 있던 동네 사람들조차 생소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그런데 10여년 전 쯤, 이들 역 터를 소개한 일본 사이트를 본 적이 있다. 담양 철도의 운영기간이 고작 20여 년에 불과하고 어떻든 침탈의 목적으로 가설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무관심에 비하면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일본인들에게는 그래도 추억의 역사공간이어서 그런 사이트라도 만들었을까? 반면에 우리는 부정적 기억으로 얼룩진 곳이라 애써 반추해내는 게 마뜩잖아서였을까? 이유야 어떻든 이들 역 가운데 망월역과 담양역의 흔적은 지금도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다.

 

부정적 기억에 반추 마뜩찮은 분위기

 

 그렇다면 20여년 간 철도 운영이 담양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쉽지 않는 문제다. 우선은 증언자를 만나기 어렵다. 설령 증언자를 만난 경우라도 당시 기차를 목격했다거나 몇 번 타봤다는 정도다. 관련문헌 자료도 많지 않다. 그래서 담양 사람들에게 철도는 막연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고 동시에 과장된 말이 사실처럼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철도를 광주와 담양을 잇는 일종의 근교철도 쯤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전에도 몇 차례 얘기한 적이 있지만 이 철도는 애초 담양을 넘고 순창을 거쳐 남원에서 전라선 철도와 연결할 목적으로 부설됐다. 따라서 결코 광주와 담양 간 내왕자를 위해 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철도이용자도 많지 않았다. 광주역을 제외하고 가장 큰 역이었던 담양역의 경우, 1926년 탑승객은 10만 명 정도였다. 하루 270여 명이었다는 얘기다. 망월, 장산, 마항 같은 간이역은 그보다 훨씬 적어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철도가 담양사회에 끼친 변화를 영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개통 직후 담양역 면적은 1만2000여 평이었고 본선 320m와 측선 390여m를 가진 규모였다. 역무원도 여섯이나 있었고 역사무소와 대합실 등을 겸한 40평 가까운 본가 건물도 있었다.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던 시절이라 기관차에 주입할 급수시설도 있었다. 하지만 광주역과 20여 킬로미터의 가까운 거리라 따로 연료공급시설인 급탄고는 없었다.

 이 역을 통해 오고간 화물은 1926년 당시에 연간 2만 톤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 단연 가장 큰 물량은 쌀이었다. 그러나 담양역을 통해 얼마만큼 많은 쌀이 빠져 나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여러 단편적인 자료를 조합해 보면, 1920년대 전반기에 송정리~광주~담양 간 철도 전체를 통해 연간 5000여 톤이 반출됐다는 수치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담양의 쌀 생산량은 얼마나 됐을까? 오늘날 담양은 연간 3만 톤의 쌀을 생산한다. 이 양은 6300여 농가가 생산한 것이니 농가당 평균 4.7톤을 생산한 꼴이다. 반면에 20년대 전반기 담양군에는 1만7000여 가구가 살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농가였다. 이들 농가가 1년간 진땀을 흘리며 생산한 쌀은 1만2000톤이었다. 농가당 1톤도 못 되는 양을 수확한 셈이다. 사정은 광주도 비슷했다. 그리고 이렇게 광주와 담양에서 어렵싸리 생산한 쌀은 연간 3만3000톤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전반기에만 철도를 통해 광주와 담양에서 5000여 톤이 빠져나갔으니 산술적으로 생산량의 25%가 이출됐다는 얘기다.

 

담양 죽제품 생산액 껑충 뛰는덴 기여

 

 물론 철도가 담양에 기여한 측면도 없지 않다. 오늘날 담양과 대나무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온 나라 사람들에게 죽향 담양의 이미지는 이제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담양이 죽향 이미지를 지닌 데는 죽제품의 역할이 컸고 그 이미지는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철도가 들어오기 직전 담양의 죽제품 생산액은 34만 원이었다. 그런데 철도가 들어온 뒤 생산액은 50만 원으로 뛰었다. 그 이전 생산액에서 담양을 크게 앞지르던 나주나 광주를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도 담양의 죽제품 산액은 가파르게 증가해 30년대 초엽에 이미 70만 원 선에 도달했다. 이후 담양에서 생산한 죽제품, 특히 부채와 참빗, 그리고 삿갓은 철도를 통해 전국은 물론 만주로까지 판매됐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서만큼은 철도가 담양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곰곰 따져볼 일이 있다. 옛말에 가난한 집일수록 베틀소리가 높다고 했다. 담양의 죽제품 생산이 1920년대 이후 급증한 것은 가혹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에서 빚어진 결과는 아니었을까? 호구지책의 슬픈 역사가 지금의 죽향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이제 담양엔 철길도 없고 흥청거리던 죽제품시장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대숲만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도 간혹 되씹어보면 차가운 레일이 빚어낸 역사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 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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