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竹)여주는 대밭, 그 '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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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0.05.19. 오후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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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돈삼 기자]
봄비에 젖은 그 대.
ⓒ 이돈삼

비가 내린다. 밤새도록 내렸다. 봄비치고는 드물게 꽤 많은 양이다. 봄비는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꽃가루 수북하게 내려앉은 대지도 말끔히 씻어 준다. 이 비 그치면 금세 여름 날씨가 스며들 것이다.

'봄비 속에 떠난 사람'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문득 그 대(竹)가 생각난다. 보고만 싶어진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 했다. 비 내린 뒤 여기저기서 죽순이 솟아날 것이다. 서둘러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다.

'대나무고을' 담양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대숲이다. 가는 길 내내 대숲 생각뿐이다. 빗줄기는 더 굵어진다. 죽향문화체험마을에 닿았다. 이른바 '이승기 연못'이 있는 곳이다. 매표소 문은 아직 잠겨 있다. 인적도 없다.

봄물 머금은 아까시꽃.
ⓒ 이돈삼

꽃잔디와 어우러진 죽향문화체험마을.
ⓒ 이돈삼

봄비 맞는 대숲이 연녹색의 생기로 넘실댄다. 아까시 꽃도 봄물을 가득 머금었다. 꽃잔디도 봄비 덕에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정자와 어우러진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몸에선 한기가 느껴진다. 옷차림을 너무 가볍게 한 모양이다. 하지만 마음만은 흡족하다. 대숲에 섰기 때문이다. 대숲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사철 언제라도 좋다. 호젓한 운치도 그만이다.

요란한 건 빗소리뿐이다. 빗방울은 대 기둥에 부딪히더니 기둥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래도 대는 의젓하기만 하다. 간지럽지도 않는 모양이다. 자신이 사군자의 하나라는 걸 알고 있는 것만 같다.

빗방울에 반응하는 건 댓잎이다. 그 무게를 견뎌내기 버거운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털어내기 일쑤다. 빗방울을 다른 이파리로 옮겨놓고 시치미를 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장난이라도 하는 것 같다.

봄비가 깨운 죽순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 이돈삼

우후죽순. 여기저기 죽순이 지천이다.
ⓒ 이돈삼

어디서 무슨 소린가 들리는 것 같다. 청솔모인가 싶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귀를 쫑긋 세워본다. 톡-톡-톡-. 죽순이다. 빗방울이 깨운 것들이다. 기지개를 켜면서 솟아오른 죽순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바깥세상 구경을 한 죽순은 바로 키를 키우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쑥-쑥- 자란다. 그동안 세상구경 못한 분풀이라도 하는 것 같다. 죽순의 키 재기는 화급을 다툰다.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튼실한 몸을 만들어야만 하는 모양이다.

죽순은 하루 평균 50∼60㎝씩 키를 키운다. 물론 품종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다. 하지만 생장이 빠른 건 사실. 하루에 110㎝나 자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우후죽순이란 말을 실감한다.

우후죽순. 여기저기 죽순이 돋아나고 있다.
ⓒ 이돈삼

이제 껍질을 벗은 대에 빗방울이 맺혔다.
ⓒ 이돈삼

여기도 죽순, 저기도 죽순이다. 이제 갓 고개를 내민 것들이지만 모양새가 다르다. 굵은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다. 굵게 태어난 죽순은 굵게 키를 키운다. 가늘게 나온 것은 또 그렇게 키를 키운다.

죽순의 성장은 30∼40여 일 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성장을 끝낸다. 속전속결(速戰速決)이다. 이후부턴 내실을 다지기 시작한다. '키 큰 것이 속 없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면 몸집을 단련시켜야 한다.

죽순이라고 모두 작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벌써 몇 미터씩 자라 껍질을 벗고 있는 것도 보인다. 여러 날 전에 세상구경을 한 모양이다. 이미 다 자라 연푸른 속살을 완전히 드러낸 대도 있다. 하지만 키가 다 컸다고 결코 어른이 아니다.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 일. 색깔이 다르다. 대의 나이는 표면의 색깔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표면이 연한 색은 아직 어린 것들이다. 진할수록 어른 대에 속한다.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는다. 자기 영역에서 자란다. 보이지 않는 대밭의 질서다.

봄비 내리는 날 대밭 풍경. 연둣빛 생기로 가득하다.
ⓒ 이돈삼

연초록 찻잎과 댓잎. 이 찻잎을 덖으면 죽로차가 된다.
ⓒ 이돈삼

대밭엔 차나무가 지천이다. 댓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자라는 차나무다. 이 찻잎으로 차를 덖으면 죽로차가 된다. 대숲의 청량함이 그대로 스며든 웰빙차로 인기다. 이름만큼이나 값어치를 한다.

대의 어린잎을 따서 만들면 또 댓잎차다. 댓잎차는 식이성 섬유질이 풍부하다. 반면 카페인은 없다. 칼로리도 낮아 건강차로 알려져 있다. 죽순요리와 대통술, 대통밥도 특별하다. 특히 죽순회무침은 쫄깃쫄깃 씹는 맛이 일품이다.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로 귀까지 황홀하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대는 예부터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민들에겐 일상 생활용품의 재료였다. 젓가락, 바구니, 베개, 붓통, 바늘, 참빗, 대발, 죽부인, 죽창, 지팡이, 효자손 등등. 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한사코 좋은 대밭이다. 시인 신석정의 말처럼 '한사코 성근 대숲'이다. 그 대숲이 영화 속 배경 같다. 비 내리는 대숲에 선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나 할까. 정말 죽(竹)여주는 대밭이다.

봄비 내리는 날 대밭. 여기저기 죽순이 돋아나고 있다. 담양 죽녹원 풍경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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