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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禪敎訣 "은 누구의 법문이며 ,어떤 내용인가요 ?

禪敎訣(선교결)은 누구의 법문이며, 어떤 내용 인가요 ?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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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3.06.24 조회수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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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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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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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전통 예절, 의식, 세시풍속, 명절 8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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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결(禪敎訣)은 서산대사가 말년에 저술한 짧은 내용의 논서입니다. 서산대사는 이 선교결을 통해서 선(禪)과 교(敎)의 관계를 설명하고 선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산대사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言)"라고 하면서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구구한 교리를 이해하는 것 보다 선(禪)을 통해서 마음을 닦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사들의 관행에 대한 매서운 질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서산대사는 하근기 중생들이 많은 시대에는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만을 귀하게 여기고 이치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진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올바른 정맥을 택해서 수행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본 페이지에 게재하는 선교결은 성철스님의 번역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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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선(禪)을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하고, 교(敎)를 하는 사람도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한 법(法)을 가지고 서로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하여 손가락과 말로 서로 다투고 있으니 슬프도다! 그 누가 능히 결단하겠는가?
그러나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言). 교(敎)는 말이 있는 곳으로부터 말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요, 선(禪)은 말없는 곳으로부터 말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다. 말없는 곳으로부터 말없는 곳에 이르면 그것을 누구도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하니, 이는 실로 가엾은 일이다.

교(敎)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敎) 가운데도 또한 선(禪)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성문승(聲聞乘)도 아니며 연각승(緣覺乘)도 아니고 보살승(菩薩乘)도 아니며 불승(佛乘)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가(禪家) 입문의 첫 구절이요 선(禪)의 뜻은 아니며, 세존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가르침(敎)인 것이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현재·미래의 나고 죽는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인천 소승교(人天 小乘敎)],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연각(緣覺)의 중승교(中乘敎)],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대승원돈교(大乘圓頓敎)]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一物)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레를 내뿜는다. 몸을 뒤쳐 한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퍼부어 뭇 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 [바로 조사(祖師) 문중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기틀을 말함], 이는 선(禪)이 교(敎)와 다른 점이다.

이 선의 법(禪法)은 우리 부처님 세존도 또한 진귀조사(眞歸祖師)에게서 따로 전해 받은 것이며, 옛 부처의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요즈음 선의 뜻을 그릇 이어받은 자는 더러는 돈(頓)·점(漸)의 문(門)으로써 정맥을 삼으며, 더러는 원돈(圓頓)의 교(敎)로써 종승(宗乘)을 삼고, 더러는 외도의 글을 인용하여 비밀한 뜻을 설하며, 더러는 업식(業識)을 희롱함으로써 본분을 삼고, 또 더러는 그림자(光影)를 인정하여 자신으로 삼는다. 심지어는 눈멀고 귀먹은 방할(棒喝)을 함부로 행하여 부끄러움도 없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들인가? 법을 비방하는 그 허물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내가 말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배워서 알며,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마음 길이 다하여 끊긴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알아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가섭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은 뒤로부터 나아가서는 후세에 전한, 이른바 달마(達磨)의 '툭 트이어 성이랄 것도 없다(廓然無聖)'한 것과 육조(六祖)대사의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善惡不思)'한 것과, 회양(懷讓)의 '수레가 멈추니 소를 채찍질한다(車滯鞭牛)'고 한 것과 행사(行思)의 '여능의 쌀값(廬陵米價)'과 마조(馬祖)의 '서쪽 강물을 다 마심(吸盡西江)'과 석두(石頭)의 '불법을 모른다(不會佛法)'함과 운문(雲門)의 '호떡(胡餠)'과 조주(趙州)의 '차 마심(喫茶)'과 투자(投子)의 '기름 탐(沽油)'과 현사(玄沙)의 '흰 종이(白紙)'와 설봉(雪峰)의 '공 굴림( 毬)'과 화산(禾山)의 '북 두드림(打鼓)'과 신산(神山)의 '바라 두드림(敲羅)'과 도오(道吾)의 '춤을 춤(作舞)'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같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곡조를 노래한 것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이는 모기가 무쇠 소를 물어뜯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낮은 근기(劣機)는 많으나 이들이 교외별전의 근기가 아니므로 다만 원돈문(圓頓門)의 이치의 길(理路), 뜻의 길(義路), 마음의 길(心路), 말의 길(語路)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으로 이치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져 자미(滋味)가 없고 만지지 못하는 곳에서 칠통을 두르려 부수는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그대가 팔방의 납자(衲子) 무리들을 접대할 때 칼을 쓰되 긴밀히 하여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지 말 것이요, 바로 본분인 경절문의 활구(活句)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쳐 스스로 얻게 하여야만 할 것이니 그것이 바야흐로 종사의 사람을 위하는 됨됨이니라.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함을 보고 문득 뻘 밭으로 이끌어 교리를 말하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종사(宗師)가 이 법을 어기면, 비록 설법하매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러이 쏟아져 내릴지라도 이는 모두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 것이 될 뿐이다.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 법을 믿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한 깨침을 얻지 못하여도 목숨을 마칠 때에 악한 업에 끌리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바른 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옛날 마조가 한번 소리치자 백장이 귀먹었고 황벽이 혀를 내둘렀으니, 이는 임제종(臨濟宗)의 연원이다. 그대는 반드시 정맥(正脈)을 가려서 종안(宗眼)이 분명할 것이므로 이렇게 누누히 말하는 것이니, 뒷날 이 노승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에 노승의 말을 저버리면 반드시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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