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시오], 일본이든 조선이든 민초들은 핍박의 대상일 뿐이다. 권력자들의 전쟁놀음에 끌려나온 그들의 질펀한 삶을 그린 대하장편소설
현재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김경호씨가, 10여 년 동안 자료 조사와 현장 탐방을 거쳐 역동적으로 엮어낸 대하장편소설 [구로시오]가 해드림출판사에서 나왔다.
저자는 십 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많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발로 뛰어 모은 역사적 사실을 날줄로, 민초들의 삶을 씨줄로 이 소설을 엮었다.
이 소설은 우선 역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민중들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국가와 이념 그리고 적대적 관계를 떠나, 민초들은 그 나라 권력자들의 도구 즉 핍박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이 있다.
구로시오(?潮)는 적도에서 일어나 북반구로 흐르는 해류다. 현해탄을 지나는 대마해류(츠시마해류)는 구로시오의 지류다.
[구로시오]의 주인공은 일본과 조선의 민중
반일 감정의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와 그 국적을 가진 일본인을 모두 하나의 사상체, 가치관을 지닌 인격체로 동일시 해 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의 모순은 민족과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국적만 가지고 평가 분류한다는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국적과 관계없이 나름의 다양한 사고와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일본인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를 일본이라는 국가의 틀에 함께 묶어 제국주의자 또는 협조자로 낙인 찍는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 일본인 모두를 가해자로, 한국인은 모두 피해자라로 구분하는 이분법은 잘 못 된 것이다.
식민지 과정에서 당시 조선의 친일파는 개인적 이익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팔아 자신들만의 권력과 치부의 길을 도모했다.그들이 해방 후에는 다시 친미파로 변모하고 일부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만일 남쪽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면 그들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다시 친공산주의로 변절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과연 그들을 피해자라 할 수 있을까?
반면,일본에서도 당시 일본의 많은 국민이 군국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전쟁에 강제 동원돼 죽어 나갔다.많은 양심적인 사람이 군국주의자들에게 저항하다 탄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이들을 가해자라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일본인, 한국인, 미국인 등 국적에 의해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이분법과 편견에 빠져 있다. 인간성은 국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이나 각 개인의 인격에 의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 기술은 권력자와 지배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그들이 피지배자인 민중들을 어떻게 인식했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어떻게 교묘하게 민족주의를 이용해 왔는지 [구로시오]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임진왜란, 정유왜란 그리고 병자호란
임진왜란(1592년)이 끝나고 나서 조선인 사망자가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왜냐하면 희생자의 대다수가 민중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만 십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히데요시에게 강제 동원된 일본 왜병의 반수 이상인 15만이 이국땅인 조선에서 목숨을 잃거나 귀화를 하였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난 40여년 후 이번에는 청의 침입을 받아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났다. 조선은 청에 항복을 하고 속국이 되었다. 항복의 조건으로 청의 병사들의 노리개로 끌려간 조선인 여인들만 수십만에 달했다.
역사 속에서 이 땅 저 땅 구별 없이, 피지배자가 된 민중들이 지배자와 권력자에게 어떻게 희생되고 피해를 입었는지 [구로시오]가 이 민초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전쟁에 끌려 다닌 민초들
[구로시오]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민초들의 삶을 그린 진정한 의미의 대하 역사소설이다.
미래는 예측이고 과거는 실재했던 사실이다. 현재는 과거라는 사실의 거울을 통해 미래를 비추어준다. 과거를 모르고 미래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이 책은 지배자들에 의해 비틀어져 숨겨지고 버려진 역사적 사실을 한 올 한 올 바로 잡아 민초의 역사로 되돌려 놓은 역사 이야기다.
이야기 즉 영어의 [story]는 역사를 나타내는 [history]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역사를 빼놓고 이야기를 논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역사를 씨줄로 이야기를 날줄로 하여 엮어진 대하소설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포로들을 도래인(渡來人)으로 칭했고, 조선에 남은 왜병은 항왜(降倭)로 불렀다. 지배자들은 상대국에 정착한 민초들을 모두 반민(叛民)으로 낙인찍었다.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강(長江)이다.그 물줄기를 이루는 것은 민초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체는 민초이다.
소설 [구로시오]는 일본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봐야할 필독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를 민중사적인 관점에서 이토록 철저하게 고증하여 그린 소설은 [구로시오]가 처음이다.
- 책속으로 이어서 -
[대마도주] 중에서 발췌
“자, 술잔을 올리옵니다.”
기생들이 간드러지게 교태를 부리며 술잔을 따랐고, 야스히로는 흡족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았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자 주안상의 분위기가 고무되었고, 이에 맞춰 가무가 시작되었다. 흥이 난 목사가 자신의 잔을 들이킨 후, 치렁치렁 늘어지는 관복 소매를 왼손으로 바치며 야스히로에게 자신의 술잔을 건넸다.
“자, 제 술을 한잔 받으십시오.”
야스히로는 기생들이 따라주는 거푸 마신 터라 이미 술이 거나한 상태였다. 송 목사가 내미는 잔을 한 손으로 받아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야스히로는 주안 석상에 관모를 쓰고 있는 상주 목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따라준 술을 주욱 들이키더니 술잔을 돌려주는 대신 관모 아래쪽으로 삐죽 나온 목사의 흰머리를 다시 한 번 빤히 쳐다보고는 주위에 다 들리도록 조선 말로 외쳤다.
“관모 밑으로 삐져나온 머리가 분칠해놓은 것처럼 하얗게 보이는구려. 나는 수년 동안 전장을 돌아다니느라 머리가 하얗게 세었지만, 대체 목사는 무슨 일로 머리가 그렇게 하얗게 세었소? 내보니 주악과 기생의 치마폭에 파묻혀,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머리털이 나보다 더 셌으니 이것이 도대체 웬일이오?”
“어허허, 거 별 말씀을 다 하시오.”
목사 송응형은 모처럼 준비한 향연에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야스히로가 조롱하는 것을 알고는 그의 무례함에 화가 치밀었으나, 그냥 속으로 꾹 참았다.
‘무례한 놈 같으니!’
야스히로의 무례함에 송응형은 기분을 잡쳤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모처럼 준비한 연회는 소득도 없이 파흥이 되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내가 상주 목사 따위를 상대할 처지가 아니다.’
술이 거나해지자 야스히로는 기고만장하였다. 도주의 서찰이 지니고 있는 자신이니, 스스로 일본을 대표하여 전권을 위임받은 특사로 여겼다. 그 거만함과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그는 상주 목사의 면전에서 면박을 주고는 곧바로 한성으로 올라왔다. 한양에 있는 왜관인 동평관에 머무르며 즉각 조정에 면담을 신청했다.
“대마도 출신의 야스히로가 일본국의 사절로서 면담 요청을 해왔소. 이를 어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 공론을 정하시오.”
“대마도주의 벼슬이 일품이고, 태수이옵니다. 태수라 함은 수령에 해당합니다. 그런 연유로 수령의 전권을 받은 사절이라면, 수령과 동격으로 처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야스히로를 사절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뢰옵니다.”
대신들이 모여 야스히로의 처우에 대해 공론을 벌인 결과, 결국 대마도주의 지위를 감안해, 그를 국가 사절로 대우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게 사절을 접대하는 절차에 따라서 국빈에 해당하는 연회를 베풀어 주기로 하였다. 예조에서는 외국의 사절을 접대하는 규범에 따라 악공을 부르고, 관기를 준비시켜 주안을 마련하는 등,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대접을 준비하였다.
국빈급에 해당하는 예식과 주안이 마련되자 야스히로는 매우 흡족했는지 표정에도 만족한 듯한 모습이 여실히 나타났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기분 좋게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분위기에 취해 과음한 야스히로는 술기운이 올랐는지 가뜩이나 벌건 얼굴이 더욱 벌겋게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역관을 통해 점잖게 말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즐겼는데, 제 버릇 개 줄까, 술에 취하더니, 언행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예조 대신들도 야스히로의 행실에 무례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갑자기 주안상에 차려 놓은 산해진미를 왼손 팔뚝으로 쑥 밀어 한쪽으로 몰아놓았다. 주안상 위의 음식 그릇이 넘어지고 쏟아졌다. 그의 돌출적 행동에 건너편에 앉아있던 역관이 깜짝 놀라 왜말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그러자 그는 역관의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오른손을 품 안에 넣어서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 주안상 위에 놓았다. 역관은 물론 접대를 하던 예조 대신과 관기들 그리고 뒤쪽에 있던 악공들까지도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언 줄 아느냐?”
그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서는 손에 가득 집은 알후추(胡椒)를 술상 위에 뿌렸다.
“어머, 이게 무어야?”
“어머 호초네, 호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