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뚱뚱하다고요? 체지방은 사람보다 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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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1.13. 오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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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뚱뚱하다고 다들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성인 남성 평균 체지방률이 10~20%, 여성은 20~30% 수준인데, 정작 돼지 체지방률은 15%밖에 안됩니다. 다리가 짧아서 뚱뚱해보일 뿐입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도 사실, 돼지 입장에선 억울합니다. 그만큼 돼지가 멍청하다는 얘기인데요. 돼지 지능은 유아 서너 살 수준인 70 정도로서, 동물 중에서는 아주 똑똑한 축에 속합니다."

11일 서울 종로의 협동조합 ‘누군가의 집'에서 돈마루 이범호 대표가 ‘우리가 몰랐던 돼지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박순욱 기자

황금돼지 해를 맞아 한 돼지전문가가 ‘우리가 몰랐던 돼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 11일 저녁 서울 종로의 생활협동조합 ‘누군가의 집’ 지하 골방이 강연장이었다. 이날 강사는 돼지축산전문기업인 돈마루의 이범호 대표. 그는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경기도 이천의 성지농장 경영주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축산을 전공한 후 1976년부터 돼지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국내 대표적인 돼지 전문 축산인이다.

이날 20명 남짓한 참석자들이 이 대표의 강연을 들은 ‘누군가의 집'은 미술, 외국서적 번역, 외식업 등에 종사하는 회원들이 작년 6월 ‘동네 문화 사랑방'을 표방하면서 만든 신생 협동조합이다. 참석자들은 강연을 듣기 전 이범호 대표가 준비한 신품종 얼룩돼지 수육을 시식했다.

다음은 이범호 대표의 강연 내용을 요약한 글이다.

◇돼지는 억울하다

황금돼지 해를 맞아 돼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돼지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뚱뚱하다, 더럽다, 게으르다 등등 부정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올해 황금돼지 해가 되니 다들 ‘언제 내가 돼지를 안좋게 얘기했냐'며 복, 재물, 가화만사성 등을 돼지와 연관시켜 올 한해 재복이 깃들길 빌고 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1976년부터 돼지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올해로 44년째다. 2016년부터 돼지는 생산액 기준으로 쌀을 누르고 우리나라 주식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아직도 돼지는 냄새난다는 등 부정적 이미지로 둘러싸 있다. 그래서 오늘은 돼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지적하고 돼지의 품격을 올리는 얘기를 좀 하고자 한다.

우선 돼지는 뚱뚱하다는 지적부터가 돼지 입장에서 볼 때 다소 억울하다. 돼지 체지방률은 15% 수준이다. 반면에 남성은 체지방률이 10~20%, 여성은 20~30% 정도다. 사람보다 지방이 훨씬 적은 데도 뚱뚱하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짧은 다리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돼지는 죄다 부정적으로만 그려진다. 유대인은 방목하는 소, 양과 달리 사람 식량인 곡물을 먹는 돼지를 꺼려했다. 사람 식량을 축낸다는 이유에서다. 마태복음(7장 6절)에서는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마라'는 구절이 나온다. 흔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이란 말이 나온 연유다. 누가복음(15장)에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는 말로

돼지를 탕자에 비유하고 있다.

◇손정의 사장, 삼성그룹과 돼지와의 인연

일본, 한국의 최고 부자 스토리에 돼지가 모두 등장한다.

일본 최고의 부자인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손 사장은 할아버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주소도 없는 빈민촌에 살았다. 생업을 위해 손 사장 할머니가 당시 돼지를 키웠는데, 돼지에게 먹일 잔반을 얻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식당들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소년 손정의는 할머니의 돼지 잔반 리어카를 탄 기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용인의 삼성 에버랜드에는 국내 최초의 기업형 양돈장이 있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일본에 골프 여행을 다니던 시절, 일본 골프장 인근에 돼지농장이 있는 것을 보고 농장주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양돈보국'을 염두에 두고 자연농원에 양돈장을 만들고 수백만 그루의 밤나무를 심었다. 돼지 분뇨를 밤나무 거름으로 활용했다. 이 회장은 공개 석상에서 "이제부터 삼성의 미래 신산업은 전자와 축산"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축산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한때 6만두까지 길렀던 삼성의 돼지 축산사업은 이병철 회장 사후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없어졌다. 1988년 이병철 회장 서거 후 대기업에 대한 양돈업계 저항이 거세졌고, 아들인 이건희 회장은 축산업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의 부름을 받고 삼성의 돼지축산업에 종사했던 윤희진 다비육종 회장은 "만약 삼성이 지금까지 돼지축산업에 종사했더라면 세계 최대 축산그룹인 태국 CP그룹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비육종은 전국 9개 농장에서 돼지 6만마리를 사육하고, 연간 380만 마리의 돼지 종자를 공급하는 돼지전문 기업이다.

◇미-중 무역전쟁에도 빠지지 않는 돼지

트럼트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힘 겨루기가 한창인 미-중 무역 전쟁에도 돼지가 핵심 현안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이 지난해 7월 중국 수입품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이 맞대응 차원에서 사실상 수입을 금지한 품목 중 하나가 콩(대두)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대두 수입국이고, 반대로 대두는 미국 농산물 중 수출 1위 품목이다. 미국 대두 수출의 62%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산 콩과 중국산 돼지는 깊은 연관이 있다. 콩기름을 짜고 남은 지꺼기인 콩깻묵(대두박)은 돼지 사료의 주원료이다. 시진핑 주석이 자국내 돼지농가의 반발을 예상하고도 미국산 콩 수입을 금지한 것은 트럼트 핵심지지층의 급소를 때리기 위함이었다. 미국의 콩 생산 95%를 생산하는 팜 벨트(미 중서부 농업지대)는 러스트벨트(미 북동부의 쇠락한 공업지역)와 함께 트럼프의 양대 핵심지지층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며 느긋한 입장이다. 미국산 콩이 중국의 ‘아킬레스 건’인 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산 콩이 장기간 중국에 수입되지 않을 경우, 중국 정부가 식량문제로 큰 곤욕을 치를 것으로 본 것이다.

중국은 최대 돼지 생산국이다. 전세계 돼지 10억마리 중 중국에만 4억5000만 마리가 있다. 중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먹거리가 돼지고기다. 중국 음식에는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는게 거의 없을 정도로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전세계 돼지의 거의 절반을 생산하고도 모자라 돼지를 수입하는 게 중국이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미국 콩 수입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돼지 사료인 대두박 공급이 막혀버렸다. 미-중 무역전쟁 이후 미국산 콩 수입은 전년 대비 98%나 줄었다. 시진핑 주석은 미국 농가에 타격을 주기 위해 미국산 콩 수입을 금지했지만, "돼지에게 먹일 사료가 없다"는 자국 돼지농가들의 아우성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렵게 됐다. 자칫 하다간 중국 최대 식량인 돼지고기 수급이 불안해져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근 중국 언론들은 중국이 미국산 대두 수입을 늘리기로 했다고 잇달아 보도했다. 시진핑 주석이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미국산 콩 수입을 재개한 것은 미국산 콩이 중국 최대 주식인 돼지를 사실상 먹여온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돼지 이야기

집을 뜻하는 한자 가(家)는 돼지(豕) 위에 움집 지붕을 올린 것이다. 지붕 아래 돼지가 있는 곳이 집이라는 의미다. 결국 집은 사람과 돼지가 사는 곳이라는 의미도 된다.


돼지는 인류와 가장 오래 동반한 가축이기 때문에 사람과 내장 구조가 거의 같다. 신체 장기 대체 실험용으로 쓰이는 동물이 돼지인 까닭이다.

경기도 이천에 저명산이 있다. 돼지(돝)울음산이란 의미다. 도드람포크의 브랜드명 ‘도드람’은 여기에서 따왔다.


미국 뉴욕의 금융가를 뜻하는 ‘월 스트리트(Wall Street)’에도 돼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뉴욕이 시골 논밭이었을 때, 돼지가 농작물을 마구 헤치자 뉴욕 시민들이 돼지를 막을 벽(Wall)을 만들었다는 것이 월 스트리트의 기원 스토리다.

동전 저금통이 왜 돼지 모양이 많은가 하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피기(pygg)라는 점토로 만든 그릇에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 은행이 판촉물로 저금통을 만들려고 도자기 만드는 장인에게 "피기 점토로 저금통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 잘못 전달돼 ‘피그(돼지)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가 됐고, 결과적으로 대히트를 친 것이 돼지 저금통의 어원이라는 얘기가 있다.

돼지는 개보다 훨씬 후각이 뛰어나다. 캐비어(철갑상어 알),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와 함께 ‘세계 3대 미식’으로 불리는 송로버섯(트러플)을 찾는데도 오래 전부터 돼지가 이용됐다. 송로버섯은 땅 속에 묻혀 있어 사람 육안으로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로버섯을 찾아낸 돼지들이 자꾸 값비싼 송로버섯을 먹어버려 지금은 돼지 대신 개를 주로 이용하고 있다.

로마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코끼리부대를 물리친 것도 돼지부대라는 기록이 있다. 로마를 한때 점령하기도 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다. 그런데 BC275년 기록을 보면 로마인들이 아랍의 코끼리부대 퇴치를 위해 돼지 부대를 투입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수많은 돼지들의 고성이 소리에 예민한 코끼리를 놀라게 해 퇴각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이 전투에 승리해 돼지 기념 주화까지 만들었다.

◇갈길 먼 동물복지

내가 운영하고 있는 성지농장은 2015년 동물복지 인증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유럽으로 축산농가 연수를 갔을 때 풀밭에서 뛰노는 돼지들을 보며 ‘아, 나도 이렇게 돼지를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천마리의 돼지를 그대로 두고 농장을 개조할 수는 없었다.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2010년에 구제역이 발생해, 기르던 3000여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돈사가 1년 동안 텅 비어 있을 때 동물복지형 농장으로 시설을 바꾸게 됐다

현재는 어미돼지 360마리를 비롯해 2000마리의 돼지가 있다. 이곳 돼지들은 분만을 전후한 한달여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풀어서 키운다.

그러나, 전국의 동물복지 농장 수는 늘어나지 않고 있다. 일반 농장에 비해 사육 두수가 적고, 반대로 관리 비용은 더 많이 들지만, 그에 비례해 돼지고기 가격을 높게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복지 인증 돼지고기는 일반 고기보다 평균 20% 정도 값을 높게 받고 있으나 그나마도 판매가 어렵다. 게다가 돼지를 방목할 경우, 정부는 그에 걸맞는 분뇨처리시설을 갖추라고 하는데, 이런 조건들을 다 갖추고 수지를 맞출 수 있는 농장은 없다.

이범호 대표가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성지농장에서 돼지에게 풀을 먹이고 읶다. /돈마루 제공

정부는 축산농가들에게 앞으로는 동물복지를 권장하면서 뒤로는 까다로운 환경규제로 동물복지 농장 운영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동물복지를 권하고 환경부는 환경규제로 이를 막고 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축산농가들의 한숨은 깊어간다.

[박순욱 기자 swpark@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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