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감관들이 고요해지니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라는 근원적인 질문 속으로 들어간다. 유지니 공주의 뒷모습은 말을 건네오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지나온 역사의 빛과 어둠의 순간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며 허용할 수 있는 ‘용기’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어둠과 빛, 그사이의 어스름과 노을조차 제 몫이 있더라고.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서 세상 사람들의 등대가 되어주고,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해 학교와 병원을 짓고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길러내며, 역사의 부름에 실천행으로 기꺼이 답했던 ‘아름답던’ 한국의 종교들. 이제 도리어 세상의 걱정을 끼치는 존재가 되고 있다. 누구의 탓을 하기 전 회광반조(廻光返照)로 ‘안’을 본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공업(共業)이다.
길을 잃으면 지도를 펴야 한다. 우리는 맨 처음 과연 어디를 향해 이르고자 이 길을 나섰던 걸까? 역사는 이미 넘치도록 가르쳐주고 있다. 바닥을 치면 다름 아닌 그 바닥을 짚고 일어설 수 있음을. 고대 인도사회에서 브라만교가 백성을 착취할 때, 차별과 억압을 헤치고 등장한 붓다의 평등수행공동체 승가(僧伽)가 그랬다. 사람의 귀하고 천함은 지금 이 순간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行)에 달려있음을 설파한 붓다. 부파불교와 신라 귀족불교가 중생의 삶과는 유리된 채 관념적 교리 놀음과 기득권 체제 유지에만 봉사하고 있을 때, 시대의 새벽을 열며 등장한 원효(元曉)의 민중불교운동이 그러했다. 고려 불교가 탁상공론에 젖어 사자충(蟲) 때문에 죽어가는 사자처럼 안으로부터 곪아들어 갈 때 보조국사 지눌은 수선사(修禪寺) 결사(結社)를 일으켜 감겨진 시대대중들의 눈을 띄웠다. 일제강점기 암흑세상을 견디던 조선 백성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돕던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으로 불교 근대화의 횃불을 들었다. 한국불교는 그렇게 위기를 맞을 적마다 높은 법상(法床) 위의 군림을 멈추고 기꺼이 바닥으로 내려와 중생 곁에 머물기를 선택함으로써 이 땅에 대승(大乘)을 구현해왔다. 한 개인의 역사도, 사회와 종교의 역사도 ‘바닥과 기꺼이 만나기’가 갖는 심미안을 회복할 때 타성을 벗고 생생한 활구(活句)로 살아 오른다. 내려간 김에, 바닥의 촉감과 온전히 만나본다. 늘 디디고 다니면서 몰라봤던 땅바닥의 심정, 만물을 품어 길러내고 있는 너른 품!
발아래 나무들이 벗어놓은 옷이 바스락 무심의 노래를 부른다. 어떤 이는 곱단한 단풍으로, 어떤 이는 고루 물들지 못해 멍든 모습으로, 어떤 이는 얼마나 밟히고 찢겼는지 몸뚱이 한쪽이 떨어져나간 채로. 일생패궐(一生敗闕), 내 한평생을 다 버린 듯 무너지는 순간(<서장(書狀)>, 대혜 종고 선사께 보낸 증시랑의 편지 중)이 우리 누구에게나 다녀가지 않던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사랑이 떠나갈 때, 혼신을 쏟았건만 구하던 일이 잘 안될 때. 하나 나무는 지난 봄과 여름 푸르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가을 한복판이던 날, 제자는 운문(雲門) 선사께 여쭈었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다 떨어졌을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는 답 왈, “체로금풍(體露金風). 가을바람에 온몸 완연히 드러나지.” 유지나 공주의 등결인 듯 빈 가지 하늘 향해 합장하고 선 나뭇결, 고요히 깨어나 쓰다듬는다. 아름답다, 그대 참!
운성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육국장·BTN불교라디오 울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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