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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 태실 터에 있었으나 1976년 몇 가지 석조유물과 함께 충남대로 반출되었다.
▲ 충남대에 있는 연령군의 태실비 연령군 태실 터에 있었으나 1976년 몇 가지 석조유물과 함께 충남대로 반출되었다.
ⓒ 이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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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남대학교 도서관 앞 잔디밭에는 몇 개의 석조(石造) 유물과 비석이 있다.

그 석조 유물과 비석들은 제자리를 떠난 비운의 석조유물이다.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고새울의 태봉산에서 반출된 연령군의 태실비로 세간의 주목 받지 못한 가운데 여러 비석군과 함께 방치돼 있다.

제자리를 떠난 지 올해로 꼭 40년이 된 태실비는 충남대학교의 소유물이 됐다. 숙종대왕이 가장 아꼈던 왕자로 불행하게 20세에 요절한 연령군의 기구한 운명과 닮았다.

태실(胎室)이란, 조선시대 왕실의 자손이 태어나면 태(胎)를 묻고 복을 기원했던 시설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명당의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무병장수하여 왕위의 계승에 기여할 것이라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따른 것으로 명당을 선점하고 태실을 만들어서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대개는 대석(臺石)·전석(磚石)·우상석(湡裳石)·개첨석(蓋檐石) 등으로 만들었다. 왕세자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를 세웠다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가봉(加封)했다. 국왕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둬 관리했으며 태실 주변에는 경직을 금지시키고 접근을 제한했다.

왕자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관할 지역을 승격시키고 예우하며 태실을 태봉으로 격상시키고 주위 석물을 추가로 배치했다. 이런 과정은 <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1699~1719), 제19대 조선임금 숙종의 서자이며 경종, 영조의 이복동생이다. 은신군이 양자가 되고 남연군 또한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연령군은 흥선대원군의 고조부가 된다."

연령군의 묘는 그가 함께하기를 그토록 원했던 모친 명빈 박씨의 묘가 있는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가야산 자락에 있다.

"태실비 전면에는 강희 38년(1699년 숙종 25) 6월 13일 인시생(康熙 三十八年 六月 十三日 寅時生) 왕자 아기씨 태실(王子阿只氏 胎室), 후면에는 강희 38년 9월 29일 입(康熙 三十八年 九月 二十九日 立)이라고 쓰여 있다."

서울에 있던 연령군의 묘는 1940년 모친 명빈박씨 옆으로 옮겨졌다.
▲ 모친 명빈박씨와 연령군의 무덤 서울에 있던 연령군의 묘는 1940년 모친 명빈박씨 옆으로 옮겨졌다.
ⓒ 이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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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들에게 수십 년 전에 태실비가 사라진 배경에 대해 들어봤다. 태봉산의 태가 담겨 있던 태와 백자항아리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졌지만 태실비와 태실의 석조유물들은 마을의 태봉산에 모셔져있었다고 한다. 태실비가 대술의 태봉산에서 사리진 시기와 배경은 다음과 같다고 마을사람들은 주장한다.

1960년대 충남대학교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 보관 중이던 석조유물을 살펴보더니 태봉산에서 옮겨진 연령군의 비가 맞다면서 가져갔다고 한다. 주민들은 "지역의 향토유물이 다 없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 한다

기자가 연령군의 사라진 태실에 관심을 두고 마을주민의 증언 등을 확인한 결과 연령군의 태실비와 석등 등 사라진 석물은 1960년대(충남대는 1976년으로 기록) 반출됐다. 주민들에 석탑의 부재를 사진으로 확인해주니 마을회관 앞에 보관하던 태실의 석물이라고 했다. 지역 주민들은 1960~1970년대만 해도 문화재 관리가 소홀해 지역의 문화재가 허술하게 반출됐다면서 아쉬운 반응을 보였다. 마을에서 이런 저런 사정이 있었으며 정성적인 경로를 통해 취득한 게 아니라는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예산 가야산은 조선 왕실에서 주목하던 명산으로 남연군의 묘 제각인 명덕사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제를 드리거나 왕실의 왕자들이 휴양하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가야산 일원에는 1928년 당시까지 왕실에서 관리하던 태실은 5기이며 일제강점기부터 백자항아리와 태을 서삼릉으로 반출하며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국권을 상실하며 빚어진 아픈 역사의 상처다.

1928년 조선총독부는 왕실의 토지와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왕직의 이름으로 태실정리를 계획하고 전국에 묻어둔 조선왕의 태 53기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모두 옮겼다. 그 터에 남아 있던 태실비와 석조유물 등 이후 관리가 소흘해지며 본격적으로 훼손돼 반출됐던 것이다.

한편 태실비가 있던 태봉산의 터는 태양광사업으로 원형이 모두 훼손되었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가야산에는 조선왕실과 연령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령군의 묘는 1940년 일제의 구역 정리에 의해 서울 대방동에서 모친 명빈 박씨가 있는 덕산면 가야산으로 옮겨졌다. 인근에 헌종의 태실 남연군과 흥령군묘 등 왕실 관련 조선왕실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연령군의 태실 터에 있던 석조유물로 충남대학교 잔디밭에 있다.
▲ 연령군의 태실에 있던 석조유물 연령군의 태실 터에 있던 석조유물로 충남대학교 잔디밭에 있다.
ⓒ 이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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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과 예산 지역에서 사라진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실비는 누구의 비인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는 비석이다. 당연히 모셔진 태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현재 연령군 태실비는 충남대학교 잔디밭에 세워져 있는데 그곳은 태실비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마을주민들은 언제든지 떠난 태실비가 제자리를 찾아올 그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역사유적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어야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내포특위위원장인 김용필 충남도의원은 "우리 지역의 향토문화재를 우리보다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면서 "문화재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만큼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포지역, 특히 가야산지역의 문화재 안내판을 세우는 등 정비사업과 더불어 가야산 일원에서 반출된 수많은 문화재를 찾는 환수·복원 활용 등의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역사문화유적의 보존을 위해서는 예산군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해당 지자체의 소극적인 대처에 현재의 소유자가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반환을 거부할 수도 있다.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하는 걸 거부하는 이유로는 현지에서 보관 및 관리가 이뤄질 형편이 안 되기 때문 혹은 도난·훼손 우려를 꼽을 수 있겠다.

예산군과 지역의 시민단체에서는 지역에서 사라진 문화재를 찾고 향토 유적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제자리를 잃은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만약 공공 박물관을 만들거나 사업비 확보가 어렵다면 우선 할 수 있는 것, 가야사지 일원 석조유물 정비 등을 진행해 전시 및 보존할 수 있는 야외유물전시관 건립을 택할 수도 있다. 근대역사문화 도시인 군산과 강경에서는 자신들의 향토문화재를 보존해 관광자원화하면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도 잘 활용하고 있다.

예산군은 가야산 지역의 역사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갖고 있는 것들을 지켜나가야 한다. 이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가능성이 있는 투자다.


태그:#연령군, #가야산, #태실비, #명빈박씨, #덕산도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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