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유태일 '잘못된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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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7.25. 오후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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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앞 오월의 꽃 장미가 활짝 피었다. 아침 이슬 머금은 꽃송이 휘어져 고개 숙였다. 이웃한 반송의 푸르름에 꽃송이 붉음을 더한다. 아침 햇살은 장미꽃, 장독대, 양파, 마늘밭에도 반기며 내린다. 밤사이 내린 이슬에 햇살이 눈부시다. 오월은 어머니의 산실이다. 뒷산 뻐꾸기 무엇이 애달파 끝없이 운다. 내 말 쫌 들어 보라고 하소연이다.

내가 생모를 안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다. 읍내 오일장에 온 고향 어른들 "너 엄마 안 보고 싶나."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의아해했다. 내가 '옥희 엄마요.'라고 불렀던 그분이 나를 낳아준 생모였다. 나를 낳아 일 년쯤 되었을 때 소 새끼 젖 떨어지면 배내기 주듯이 나는 읍내에 있는 소실댁에게 주어졌고 우유를 먹으며 자랐다. 내가 어미로 알고 생명을 준 은인으로 여겼던 그분이 소실댁이었다. 기막힌 일이었지만 나는 어렸고 아버지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라는 반항 한번 못하고 소실댁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랐다. 정은 깊어졌고 소실댁 또한 온 정성을 다해 나를 키웠다. 장화홍련전의 계모 같았으면 피가 섞이지 않음을 눈치로 알았을 텐데. 키운 정이라더니 헌신적 모성애를 느끼며 자랐다.

지난밤에 뻐꾸기 뒷산에서 울더니 새벽녘엔 가까이서 들린다. 뻐꾸기는 머리와 목 부분은 잿빛이 도는 푸른색이고 아래는 흰 바지에 회색 가로무늬를 넣었다. 노란 구두를 신었다. 마치 무대 복을 입은 여인같이 옷맵시를 낸 놈이 숯 것이다. 수놈이 뻐꾹, 뻐꾹 할 때 암놈은 조용히 해라, 들킨다. 삐 삐 삐 하면서 알 서너 개를 때까치 알과 섞어 놓는다. 뻐꾸기는 둥지를 털고 알을 놓고 20일의 산고를 치르지 않는다. 남의 젖가슴과 모성애를 빌리는 탁란 조이다.

때까치 둥지에는 노란 주 등이 새끼들이 어미를 반기며 먹이를 받아먹는다. 몇 날 며칠이 지나면 뻐꾸기 새끼들의 못된 버릇이 나온다. 어미 사랑을 독차지하며 먹이 독식을 위해 때까치 새끼를 밀어붙인다. 작은 집이 비좁다고 밀어붙여 때까치 새끼를 둥지 밖으로 떨어뜨린다. 어미는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 뻐꾸기 새끼는 한 달쯤 지나면 다 성장하여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한다.

내 어미는 집 나간 간난 자식을 왜, 찾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을까. 뻐꾸기라서 그을까, 아닐 것이다. 깊은 한숨과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다. 물론 6남매를 먹이고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어린 자식이 생각건대 화려한 수놈 뻐꾸기는 맵시로 보면 시대를 앞서가는 멋쟁이였다. 택호가 본동 어른인 아버지는 농사만 짓고 촌에서 어머니와 사실 분이 아니다. 읍내에서 집 짓고 오일장 다니며 조카와 같이 쌀장사를 하셨다. 장차를 가지고 고향 사람들 장에 갈 때 태워주고 인심이 후해 인기가 높았다. 신작로에 뿌옇게 먼지 날리면서 차가 달리면 촌 어른들은 차 구경하려고 나왔다. 산판에서 아름드리 소나무를 실어 날았다. 운수업도 하셨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시쳇말로 쫌 잘나가는 잘생긴 신사였다.

어머니의 남동생은 면서기였고 아버지 역시 젊은 날, 면서기를 했다. 아버지는 서당에서 사서삼경과 천자문을 배웠다. 초등학교에서는 나이 많은 친구들과 공부하며 총명함이 뛰어나 남들과 달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시대 현모양처로서 아버지와 혼인한듯하다. 한 시대를 앞서가는 아버지와 함께하기엔 세상사와 정보에 어두웠다. 자식 낳고 집안 살림에 농사까지 맡아 머슴들과 함께 힘들게 일했다. 읍내에서 운수업 하시든 아버지의 외유(外誘)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소실댁은 나를 키워준 어머니이다. 밀양 박씨 가문에 7형제 중 맏이였다. 해방 직후 우리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대부분 국민은 해방 전과 비교해 생활상이 나아지지 않았다. 양반으로 무능한 아버지, 힘없는 어머니, 서른 날에 아홉 끼니 먹는다는 힘든 농경사회였다. 소실댁 어머니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나 하나만의 희생으로 집안을 살리리라. 체면에 고향에서는 장사를 못 하고 가족 전체가 떠나와 정착한 곳이 읍내였다. 할머니는 밀주 담고 돈 된다는 술장사를 시작했다.

소실댁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사회 물정도 알고 한발 앞서가는 여성으로서 낡은 관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신문화를 받아드렸다. 신여성의 저고리는 앞은 짧고 뒤는 길어 허리를 덮었다. 치마는 종아리가 조금 보일 만큼 짧게 입었다. 현대식 복장에다 외국 영화를 즐기며 독서를 통해 신지식을 받아들였다. 내가 어릴 때 본 어머니는 양반집에서의 법도와 허물어진 사회적법도 사이에서 신여성의 자유를 느낀 것 같다. 빛바랜 사진 속 단발머리에서도 찾을 수 이었다. 짧은 머리에 흰색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었다. 술장사는 먹고 살 만큼 잘되어 동생들 공부시키고 출가를 시켰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단골이 되었고 때늦은 처녀를 아버지가 머리를 올려 주었다 한다.

고향 어머니는 소실댁을 집에 들이는 것을 반대했으리라. 아버지의 독단적 결단과 호랑이 같은 불호령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어머니는 자식을 두고 떠날 수 없었으리라. 아버지의 횡포는 어머니이가 안중에 없었다. 형님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논 서너 마지기 팔아 등록금 주고 나머지는 아버지의 장사 밑천으로 사용했다. 논을 판 소식을 어머니는 풍문으로 들었다. 땅 치고 후회한들 어찌하겠는가. 큰형님은 어머니 편을 들어 아버지와 싸운 후 다른 지역 고등학교로 전학을 한 적이 있다.

막내인 나는 첫돌을 지날 때쯤 열이 몹시 나고 크게 아팠다. 생사를 헤맬 정도로 열병을 앓았다. 촌에서는 열병이 한번 돌면 또래의 친구들을 잃었고 그때는 예방의학이 전혀 없는 시절이었다. 내가 열이 떨어지고 미음을 먹을 때쯤 방에서 기어오는 아이가 절룩거렸다. 왼팔 신경이 마비되면서 성장을 멈추었다. 소아마비였다. 소아에게 발병하여 후에 수족 마비의 후유증을 남기는 병으로 척수성과 뇌성소아마비로 나눈다. 최근 백신이 개발되었다. 고향 어머니는 내 자식 고쳐 달라고 읍내 소실댁으로 스스로 보냈는지도 모른다. 촌에서는 치료할 병원이 없어, 뻐꾸기 어미가 되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기억 속에는 무서워하며 주사도 맞았고 특히 침 맞는 것을 싫어해서, 악서고 울며 도망 다녔다. 소실댁 어머니 덕분일까? 왼쪽 팔은 가르러 지고 손가락 움직임은 아둔해졌다. 완전한 장애를 면한 것이다.

어릴 때 나는 혼자 놀았고 남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다. 장애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마음 한구석에 어두움을 갖게 했고 희망을 좌절로 많은 상흔을 남겼다. "팔이 왜 그래." 물으면 감추어둔 비밀이 탄로 난 듯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춘기 때는 혼자서 방황했고 소공자 소공녀를 보면서 꿈도 꾸고 희망을 품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라는 병을 앓아 혼자서 즐기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서 소 먹일 풀을 뜯으면서 뱀들이 나올까 봐 무서워하며 긴장해서 일했다. 물소리, 종달새 소리 봄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대지를 밟고 뛰며 호흡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신을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인가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자신의 다리로 높은 곳을 향해 걸으면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은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만드는 고통이다.' 하지 않았는가. 과연 나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어린 날 몸이 불편하여, 부모님은 바빠도 내가 일을 도우면 마음 아파하시며 가벼운 것 시키고 쉴 것을 권했다.

친구들과 땔나무를 하기 위해 온 산천을 헤매며 걸었고 자신을 달련 시켰다. 고향산천의 아름다운 풍요가 지금의 내 삶에 건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것이 분명하다. 또 니체는 '아침놀'에서 '살면서 때로는 멀리 보는 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친한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생각하며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그립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처럼 어떤 대상과 얼마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생각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은 조그만 실수로 좌절하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마음고생이 심했고 생에 대한 생각도 많았다. 조금 가져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어릴 때 겪은 고통이 내게 준 큰 선물이라 생각한다.

30년 세월이 흘렀다. 결혼적령기 지금의 아내와 맞선을 보고 결혼을 약속했다. 결혼까지 겪은 우유 곡절을 다 말하기 민망하다. 약사이지만 장애가 있다는 것을 먼저 밝혀야 했다. 참아 내 입으로 '장애인인데 결혼 해주세요.'하기엔 자존심이 문제였다. 일상에서 불편함이 없었으니 나는 무관심하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또 터졌다. 서자 출신과는 혼인할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침묵했다. 중매선 이의 진실 해명이 있었다. 결혼 날은 받아졌고 물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용기 있는 아내의 선택을 받아 결혼했지만, 사실과 다르면 언제든지 떠난다는 엄포를 들어야 했다.

나는 두 어머니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 수 없었다. 그저 침묵했다. 생모를 도와 소실댁을 욕하면 길러준 정을 배반하는 것이고 소실댁을 도와 생모를 욕하면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침묵했고 보편타당성을 이야기하며 두 어머니의 공격을 받았다. 그때 나는 돈키호테였다. 혼자 머물고 혼자 생각하며 아픈 상처를 달랬다. 하루는 어머니가 '너는 좋겠다. 아버지와 같이 있고, 맛난 것 많이 먹어서.' 마음에도 없는 뜬금없는 말씀을 하신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낳은 자식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엄마는 알고 싶고, 피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침묵했다. 어느 편을 들었다가 생각지도 못한 소용돌이에 휩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큰방에서 대청마루로 나가는 문 옆에 괘종시계가 있었다. 밥을 주기 위해 걸상 위에 올라가 태엽을 감을 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태엽이 터져 몇 번인가 멈추었는데 형님은 태엽 고정솜씨가 뛰어났다. 고장 난 모든 기계는 형님 손에만 가면 살아서 움직였다. 괘종시계가 완전히 멈추어 선 것은 어머니가 몸이 아파서 우리 집 전체가 읍내로 이사하고 나서였다. 시대적 산물인 태엽은 사라졌다. 태엽의 역할을 건전지가 대신했다. 사회의 변화는 산업사회로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읍내에서 바다는 멀지 않았다. 국가공단이 들어서고 정유회사와 조선소가 바닷가에 높은 크레인을 달았다. 모든 사람은 도시로 모여들었다. 공장 굴뚝에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자동차 공장에선 차들이 줄지어 만들어지고 수출을 위해 큰 배에 실렸다. '잘살아 보세.'라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70년대 초반에 새마을 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 하루아침에 큰길과 골목길이 포장되고 초가집들은 기와집, 도단집으로 변모했다. 벌거숭이가 된 뒷산에도 조림사업으로 아카시아가 심어졌다. 배고파하던 우리에겐 점심시간이면 원조물자로 들어온 우유를 쪄서 주었다. 많이 먹은 친구들은 설사를 만나 혼쭐이 났다.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보릿고개가 없어지고 모두가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때 없어서 못 얻어먹고 배고픈 설움을 알았기에 먹을 것이 있고 조거만 한 부를 누림에 풍요와 행복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농촌에서 자식 키우며 집안 살림을 한다고 자신을 보살필 시간이 없었다. 모두 다 떠난 농촌에서 여자의 몸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월 어느 날 햇살이 눈부실 때 물이 휘돌아 흘러가는 방앗간 뒤 산그늘에 찔레꽃이 만발했다. 소는 풀을 뜯고 아이는 찔레 순 꺾어서 먹는다. 매 푸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노란 꽃술을 둘러싼 꽃잎 여섯 장, 우리 육 남매와 많이도 닮았다. 꽃잎은 희고 아름다웠다. 찔레꽃에 앉는 일벌은 보았어도, 아버지 보기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농사짓는 어머니는 찔레꽃을 닮았다. 뿌리가 튼튼하고 힘이 있어 가족이란 덩굴을 이루며 '튼실하게 자라만 다오.' 기도하며 자기희생을 아끼지 않으셨다.

소실댁에게 자식을 보낸 슬픔에 마음 아파할 시간이 없었을까. 치료 위해 소실댁에 보낸 자식이라면 한참 시간이 흘러 더는 치료가 힘들어 멈추었을 때 자식을 왜, 찾지 않았을까. 다섯 키우기도 어려운데 아픈 아들 하나 더 붙이면 얼마나 힘이 더 들었을까. 어머니는 힘든 세월 잊지 말자고 잊을 때마다 가시 하나씩을 몸에 심었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논밭에 일을 하러 가실 때 길가에 하얀 찔레꽃 피어났다. 찬란해서 슬픔의 꽃, 그래도 참아야 하는 순박한 꽃이 피었다. 음악인 장사익은 노래했다.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꽃이라고 어머니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간혹 분노의 빨간 찔레꽃을 마음속 깊숙이 피웠다.

어머니는 충분히 고독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노, 질투심을 누구에게 앞앞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아녀자가 참고 살아야 한다는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가 한 송이 찔레꽃을 짓밟고 지나갔다. 여자는 참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참았다. 긴긴 동지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참아야 한다고 수십 번 다짐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보다 큰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걸 느끼며 비감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또한 자식이 있어 참아 내어야 할 운명으로 알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방학 때 집에 들이면 아껴 키우던 닭 한 마리를 잡는다. 집에는 잡아줄 남자가 없다. 어머니가 직접 닭목을 내리치고 죽음에 발버둥 치는 닭을 잡고 놀라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피는 솟구쳐 흰 치마를 붉게 물들이고 얼굴에까지 핏자국이 남았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했다. 도시로 흩어져 살아가는 바쁜 자식들 소식에 목말라했으며 누님 이혼 소식에 혼절까지 하셨다. 그리움은 더했다. 자식 걱정에 마음 아파하시며 해거름 막차에 자식 소식 올까 봐, 차가 멀어지기까지 먼 산을 지키고 서 계셨다. 찔레꽃은 한더위 지나도 연이어 작은 꽃을 피운다. 촛불인가 어머니 가슴은 타들어 갔다. 그래서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쳐서 그해 겨울에 가슴앓이를 앓았다.

병석에서 어머니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셨다. 누님을 따라 몇 번 교회에 가셨다. 아마도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하느님을 굳게 믿어 언제 어디서든 두 손을 자주 모았다. 어머니는 그래도 남편을 사랑하셨다. 미워할 수 없는 자식들의 지아비가 아닌가. 미운 정, 고운 정 때문에 열 번도 속고 백번도 속고 살았다. 지금의 사람이라면 턱이나 있겠는가.

어머니는 아파 누웠고 병시중을 소실댁 어머니가 하셨다. 어머니는 자책한다. '내가 배우지 못해 지아비 하나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마음 놓고 깊은 사랑 한번 받아 보지 못했다. 내 속으로 난 자식을 키워준 어미야! 네가 무슨 죄가 있겠나. , 못난 죄, 운명의 장난이다.' 소실댁 어머니 말을 받는다. 기울어진 집안을 지키기 위해 한때는 우시장에서 국밥 장사까지 하고 주름이 삶에 훈장인 양 분첩으로 감추고 눈썹 화장하면서 ' 나도 죽어 이 집 귀신 되려고 귀한 자식 하나 보고 살아왔다.'며 소실댁 어머니 한탄한다.

접목을 하기 위해 찔레 뿌리를 대목으로 장미 눈이 붙은 줄기 하나를 준비한다. 뿌리에 T자 모양의 칼집을 내고 장미 눈을 깊이 넣고 비닐로 감싼다. 30일쯤 지나면 접목이 완성된다. 접목은 왜 할까. 씨앗으로 묘목을 얻어 이듬해 싹이 올라 그대로 키우면 열매가 작고 병충해에 약해 튼실한 묘목을 얻지 못한다. 꽃이라면 꽃송이 작고 병치레하겠지. 찔레와 장미는 같은 장미목 장미과에 속해 접목할 수 있다.

어머니는 소실댁에게 살아온 세월을 되돌려 씹으시며 '다 용서하자.' 한다.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을 지금 푸시려 한다. 내가 찔레꽃으로 대목이 되어 줄 테니 장미 눈이 되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라고. 장미는 순정이다. 꽃나무 하나에 한 송이, 두 송이, 다섯 송이, 제일 많은 것은 열 송이가 활짝 피어났다. 5월의 여왕이 분명하다. 사랑을 맹세하고 색깔에 따라 꽃말이 달라 젊은 연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꽃, 변치 않고, 영원한 사랑되기를 모두는 축배의 잔을 들며 기도한다.

소실댁 어머니는 장미꽃이 되어 아름다운 만큼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을 받았을까. 운명이라 백번 생각해도 민망하고 원통해서리라. 배움은 있어 체면은 있었을 텐데. 떠나고 싶었지만, 남자가 놓아 주지 않았다. 키워야 할 자식이 하나 생기고 세월은 흘러 깊은 정이 들었다. 아들인 내가 기억한 소실댁 어머니는 청순한 신여성 한 송이 장미였다. 농후한 향수를 즐겨 쓰셨고 가꾼 만큼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그도 한 집안을 살리고 늦게 피어난 6월의 한물간 장미, 꽃길을 걸어간 여인이었다. 꽃눈이 되어 고독과 한정된 사랑, 끝없는 그리움으로 인생 후반을 보내셨다.

나는 며칠을 두고 장미꽃을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예쁜 꽃이 이렇게 많이도 피었는데 나비와 벌, 한 마리가 날아들지 않는다. , 일까. 벌들이 장미의 본색을 알았을까. 아름다워지기 위해 들장미인 찔레꽃을 꺾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간혹 자연의 질서를 무시할 때가 많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꽃을 얻을 수 있다면 순리를 무시하고 접목을 서슴지 않는다. 벌들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싫은가보다. 벌은 작은 꽃 흰 아카시아, 냄새 물씬 풍기는 밤꽃을 찾아 멀리도 날아가지만, 집안에 만발한 꽃을 찾지 않았다. 로즈 향은 많이도 보았지만, 장미 꿀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자연은 순리를 따르지 않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중국엔 장미 꿀이 있다는데 아마도 접목되지 않는 순종 장미일 것이다. 나는 소실댁 어머니의 깊은 마음속을 본 듯하여 장미를 보면서 숙연해진다.

어느 가을 햇볕이 따사로운 날 어머니는 아름다움을 찾아 먼 길을 떠나셨다. 언제나 찔레의 순이 되어주신 어머니는 수수하게, 친숙하게 닦아오던 찔레꽃 다정함이었다. 바람에 날리어 흐르는 개울물에 찔레 꽃잎 돛단배 타고 떠나가셨다.

죽음이 천륜을 갈라놓을 수 있는지 몰라도, 부모와자식간의 애틋한 사랑을 뺏어갈 수 없다. 지금의 나의 고통은 참음의 한계를 넘어섰다. 천륜은 말로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천륜은 뜨거운 피를 타고 흘러내렸다. 출상 때 너무 많이 울었다. 태어나서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이 아닌가? 낳아준 어머니와의 이별이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울 수밖에 없었다. 친지들이 '지곡(止哭)'하고를 연발하였지만 울고 또 울었다. 말리던 사람들도 따라서 울었다. 울음보가 터졌는지 한없이 흐느끼며 울었다. 정신을 가까스로 차렸을 때 내 가슴에 기운 하나가 쑥 빠져나갔다. 천륜의 정일까? 큰 동아줄 같은 핏줄 하나가 끊어졌다. 눈빛으로 말하던 천륜이 끊어진 것이다. 아니면 두 엄마 사이에 경계심으로 받았던 카타르시스의 방출일까? 친지들은 '어머니의 영혼이 마음 편히 못 가신다.'고 지곡하라 달랬지만 뜨거운 피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를 제쳐두고 상여가 떠났다.



고생만 하시다 가신 어머니

어느 것 하나 자식위해 다 내놓으시고

황망히 떠나가신 어머니

그 어미 목 놓아 불러봅니다



올해도 담 뒤뜰 가는 길에 찔레꽃 피었습니다.

고개 들고 먼 산 바라봅니다.

누가 날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봅니다.

봄바람 뭉게구름 흘러가네요.



등목 물, 두레박 우물물 길러

이른 더위 쫓으시던 어머니 손길

우물가 한여름 지나갑니다.



희생이 밥인 양 배불리 먹으시고

어머니 오늘도 허리띠 졸라매신다.

자식 걱정 눈물짓든 어머니

인연 줄 꼭 잡고 놓지 마세요.



죽음을 객관화할 수 없을까. 누구에게나 한번 찾아오는 죽음 아닌가. 누가 봐도 보편타당한 죽음이 있지 않을까. 나는 몇 날을 두고 아파 누웠다. 탄생과 죽음, 이 둘은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 둘 사이에 있는 삶이란 각자 자기의 일생을 어떻게 준비하고 엮어 가느냐에 달려있다. 김남조 시인은 '삶과 죽음 안의 정진'에서 '죽음은 부동이다. 이와 맞설 '절대'를 삶 속에서 꼭하나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죽음과 동가(同價)인 진실은 삶이 아니고 삶의 정수인 사랑일 뿐이며 사랑과 죽음은 오직 둘만이 절대일 수가 있다.'라고 설파하셨다. 죽음을 뛰어 넘는 것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동가적 가치가 있는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사랑뿐이다. 탄생과 함께 생명의 화살은 쉼 없이 세월 따라 앞으로 진행하고 있다. 과연 주어진 그 삶 속에서 사랑을 듬뿍 주고받을 축제로 만들 수 있을까. 산다는 것 자체를 축제로 여기면, 우리의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삶 자체를 즐기면 모두가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내가, 가정이, 사회가 사랑으로 가득할 것이다. 선각자와 앞서간 선생님이 자비와 사랑을 벳푸고 실행할 것을 설파했다. 그러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자기가 결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끝없는 전진을 위해 나는 어떤 향상성을 가졌는가.

내가 어릴 때 힘없이 있으면 어머니는 가까이 오셨어 '아들, 여자 천명을 합쳐서 남자를 한 사람 만들었더니 딱 한 가지가 모자 난다 는데 무엇인지 알겠어.' 한다. 나는 어머니를 빤히 처다 보았다. 어머니 하시는 말 '갈비뼈 하나가 모자란다.'면서 힘없는 어린자식을 격려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지금껏 내가 당신의 자식이며, 한 번도 낳아준 피를 잊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드리지 못함이 한으로 남았다. 장례 후 삼오 날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속에 쑥 빠져나갔던 기운이 변화를 일으켰다. 소실댁 어머니가 미워지고 끝내는 무관심해졌다.

자주 만나는 후배가 병원에 입원했다. 감기 걸린 듯 온몸이 아프고 뻐근하여 약 한 첩을 먹고 나면 들 아프고 약 기운 떨어지면 또 아프다 했다. 입원 전날 등산 후에 열이 심하게 나고 아파서 병원에 들렀는데 골반 위 허리 쪽이 아프고 열이 나고 부었다. 검사 결과는 세균이 침입하여 막을 싸고 번창하여 약을 쓰면 조금 좋아지다가 또 아팠다. 입원 이틀째 열이 내리고 작은 염증 덩어리를 수술하여 처리했단다. 아픔은 사라지고 살만하다고 엄살을 부려 죄송하다나. 나는 '죽는 줄 알았다.'고 걱정 반 농담하며 위로했다. 어머니 생각에 또 울었다.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큰 병원인지 모른다. 힘든 삶을 살다가 아프면 병원에 들여 치료하며 쉼을 얻는다. 이는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정비소에 넣어 수리하고 다 고쳐지면 다시 운행함과 마찬가지. 어머니도 병원으로 가셔야 하는데 인생은 멈출 수 없는 나그넷길이다.

내가 어릴 때 '기른 정 낳은 정'이라는 멜로 영화가 있었다. 눈물의 영화였고 관객의 심금을 울린 영화였다. 줄거리를 보면 공장장의 강압에 못 이겨 몸을 허락한 그녀는 마침내 아이를 낳게 된다. 공장장은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자식을 거리에 버린다. 이것을 한 여인이 발견하고 아기를 키우다가 생활이 힘겨워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낸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생모와 양자를 보낸 여인이 동시에 나타나 부모임을 주장하며 돌려 달라 애원한다. 길러준 양모는 고민 끝에 아이의 의사에 따르기로 한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양모의 품에 안기고 두 여인은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내가 지금 기억하는 것은 끝없이 오열하는 장면들뿐이다.

어떻게 보면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우선 한다는 이야기인데 영화니깐 가능한 일이지 당해 본 당사자인 내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은 피를 못 속인다.'고 하지 않은가. 최근 어린 시절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젊은이로 성장하여, 말도 통하지 않는 모국을 찾아와 생모의 소식을 찾고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피를 정명하고 있다. 우리는 드라마 같은 일들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자주 접한다.

인간이라면 어찌 자신의 뿌리를 찾지 않겠는가? 또한 대리모가 자기가 낳은 자식의 양육권을 주장하며 법정에 선 적이 있다. 대리모란 아기를 낳아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10개월 동안 뱃속 아기와 소통하며 정이 들고 산고의 아픔을 겪으면서 모정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천륜이 몸속에 있다. 임신 10개월 동안 천륜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그 뒤로도 낳은 정 기른 정이 어느 것이 위일까? 술자리에서 안주가 되어 회자 되고 여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어떤 이는 천륜을 못 속인다 하고 낳아준 정을 두둔하고 어떤 이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함께 한 시간이 있어 기른 정이 더 크다고 했다. 사랑의 통로가 끊어진 소실댁 어머니와 나 사이는 소원해졌다. 결혼한 후이고 아내라는 여인이 있기 때문일까. 기른 정은 키워준 부모이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잘 모시고 효도해야 한다는 자식으로서 도리를 느끼게 했다.

소실댁 어머니는 현명하셨다. 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왼손의 움직임이 많이 불편했다. 두 다리는 멀쩡한데도 뛰어놀다 보면 잘 넘어졌다. 소실댁 어머니는 애처로워 '우리 아들 착하지.' 하며 달래신다. 아파서 울던 울음을 뚝 그치고, 사탕을 받아먹었다. 소실댁 어머니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린 나에게 칭찬은 용기와 미래의 희망을 품게 하는 명약이 이었다. 그러나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호하셨다. 한번은 소실댁 어머니가 주고 간 용돈 10환을 단골 점방에 가서 왕 눈깔사탕 하나를 사 먹었다. 왕 눈깔 하나면 한 시간 정도는 빨아 먹어야 했다. 단단하여 깨어지지도 않고 그 단맛의 유혹을 오래 가지기 위해 입에서 녹여서 천천히 먹었다. 외출한 소실댁 어머니가 오후가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 놀다 지쳐서 소실댁 어머니의 화장대에서 돈을 찾았다. 드디어 돈 지갑을 찾았고 그중 10환만 빼내어 단골 점방 아래에 있는 가게에 가서 왕 눈깔사탕을 사 먹었다. 오후 늦게 소실댁 어머니가 돌아왔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신 소실댁 어머니 나를 부르시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돈이 없어졌는데 아들이 가졌냐며 물어보셨다. 나는 깜짝 놀라 오리발을 내밀었다. 소실댁 어머니는 다 아시고 하신 말씀이었는데, 그때 바로 내가 10환을 훔쳤노라 이실직고했으면 용서가 되었을 것이다. 소실댁 어머니는 함께 점방에 가서 확인하자고 하시며 앞장서 가신다. 아래 점방에서 들통이 났다.

나는 그때의 화난 소실댁 어머니 얼굴을 기억한다. ~~순간, 잘못 했구나. 소실댁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오면서 거짓말을 용서할 수 없다. 거짓말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다며 타이르시듯 꾸중하셨다. 바른말 할 때까지 집 앞 기둥에 나를 밧줄로 매어 두었다. 나는 울었고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겠다며 용서를 빌고 어렵게 풀려날 수 있었다. 소실댁 어머니는 칭찬과 지혜로 나를 키워주신 현명한 여인이었다. 그 소실댁 어머니와 나는 생모가 돌아가시고 사이가 소원해졌다.

나는 주택가 가장자리 한편에 약국을 개업했다. 하루는 정말 길었다. 하루 15시간을 일했으니.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설과 팔월 보름에도 쉬지 않고 약국 문을 열었다. 집안의 목줄이 약국 하나에 달렸었다. 아버지는 청소하고 소실댁 어머니는 두벌 세끼 보시고 아내와 나는 열심히 일했다. 나는 약사로서 한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잘도 했다. 어린아이가 정기 하면 따주고 약을 주어 안심시켰다. 1차로 약국에 들러 상담하고 어느 병원 무슨 과에 가야 하는지 길잡이 역할도 했다.

우리 집은 어느 가정과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속은 달랐고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소실댁 어머니는 소원(疎遠)했는지 주머니 하나를 따로 차고 열심히 용돈을 모으신다. 무슨 이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내도 막내에게 시집와 시부모 모시며 사는데, 왜 불만이 없었을까? 그래도 잘했다. 한 번씩 하는 투정에서 나는 소실댁 어머니의 동정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한 번의 실수에 집안의 모든 계율은 무너진 것이다. 다정다감보다는 권위와 불호령으로 집안 분위기를 잡았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소실댁과 사시면서도 끝없이 방황하셨다. 아침 일찍 약국에 오셔서 문을 여시고 청소해주고 내가 약국에 출근하면 배낭 하나 메시고 마을 회관으로 가신다. 젊은 날의 유희를 못 잊으셨는지 언제나 남에게 친절하시고 돈 씀씀이가 헤퍼서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도 인기가 많으셨다. 그때까지도 우시장에서 소 1~2마리 사고팔고 했으니 어느 정도 경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인기가 소실댁어머니가 보시기에는 못마땅하셨다. 두 분의 갈등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생에 황금기는 5.16 직후 민선 면장 하실 때였다. 경제력과 고향에서 인간관계를 성공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미투 운동의 원조이시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국내에서도 1년 후 여성검사에 의해 검찰 내의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을 촉발했다. 연극, 문학, 정치계까지 광범위하게 퍼졌다. 사회가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을 지지했다. 양심에 못 이겨 자살하고, 의원직사퇴, 미성년자 성폭력으로 구속되었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사회, 모계사회로 회귀하고 있는데 아직도 남성 권위주의가 극성이라니 하느님을 두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이란 미명 아래 원초적 본능을 미화시켰다. 아버지 시대에도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선거 직 공무원이라도 소실댁이 있으면 파면을 면치 못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아버지가 면장이고 소실댁 때문이었다. 미투 운동이 아니었으면 고향 친구 모두를 잃을 뻔했다. 피를 나누면 형제이고 살을 나누어도 형제이다. 초등학교 동기생은 살을 나눈 형제가 아닌가. 아버지에게는 미투 운동이 최악이었지만 아들인 나에겐 호재였다. 초등학교는 4Km를 걸어가야 했다. 겨울이면 추워서 선배들 뒤따라 졸졸 걸었다. 홍골 모퉁이 돌아갈 때는 겨울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눈물이 핑 돌아 폭 쏟아진다. 그때는 먹을 것도 없었지만 입을 옷도 허술하여 추위를 온몸으로 받았다. 여름이면 장대비가 쏟아진다. 냇가에 빗물이 넘쳐 학교에 갈 길목을 막는다. 학교는 휴학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인데 수업이 없으면 왜 그래 좋아했을까. 새로운 영역을 배운다는 부담감과 두려움이었든 것 같다. 모순기가 끝나면 방과 후 소를 찾아 산으로 오른다. 낮이 긴 시간이면 넓은 곳에서 감자산곶을 한다. 불을 충분히 피워 잔돌을 불 속에 넣어 달구고 거기에 감자를 넣고 흙으로 덮는다. 한참 기다렸다가 떡갈나무 잎을 말아서 꽂고 물을 부어본다. 감자가 익어 흰 김이 솟아난다. 함께한 친구와 나누어 먹는다. 그 맛이 좋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다. 소 풀을 뜯고 나무하며 자연의 품에 안겨 잊히지 않는 추억들을 많이도 만들었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먹어야 살고 종족 본능이 있어 후세를 남기려 한다. 단맛의 본능은 어떤 맛보다 강하다. 매운맛, 쓴맛, 신맛, 짠맛 등은 혀에 쾌감을 주지만 맛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단맛은 농도에 따라 관계없이 쾌감을 준다. 인간뿐 아니라 포유류 동물들은 단맛을 좋아한다. 먼저 생존의 문제인데 쓴맛이 독을 품을 가능성이 있다면 단맛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신호이다. 포유류의 새끼들은 젖을 먹는데 젖 맛이 달다는 것이다. 단맛에 대한 호감은 인간에게 본능적이다. 영화 '원초적 본능'을 본 사람은 그 예술성보다 인간의 적나라한 성적 쾌감을 선보인 압도적 연기에 세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방 범죄가 일어났겠다. 열린사회가 되고 놀이 문화가 많아지면서 본능이 감추어졌지만 옛날, 못 먹고 못 살 때는 집집이 형제들이 다섯은 넘어서니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이 필요한 것인지 자손을 두고자 하는 본능인지 모를 일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교 사회는 사서삼경과 충효 사상을 앞세워 근대에 와서까지 사회를 지배했다. 서구의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선비의 정체성과 특권의 원천이었던 유교의 위상이 떨어졌다. 서당공부를 하신 아버지는 유교를 크게 신봉하신 것 같다. 집에서는 아버지는 왕이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왕이 아니라 폭군에 가까웠다. 시대적 아픔이었다. 해방 후 사회가 혼란스럽고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만, 충효 정신은 우리 사회의 근간으로 남아있었다. 나 하나 만의 충성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희생을 감수했다. 또 나 하나 만의 희생으로 모두가 잘살 수 있다면 기꺼이 내놓았다. 그런데 지금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나라와 집단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나. 우리 보다는 내가, 내 가정이 우선하는 자기중심적 사회가 되지 않았는가.

아버지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라 했는데 집안 살림은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뜻대로 모두가 움직여야 하고 가족은 안중에 없었다. 가족의 의견이나 인격은 무시되었고 소통은 일방통행이었다. 아마도 그 시대 아버지들의 전형이셨다. 먹고 살기가 힘들었고 개인의 인격과 자유는 무시되는 가부장적인 병폐를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회적 지도층에 속했다. 동네 사람들이 사소한 민원을 부탁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셨고 중재자 역할을 곧잘 하셨다. 그러나 흐트러진 가정을 추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능력이 권위가 되어 집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듯 불호령이고 소통 부재였다. 대화는 단절되고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는 울타리 같은 사람이었다. 자식과 살갑게 정감을 나눈 이야기는 없었다. 아버지는 자식들 모두가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지켜보는 '주시자'로서 존재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어릴 적 뒷집 친구와 장래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후에 술자리에서 우연히 친구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나 같이 아픈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겠다.'고 했다. 어릴 때 마음에 있던 말을 담아두지 못하고 친구에게 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약사가 되었다. 약사도 1등 약사, 2~3등 약사가 있다. 중국의 명의 화타같이 환자의 마음을 다스려 병을 치료해주면 1등 약사이다. 2등 약사는 처방대로만 약을 조재하여 정성껏 약을 설명하고 환자의 마음마저 보살펴 드리는 약사이다. 3등 약사는 환자의 아픔보다 환자의 호주머니가 보이며 물질에 마음이 가는 약사이다.

40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나는 어떤 약사였을까? 자평해 보건대 좋은 약사는 못 되었던 것 같다. 첫째는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지 못하였다.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한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로서 힘들고 아파하실 때 어머니의 아픔을 예감하고 어떤 약을 드렸는가? 병이 나서 고치기보다 예방의학이 중요하다고 배우지 않았는가? 어머니가 가정문제로 한 여자로서 아버지 때문에 가슴앓이 할 때 자식으로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하고 엄마 편이 되어 주었던가? 두 어머니 사이에서 나 살고 보자고 도망 다니며 어머니 마음에 상처를 드리지 않았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얼마나 소원했을까?

어머니 돌아가시고 소실댁 어머니에게 무관심했으니 기른 정을 다 잊고 아내 품에 안겨 산다고 몹시도 섭섭했겠지. 한 번쯤 털어놓고 피의 동아줄을 이야기하며 기른 정에 감사해야 했다. 내가 어찌 어머니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혹여 마음속에 미운 마음을 품지 않았는지 생각하면 못난 자식이었다.

감당 못 할 일을 저지르시고 한없이 방황하는 아버지에게 남자대 남자로서 어떤 위로를 한번쯤 드려야 했지 않는가? 나는 부모에게 효도를 몰라 섰고 그저 내가 열심히 살고 부모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 된다고 자만했는지 모른다. 약사로서 제일 잘 아는 부모님의 마음 병 하나도 풀어드리지 못하고 그 분들이 다 돌아가셨으니 불효자식이 분명한 것 같다. , 살아계실 때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면 치료되는 일인 것을 약사인 내가 왜 몰랐을까? 때 늦은 깨달음에 마음이 아프다.

들녘의 황금물결로 물들면 어머니 가신 날이 닦아온다. 어머니, 누님들 다 출가하고 큰 형님 어머니 곁에 누웠습니다. 막내인 나도 이순을 넘어 칠순을 바라봅니다. 어머니 사신 날보다 아들이 조금 더 살았습니다. 어머니 세상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얀 흙먼지 나던 그 길은 포장이 되어 자가용이 줄지어 다닙니다. 이 산골짜기에 온천이 생겨서요. 어머니 지잔 물탕 생각나시죠. 여름 뙤약볕에 논매고 밤늦게 길쌈하실 때 땀띠로 고생하셨고, 그때 원근 각지에서 지잔 물탕을 찾았습니다. 한두 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찬물을 맞으면 소름 기치는 냉기에 땀띠가 나았습니다. 농촌에 인구가 많이 줄었습니다. 이제는 길쌈 매는 사람도 논매는 사람도 없습니다. 논을 기계로 갈고 양수기로 물 담고 이양기로 모내기합니다.

어머니 우리 집 옆집이 교회잖아요. 그 교회가 우리 집을 사서 마당 한복판에 교회를 크게 지웠습니다. 담 뒤 뜰 가는 길도 포장되었습니다. 어머니 큰집 조카가 부동산업을 합니다. 잘못하다간 고향 땅 다 팔아 치울 것 같이 열심히 합니다. 보기가 좋아요. 고향 사람 많이들 자식 따라 떠나갔습니다. 정년퇴직한 부부들이 산 좋고 물 좋은 곳,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아 농장 만들고 전원주택 선호합니다. 가진 자들이 많은 세상이라 고향 어른들 마을회관에 모여 이장과 함께 마을 지킴이로 힘쓰고 있습니다.

어머니 외갓집 진문이형, 정말 농사 잘 짓고 할머니, 할아버지 살던 집 그대로 잘 가꾸고 삽니다. 나보다 배로 농사를 많이 지어 이웃과 나누어 먹어요. 작년에는 고구마 얻어먹고 마늘은 사서요. 건강을 위해 한 끼에 꼭 마늘 한 톨씩 먹습니다. 일본의 고미나도씨가 인삼보다 좋다고 선전하고 60년 동안 연구했답니다. 필수아미노산이 많아 피로도 덜하고 면역기능이 좋아졌어요. 어머니 친정집이 아닌가요. 죽담 위 마루에 높이 앉으신 할아버지 생각납니다. 나도 외탁하여 반대머리가 되었습니다. 젊은 날엔 어머니 머리를 닮아 참 머리칼이었는데 나이 들면서 자꾸만 가늘어졌어요. 진문이 형은 칡을 캐어 운지버섯과 함께 약국에 가져옵니다. 나는 거기에 함박꽃 뿌리인 작약과 감초를 넣어 끓여 나누어 먹으며 농사에 대해 많이도 가르쳐 줍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일손 거들며 배워 놓아야 했는데 후회가 막 급합니다.

가족 산소에는 식구가 늘어서요. 그런데 말이죠. 어머니 무덤 분봉이 아버지 무덤보다 크고 아름답게 꾸며졌어요. 아시죠. 막내 고향 지키려고, 어머니와 함께하려고 뿌리 찾아 이층집 짖었습니다. 올해는 고추 100포기, 방울토마토 10포기, 가지 8포기, 호박 6포기, 오이 10포기 심었는데 오이 10포기는 진딧물 때문에 오이 먹기가 힘들 것 같아요. 집 뒤 밭에 양파 수확해야 하고 고구마 심었더니 전날 비가 와서 잘 자라고 있어요. 어머니 앞마당으로 내려와 봐요.

집 앞 꽃밭에 빨간 장미꽃이 흐트러지게 많이도 피어있어요. 뿌리를 깊게 내리고 튼실한 뿌리로 마음껏, 대지의 어머니 젖을 먹었나 봐요. 대목이 튼튼하니 접목된 눈이 붙은 줄기 장미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발했어요. 한동안 꽃을 보고 있어도 꽃술에 벌이 날아들지 않네요. 어머니와 소실댁 어머니가 약속한 일일까요? 벌들을 용서하지 말자고, 50대에는 로즈향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어머니 함께 지켜봐 주세요. 나는 한 가정을 잘 지키는 지아비가 될 것이며 자식을 잘 키워 아내와 마음 맞추어 출가시키고 사랑의 훈장을 달고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당선소감>

유태일 씨


일천한 글에 낙점을 찍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이 절로 나네요.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다. 살아온 삶을 반추하며 얽혀든 과거, 엉킨 실타래를 풀고 싶었다, 실력이 미천하고 글재주가 짧아 마음이 저렸는데 서술형의 진부함은 없었는지, 걱정입니다. 앞으로 사유가 더욱 깊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필을 통해 내 삶은 풍요로워졌고 글을 씀에 부담을 들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기회를 주신 대구 매일에 감사드립니다. 과거의 아픈 삶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며 어머니도 되고, 소실댁 어머니도 되고, 아버지도 되었다. 체화는 내 마음에 어머니가 들어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가만히 어머니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어머니 마음을 대필했다. 탁란 조 뻐꾸기 이야기, 장미꽃 화려함 뒤에 숨겨진 아픔, 찔레꽃 순정이 글이 되어 나왔다.

당선에 힘입어 약사로서 우리 삶 속에 유익한 건강 상식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이 있기까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용기를 준 문우님께 감사드립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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