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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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교수는…원광대 불교학 박사,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14년째 연재,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찰기행>, <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등 저서 다수 사진=이무성 객원기자


[신지호 제18대 국회의원·연세대 객원교수] "박 前 대통령에 간어한 사람 없어, 영남 선비정신 어디로…"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대구경북의 당혹감과 상실감이 무척 크다. 어쩌다 이렇게 참담한 결과가 나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다. 이럴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 대구경북의 정신적 원류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건국대 석좌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통령 탄핵 결정으로 현재 대구경북은 멘붕(멘탈 붕괴) 상태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 살다 보면 진눈깨비 내리는 날, 우박이 떨어지는 날도 있다. 어떻게 매일 화창할 수 있겠나. 모든 것에 흥망성쇠가 있다. 긴 호흡으로 보면 현 상황도 교훈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층 성숙하기 위한 성장통이 될 수 있다.

-대구는 대통령을 많이 배출해 대통령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대구경북이 원래 권력 지향적 지역이었나.
▶아니다. 야당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핍박과 소외를 많이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경상도 남인은 벼슬이나 권력으로부터 300년 이상 소외됐다. 회복한 계기는 1961년 5`16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권력정치의 두 변곡점을 1623년 인조반정과 1961년 5`16으로 본다.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이면 정3품 이상이었는데 당시 당상관은 문경새재를 넘기 힘들다는 얘기가 있었다. 영남 남인은 벼슬을 하더라도 중급 간부 이하 미관말직을 주로 했다는 의미다. 영남이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한 것은 1961년 박정희 등장 이후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조선왕조 후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떠올리며 그 당시부터 대구경북이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호적과 족보에는 그들의 본관을 안동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미 1500년대 초반 서울로 이사를 가 서울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안동 김씨는 당색도 경상도 남인당이 아니라 당시 주류이자 집권 여당이었던 기호 노론당이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가운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이 있었는데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송강 정철을 흠모했다. 당시 안동 김씨들은 경복궁의 서북쪽인 지금의 옥인동과 청운동인 장동에 살았다. 그래서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얼마 전 경상도 남인의 족보를 일컫는 ‘남보’(南譜)를 제목으로 칼럼을 썼던데….
▶조선시대 남인은 노론으로부터 많이 시달렸다. 노론 소속 시장이나 도지사가 경상도에 부임하면 영남의 유력 집안을 상대로 남인에서 탈퇴해 노론으로 전향할 것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 검찰 등을 비롯한 권력기관을 동원해 압박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탈당을 하면 배신이었다. 그럼에도 노론의 압박이 심해지다 보니 노론의 압박에 견디고 내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연판장 형태의 문서를 작성했던 것이 남인들만의 족보인 남보다. 남보에 기재된 사람들은 영남의 유력 집안 중에서도 A+급으로 평가받는다. 서인 노론의 압박에 절대 굴하지 않았던 집안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남보를 보유한 집안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지금도 영남에서는 탈당을 하기가 쉽지 않다. 탈당을 하면 비난을 받게 되는데 여타 지역과 달리 영남에서는 ‘탈당=배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노론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남인의 축적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교는 조선시대의 국가 이념이었다. 그런데 유독 경상도에 유교정신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인 노론의 경우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받아 지역에 발령을 받으면 부임지에서 현지처도 구하고 아이도 낳았다. 일부다처제다 보니 그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집안이 분산된다. 반면 영남 남인들은 과거에 급제해도 발령이 잘 안 나고 설령 발령이 나더라도 시시한 자리로만 배치되니 남인들은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서 글을 읽었다. 가장이 집에서 가정교육에 집중하였다. 벼슬이 변변치 않다 보니 글이라도 제대로 써서 양반으로서 인정을 받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매일 책을 보는 집안이 남인 집안의 풍경이다. 반대로 서인 노론 집안은 아버지가 임지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집안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남인은 가정교육과 가풍 유지에 힘썼다. 이런 경향이 ‘집안’과 ‘문중’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동학운동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의 양반 계층이 괴멸된 반면, 경상도는 상대적으로 사회 고위층이 많이 죽지 않았다. 6`25전쟁 당시에도 낙동강 이남은 보존이 돼 양반 집안, 책, 가풍, 전통 등이 살아남았다.

-영남 남인의 절개는 의성 김씨 중시조인 청계 김진의 영수옥쇄 불의와전(寧須玉碎 不宜瓦全`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이라는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는데….
▶선비는 죽더라도 옳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집안이 요즘으로 말하면 언론인의 좌우명 같은 가훈을 보유하고 있다. 의성 김씨 집안은 안동 내앞(川前)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내앞 김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집안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말, 돌직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남에 이런 가문이 몇 더 있다. 이문열 작가, 이재오 전 특임장관,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 등을 배출한 재령 이씨 집안이 그러하다. 재령 이씨들은 조선시대에 돌직구와 강속구를 던지다가 노론으로부터 엄청 두드려 맞았다. 또 한 집안이 영양의 주실 조씨다. 지조론을 쓴 청록파 조지훈 시인이 바로 주실 조씨다. 지조론은 집안에 내려오던 가훈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집안 가훈이 삼불차(三不借)인데 첫째가 돈을 빌리지 않는다는 재불차(財不借)다. 보증을 서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은 양반 품격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둘째는 인불차(人不借)로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는 문불차(文不借)로 글을 몰라서 누구에게 물어보는 창피를 당하지 말라는 당부다.

-영남 남인의 지조와 관련해 학봉 김성일은 1573년 선조와의 경연장에서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걸주<桀紂`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가리키는 말로 포악무도(暴惡無道)의 대명사로 쓰임>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절대군주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목숨을 내놓고 한 말이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나오기 힘든 이야기다. 진정한 조선의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실패하는 과정을 보면 간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남 남인의 절개를 찾을 수 없다.
▶5`16 이후 산업화 50년을 영남 남인의 후예들이 끌고 왔다. 그런데 산업화는 물질화를 동반한다. 돈도 벌고 소득도 올라가다 보니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갈고닦은 선비의 지조와 절개가 퇴화한 것으로 본다. 최근 박 전 대통령의 몰락을 보면서 영남의 양반들이 반성을 좀 했으면 한다. 영남의 기개 높은 선비정신은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다.

-영남 남인의 선비정신에는 절개와 지조뿐만 아니라 절제와 나눔의 미덕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경주 최 부잣집의 육훈(六訓)이 자주 언급되는데.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다.

-조선시대에는 부자들이 어떻게 재물을 사회에 환원했나.
▶소작료를 낮추거나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에 구휼미를 많이 베풀었다. 흉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경주 최 부잣집으로 몰려들어 마루가 무너질 정도였다고 한다. 아울러 과객 대접을 잘 했다. 집에 오는 손님을 한 달 이상 무료로 머물게 했다. 식사 대접은 기본이었고 집을 떠날 때 옷까지 해주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재산을 사회와 나눴다.

-1993년 대구 꽃가게의 꽃이 동나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의성 김씨 학봉 집안 14대 종부 조필남 할머니가 작고했을 때의 일이다. 조문객들이 꽃을 샀는데 안동 꽃가게의 꽃이 동이 나고 이어 대구의 모든 꽃가게의 꽃도 동이 났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갔다는 이야기인데 조 할머니는 문중 사람들 누구에게나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해 많은 사람들이 그 훈훈한 인간미에 감화되었다고 한다.

-영남 남인의 선비정신이 총체적으로 퇴화돼 나타난 불행이 탄핵 사태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영남의 선비정신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영남 남인은 오랜 세월 핍박받다가 5`16 이후 정권을 잡았다. 유교의 문제점은 ‘문중’과 ‘우리가 남이가’를 너무 강조하는 경향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른 집단을 배척하거나 배제하는 논리로 유교 윤리가 작동할 수 있다. 영남이 50년 동안 권력을 잡으니 노론화`기득권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300년 절치부심했던 시절을 잊고 노론 행세를 했다.

-6`25전쟁 중 지주들을 단죄하는 인민재판이 많았는데 영남에선 소작인들이 지주를 옹호하는 모습도 연출했다고 하는데.
▶대구의 옻골 최씨 집안은 광복되기 전에 동네 사람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줬다. 어른 집안이니까 못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주변 사람들이 굶어 죽는데 가만히 있으면 어른이 아닌 것이다. 그 후 전쟁이 났다. 동네 어른인 양반 집안에서 대출까지 받아서 빚을 갚아줬는데 죽창으로 찌를 수 있겠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제국 천년의 비결은 지도층의 솔선수범이었다. 전쟁이 나면 상류층이 제일 먼저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대구경북은 대한민국 보수의 심장이다. 그런데 대통령 파면으로 보수의 엄동설한이 시작되었다. 보수가 거듭나기 위해 대구경북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조선 유학이 가진 긍정적인 유산이 있다. 선비정신을 공부해야 한다. 양반을 착취하는 계급으로만 배웠는데 그렇지 않다. 직언하고, 남을 배려하고, 책 읽기를 즐기고, 물욕을 자제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양반의 기질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 권력과 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만 양반의 단점인 ‘문중’ ‘집안’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배타적인 태도는 극복해야 한다. 개방과 포용으로 나가야 한다.

※매일신문 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은 18일 오전 9시 30분 TBC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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