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 11. 셰익스피어 '리어왕'

입력
수정2016.03.01. 오후 3:17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말로는 처참하다는 것을 아프게 보여준다. 사진은 연극 '리어왕'의 한 장면. 부산일보DB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처참한 말로

팔순이 넘은 리어왕은 노후의 평안을 위해 권력을 물려주려고 한다. 세 딸을 모아 놓고 왕국을 나누어줄 테니 자신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첫째와 둘째, 고너릴과 리간은 전하의 사랑 속에서만 자신들이 행복하다며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공자가 말하듯 교묘한 말과 꾸미는 낯빛, 즉 교언영색(巧言令色)에는 인(仁)이 드물다.

그러나 막내딸 코델리아는 리어왕의 물음에 '할 말 없습니다'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권력과 재산의 분배를 목전에 두고 사랑을 실토하라니, 순결한 마음의 코델리아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교언영색에 눈이 멀어
두 딸에게만 권력 나눠주고
바른말 하는 막내딸 추방

왕위 이양하자 황야 내쫓겨
진실 못 본 혹독한 대가
늦은 깨달음 뒤 '타자 발견'


덧붙여 언니들처럼 아버님만 사랑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나중에 남편을 얻게 되면 아버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분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가부장 권력과 왕권으로부터의 당당한 해방 선언이다. 사랑은 비어 있음이고, 주어도 받아도 흔적 없음일진대 아버지는 딸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분노한 리어왕은 언니들에게만 권력과 영토를 나누어주고, 코델리아는 추방한다. 평생을 예스맨에 둘러싸여 권력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았던 리어왕으로서는 일관된 태도다. 충직한 신하인 켄트의 목숨을 건 충언도 박차버린다. 코델리아는 꾸며대는 혀가 없어서 사랑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 혀가 없어서 기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아니나 다를까 권력을 물려준 리어왕은 두 딸로부터 무참한 대접을 받는다. 교언영색의 정체는 알고 보니 냉혹함이었다. 황야로 쫓겨나 폭풍우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 리어왕은 그때야 잘못을 깨닫고 울부짖는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미쳐버린 상태에서야 진실을 제대로 본다. 아집과 독선의 틀을 깨기는 그만큼 어렵다. 리어왕의 비극과 뒤늦은 깨달음은 권력에서 인간으로, 타자 망각에서 타자 발견으로 이르는 고통의 길이었다.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드디어 보인다.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면 그 뚫어진 구멍으로 티끌만 한 죄가 다 들여다보이지만, 예복이나 모피 외투를 걸치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감춰지는 아비규환, 전도된 세상의 참모습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절대 권력 리어왕의 오판, 그 파장은 비극적이다. 충직한 신하 켄트도, 지혜로운 친구 바보 광대도 역경에 처한다. 아버지를 구하러 온 코델리아도 잃고, 리어왕 자신도 죽는다. 탐욕스러운 두 딸도, 권력을 위해 아버지와 형을 배신한 에드먼드도 죽는다. 리어왕의 왕정은 이로써 몰락한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말로는 처참하다.

셰익스피어 사후 왕당파와 의회파, 왕정과 공화정 사이의 엎치락뒤치락 권력 교체 과정이 보여주듯이 권력 배분과 재배치 문제는 당대의 예민한 문제였다. 단순히 리어왕의 성격에서 비롯된 비극이 아니라 권력체제의 향방이라는 거대한 문제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정복고기에 '리어왕'은 리어왕도 코델리아도 살아남도록 개작하여 공연토록 강요받기도 했다.

이 시대의 권력은 리어왕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인가. 고너릴과 리간을 닮은 교언영색의 방송들은 왜곡을 일삼고, 코델리아처럼 진실을 말하는 참 언론은 드물다. 언로가 막힌 권력은 폭주하기 마련이다. 폭주의 현실은 타자 망각의 적나라한 현장이다. 생명의 젖줄 4대강은 틀어 막혀 신음하고, 세월호 유가족은 피울음을 울며, 남북평화의 숨통인 개성공단은 일거에 폐쇄되었다.

'리어왕'의 세계는 폭풍우와 고통의 신음이 뒤섞여 울리는 비극의 밤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밤하늘엔 찬란한 별들이 빛난다. 코델리아, 켄트, 에드거, 바보 광대가 그들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코델리아들은 눈 먼 권력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다. 고군분투하는 그들이 있어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괴테는 '서동시집'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책 중에서 가장 이상한 책은/ 사랑의 책이라./ 내 그 책 꼼꼼히 읽어보니,/ 기쁨일랑 몇 쪽 안 되고,/ 책 전체가 고통이로다." 괴테는 다시 선언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jhc55@deu.ac.kr

장희창

동의대 교수(독문학)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