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주제분류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이다지 144건

제공처 정보

이다지

이다지는 MBC [마이리틀텔레비전], KBS [역사저널 그날] 등에 출연하며 특유의 입담과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다. 공부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2014~2015년 EBS 누적 수강생 64만 명의 인기 강사다. 2014년에는 수능 비인기 과목인 세계사로 EBS 사회탐구 영역 대상을 수상했다. 세계사와 한국사 강의를 전담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교과서까지 집필한 역사 전문가. 키워드와 흐름, 스토리로 일구어내는 수업은 역사를 싫어했던 학생들도 ‘역덕(역사 덕후)’으로 입문하게 만든다. 행정안전부에서 주관하는 공직박람회에서 한국사 특강을 2년 연속 전담했고,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특강 및 연합인포맥스의 [경제콘서트 WHY]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조금 늦은 6세기에 나라가 발전한다.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토대로 영토를 확장해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까지 정복한다.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고대국가의 발돋움을 하고 진흥왕 때 세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 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다. [고대국가로 가는 길, 왕이 귀족들에게 휘둘리다] 마지막으로 뒷심이 강한 나라 신라를 살펴봅시다. 신라는 태백산맥에 가로막혀 있어서 중국과 교류를 할 수 없었어요.그러니까 백제나 고구려와 교류하지 않으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고대국가로 가는 길도 굉장히 멀었습니다.귀족들의 힘에 왕이 이리저리 휘둘려서 왕권이 약했어요. 심지어 최고 지배자에 대한 호칭도 초기엔 왕이 아니라 ‘이사금’이었습니다.이사금은 이빨이 많은 사람, 즉 연장자를 뜻해요. 이때는 박 씨, 석 씨, 김 씨가 교대로 이사금을 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왕권이 강해지면서...

  • 신석기 시대에는 인류 최초의 혁명인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다. 밭농사를 지으니까 이동하지 않았고 물을 끌어다 쓰기 쉬운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 정착해 살았다. 여전히 평등 사회였으나 씨족 사회가 형성되었고 원시적인 형태의 신앙이 탄생한다. [인류, 사냥과 채집을 그만두다] 신석기에는 인류 최초의 혁명이 발생합니다. 혁명이란 단어를 들으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세계사를 좀 공부한 분들은 프랑스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이 떠오르실 거고, 한국사 좋아하는 친구들은 4 · 19혁명 같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생각날 거 같아요.그런데 인류 최초의 혁명은 바로 신석기 시대에 발생했습니다. 구석기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식물이나 동물을 채집, 사냥해서 먹을 것을 얻었어요.하지만 신석기 시대부터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식물, 동물을 생산해서 식량을 얻는 혁명적인 변화를 이룹니다. 쉽게 말해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겁니다. 더 이상 굶어죽을 일은 없게...

  • 동인 출신이었던 정여립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사교 모임인 대동계를 조직했다. 그러나 대동계는 역모의 오해를 뒤집어쓰고, 이를 기회로 많은 동인들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로도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는 등, 조정 내부의 붕당은 점점 심화되었다. [동인 출신 정여립, 사교 모임인 대동계를 만들다] 정여립은 특이한 사람입니다. 어디 있어도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죠. 원래 동인에서 활동했던 사람인데 관리생활이 자신과 맞지 않았대요. 그래서 때려치운 뒤 자신의 고향 전라도로 내려가요. 그런 그가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꾀한다는 첩보가 조정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막이 오릅니다. 실제로 정여립은 고향에 돌아가서 사교 클럽을 만들었어요. 대동계라는 클럽인데 인근의 무사나 힘이 센 노비들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 활쏘기 같은 걸 연습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의 군사력이 어마어마했습니다. 한 예로 선조 때 쳐들어온 왜구를 이들이 중심이 되어...

  • 태조는 국호를 조선으로 짓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정도전의 도움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과거제를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자 책봉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이방원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조 이성계, 조선만의 브랜드를 만들다] 조선의 초대 왕이 된 이성계의 첫 번째 미션은 고려와는 다른 브랜드의 국가를 만드는 거였습니다. 이름부터 바꿔야죠. 고려가 아니라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란 의미에서 조선이라고 국호를 짓습니다. 또 자신이 멸망시킨 국가의 수도에 계속 있을 수 없겠죠?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조선시대의 한양 모습을 그린 지도를 본으로 하여 재구성한 경조오부도 [정도전,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다] 하지만 태조의 뒤에서 실질적으로 조선이란 작품을 조각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왕족도 아니고 무인이었던 태조가 혼자서 나라를 이끌어나가기는 역부족이었거든요. 실질적인 조선 메이커! 바로 정도전입니다....

  • 고구려는 태조왕 때 왕위 세습이 가능해지고 소수림왕 때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며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4세기 말 광개토 대왕은 우리나라 북쪽으로 영토를 개척했고 이후 장수왕은 남쪽으로 영토를 차지한다. [태조왕,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다] 고구려에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왕이 바로 태조왕입니다. 원래 태조라는 이름은 나라를 처음 세운 사람한테 붙여주는 칭호예요.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주몽입니다. 그런데도 태조라는 호칭이 주어진 건 고구려를 다시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업적이 많은 왕이기 때문인 거죠.일단 태조왕대는 아래 옥저를 정복했습니다(불쌍한 옥저ㅠㅠ).크건, 작건 전쟁은 내부적으론 결속을 가져오고, 드디어 태조왕 때 왕위 세습이 가능해집니다. 고대국가로 스타트한 거죠! 여기서 질문 하나 할게요.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누굴까요? 이거 장수왕이라고 생각하기 쉽죠.장수왕이 97세까지 살았는데, 이런...

  • 태조는 고려를 세우고 결혼정책을 통해 호족을 통합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열어 민심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려고 했다. 또한 통일신라와 차별되는 고려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북진정책을 펼쳐 실제로 영토를 확장했다. [태조, 고려를 세우고 자신만의 정책을 펼치다] 태조가 고려를 세우고 해야만 했던 일이 뭐였을까요? 역사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그렇죠. 그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감정이입을 해야 합니다. 태조의 정책은 크게 3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단 고려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호족들을 잘 통합해야 하고요(호족 통합), 오랜 전쟁에 지친 민심을 달래야 합니다(민심 안정). 민심을 얻지 못하는 국가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의 진리예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으니 고려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고려만의 색을 만들어나갑니다(new brand). [호족들의 딸과 결혼을...

  • 영조는 42살에야 겨우 아들을 얻었고 영조는 너무나도 귀한 늦둥이 아들, 사도세자를 곧바로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과도한 스트레스와 애정결핍에 시달린 세자는 온갖 기행을 저질렀다. 끝내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만다. [영조, 귀한 아들 사도세자 뒤주에 가둬 죽게하다] 영조에게는 모두 6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복이 없어서 영조의 나이 42살에야 아들을 얻어요(첫째 아들인 효장세자는 병으로 일찍 죽었습니다). 늘그막에 얻은 너무나도 귀한 아들이라 영조는 이듬해 그 아이를 왕세자로 책봉합니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죠. 하지만 그는 왕이 되지 못하고 죽습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아버지인 왕 영조의 명령에 의해서 굶어죽게 돼요. 심지어 쌀 항아리인 뒤주에 갇혀 죽게 되죠. 뒤주는 사진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작아보이죠? 겨우 성인 남성 한 명이 무릎을 구부리고 있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입니다. 사도세자는 이 뒤주에...

  • 부여는 왕권이 약하고 부족장의 권한이 강한 상태로,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연맹왕국’이다. 토테미즘에 근거해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4부족이 있었고, 날씨가 추워 반은 농사짓고 반은 가축을 기른 ‘반농반목’의 형태로 경제를 꾸렸다. [주몽, 부여의 모습을 고구려에 옮기다] 부여는 굉장히 중요한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여에서 주몽이 내려가서 세운 나라가 고구려거든요.<주몽>이란 드라마 기억나세요? 그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그러니까 부여와 고구려는 정치나 사회 모습이 굉장히 비슷합니다. 심지어 똑같은 것도 많아요. 그럼 부여의 기록을 통해 부여의 역사를 살펴볼게요. [부족장들이 힘을 합쳐 부여를 세우다] 나라에는 왕이 있으며 벼슬은 가축의 이름을 따라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라 칭했다. 일단 위에서 계속 등장하는 글자가 있죠? ‘가(加)’라는 한자입니다. 부족장을 뜻해요.이를 통해 부여는 왕과 마가, 우가...

  • 정조는 술과 담배를 즐기고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인간적인 왕이었다. 그는 영조에 이어 탕평정치를 펼쳤으며 규장각과 장용영 등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갖추고 수원에 화성을 건축해 비밀리에 천도를 계획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개혁은 미완으로 남았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다] 그렇게 정조는 14년이라는 긴 세손생활을 견뎌냅니다. 영조가 죽은 후 엿새 후에 정조는 경희궁에서 즉위하면서 이렇게 말해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정면 승부를 한 거죠! 이한 마디에 분위기가 싸해집니다. 특히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죠. 보통 이렇게 자라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겪은 왕세자는 연산군처럼 폭군이 되기 쉬워요. 그리고 여자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죠. 사람이 살면서 ‘남 탓’만큼 하기 쉬운 게 없잖아요. 그런데 정조는 좀 달랐습니다. [인간 정조 - 여자를 멀리하고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다] [정조, 여자에 관심을 두지 않다]...

  • 광개토대왕은 4세기 말에 등장하는데,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고 만주 지방에도 진출했으며,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고,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연호를 사용하다] 광개토대왕은 4세기 말에 등장합니다. 이름 그대로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한 왕이에요.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개척했기 때문에 대왕 혹은, 태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태왕사신기> 드라마에서 태왕이 광개토대왕이죠).광개토대왕은 우리나라 최초로 연호를 썼어요. 연호는 해(年)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돼요.우리는 지금 서기(기원 후) 2015년에 살고 있죠. 예수 탄생 이후를 서기라고 하는데 서양식 구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해를 구분할 때 연호를 썼어요. 연호는 왕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선생님이 만약에 2015년에 왕이 되면 제 이름을 따서 올해부터 ‘다지 1년’이 되는 거예요.그러다 왕이 바뀌면 다시 그 왕의 이름을...

  • 8조법은 고조선 사회가 살인에 관한 처벌을 살인으로 하며, 인간 생명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노동력과 사유재산을 중시했다. 노비의 존재를 통해 계급사회임을 보여주고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가부장적인 사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 남아 있는 고조선의 8조법을 통해 당시 사회 모습을 역사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인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거죠. 실은 우리나라도 1997년까지는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에게 사형을 실시했습니다.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죠.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한다] 요즘으로 치면 폭행죄에 대한 처벌 규정입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 사람은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죠. 그러니 그 노동력에 해당하는 곡식을 합의금으로 줘야 하는 거예요.노동력을 중시했던 사회입니다. 고대 사회일수록 인간의 노동력이 중요해요. 아직 비료 주는 방법이...

  • 원이 망해갈 무렵, 공민왕은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몽골의 색깔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여러 개혁을 펼쳤다. 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신돈은 국내에 쌓여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원명교체기,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다] “고려의 왕이십니까? 몽골의 신하십니까? 몽골의 머리와 몽골의 옷을 입고 개경에 들어가실 겁니까?” 원나라의 수도 베이징에 인질로 잡혀 있던 공민왕이 귀국하는 길, 노국대장공주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노국대장공주는 몽골인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을 지지하고 개혁을 해나갈 수 있도록 큰 힘이 돼주었어요. 당시 개혁 추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원나라의 힘이 크게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뭐든 영원한 것은 없나 봐요. 전 세계를 ‘we are the world~♪’ 할 것만 같았던 원나라도 기세가 약해져서 망해가고 있었어요. 이 시기를 원명교체기라고 하죠. [공민왕, 개혁을 위해 반원자주정책과 왕권 강화를 추진하다]...

  • 신라 시대는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되는데 상대는 성골만 왕을 할 수 있었다. 성골의 대가 끊기고 무열계 진골 김춘추가 왕이 된 중대에 통일신라는 전성기를 맞는다. 하대에는 내물계가 왕위를 이었으며 백제와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나 후삼국 시대가 펼쳐진다. [발해의 건국, 남북국 시대가 열리다] 우리는 긴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도구를 통해 선사 시대를 구분해봤었고, 그중에선 청동기 때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세워진 것도 봤어요.이후 여러 나라의 성장을 거친 후 고대국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겼지만 결국 가장 뒤처져 있다고 생각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것도 봤죠. 그렇게 탄생한 국가가 통일신라입니다. 그런데 이때 깔끔하게 민족이 정리된 게 아니라 중국에 끌려갔던 고구려 사람들이 탈출해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북쪽 만주 지방에 세워요. 이 나라가 발해입니다.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북쪽에는 발해가, 남쪽에는 통일신라가 있는 ‘남북국 시대’가 됩니다....

  • 청동기 시대에 벼농사가 시작되며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불평등이 발생하며 계급과 국가가 생겼고 이런 계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무덤이 ‘고인돌’이다. 이 시기에는 가부장적 구조가 확립되기도 했다. [벼농사를 시작하고 지상가옥을 짓다] 청동기부터는 축적된 농경기술로 드디어 벼농사가 시작됩니다. 여전히 농경사회니까 주거는 당연히 정착생활을 했어요.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뭐죠?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과거를 통해 현재를 개선해 나가려는 ‘교훈 얻기’가 중요한 이유일 거예요. 청동기인들은 역사를 좀 공부했나 봅니다. 강가나 바닷가에 살아봤더니 춥잖아요. 그러니까 고민을 합니다.‘어디 보자, 물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면서도 땅을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한 거죠.그래서 찾은 곳이 물가 근처이면서(임수) 뒤로는 산이 있어(배산)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럼 이제 땅 파고...

  • 1,000원의 퇴계 이황과 5,000원의 율곡 이이는 16세기 문화의 주역이었다. 이황은 사화발생기에 활약했고 이이는 붕당정치기에 서인을 이끌었는데, 똑같이 성리학을 연구했음에도 다른 해석과 적용을 보였다. 이황은 『성학십도』를 썼으며 이이는 『성학집요』를 썼다. [이황과 이이, 16세기 문화를 이끌다] 주머니나 지갑에 있는 지폐를 한 번 꺼내보세요. 이 지폐들의 모델이 바로 조선 시대 16세기 문화의 주역들입니다. 1,000원의 퇴계 이황과 5,000원의 율곡 이이죠. 이황과 이이를 역사 속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은 엄연히 말하면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이황이 사림들이 화를 당하던 사화발생기에 크게 활약한 인물이라면 이이는 붕당정치기에 서인을 이끌어나간 인물입니다. 활동한 시기가 달랐던 만큼 똑같이 성리학을 연구했는데도 서로 다른 해석과 적용을 보이죠. [이황, 관직에서 물러나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다] 이황은 생후 7개월에...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