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나이팅게일에 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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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의롭게 살며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의사들의 윤리강령이라면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들의 윤리강령이다. 사교육이 드물던 시절, 문학 소녀였던 당신의 성장기에 자부심이 있었던 어머니는 나에게도 그 DNA를 심으려 하셨다. 7살 소녀의 책장은 세계동화와 위인전기로 가득했다. 또래 소녀들이 취해 있던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는 머리길이만 조금 다를 뿐인 무기력한 공주들이 사는 클리셰의 성 같았고, 대신 피터팬에게 꽂혀 “피터팬이 되어 세상을 구하게 해주세요”라고 밤마다 기도했다.

그 후 9살 무렵, 까다로운 나의 안목을 사로잡은 여성 위인전기가 있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다. ‘공주’만큼이나 진부한 ‘천사’라는 제목 때문은 아니고, 전쟁터에서 피범벅이 된 채, 죽어 가는 병사를 치료하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비장한 얼굴이 담긴 표지 때문이었다. 크림전쟁에서 활약한 이 여자 영웅의 스릴 넘치는 모험담에 취해 숨죽여 책장을 넘기던 긴장을 아직 내 몸이 기억한다. 9살 소녀의 가슴에 뜨겁게 찾아들던 그, ‘사명감’이라는 정체 모를 위대한 감정!

그녀들에게도 9살 그 시절이 그러했을까? 간호사 박선욱, 서지윤…. 지금, 오랜 세월 그녀들의 소유였던, 그 신비한 감정은 짓밟혀 버렸다.

16일 오후, 청계광장에서 박선욱 간호사 사망 1주기 집회가 열렸다. 모인 이들은 “사람을 연료로 삼는 병원, 더 이상 간호사를 태우지 마라!”라며 규탄했다.

병원과 이해집단들은 체제유지를 위해, 간호사들의 사명감을 엔진으로 이용하며 몰아붙였다. 불철주야 생명을 지켜야 하므로 그녀들은 안전은 물론, 기본적인 식사와 수면, 배설 같은 생리적 욕구도 반납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간호사들의 헌신은 강제되어, ‘백의의 천사’ 코스프레로 전락했다. 이로 인한 분노는 명예롭고도 엄격한 교육이 아닌 ‘태움’이라는 잔인한 조종으로 대물림되었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비극이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정서적 침체를 겪게 할 만한 비극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고 점차 사물이 또렷이 인지되듯, 어쩌면 이는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그녀들을 위한 애도의 시간을 보낸 어느 날, 나는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전기작가 리튼 스트레치가 쓴 <나이팅게일 간호론>을 발견했다. 이번엔 ‘성인용’ 평전이었다. “약품은 고사하고 모든 여건이 결핍된 혼란의 와중에서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의 체계를 하나하나 세워 가는 일에 돌입했다. 이는 온화하고 여성적인 자기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단호한 규율, 세세한 것에 대한 정밀한 관심, 확고한 결의를 통해서였다. 그녀의 냉정하고 조용한 태도 밑에는 맹렬하고 열정적인 불꽃이 숨어 있었다.”

크림전쟁 당시 그녀의 실제 별명은 ‘백의의 천사’가 아닌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게다가 ‘흰색’이 아니라 어두운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그녀는 전장의 섬뜩한 현실뿐 아니라, 영국 정부와 군부, 병원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씨름하며 야전병원의 체계를 잡았다. 이에 감동받은 수많은 후원자들이 기금을 모으는 데 동참했고, 훗날 나이팅게일 간호학교가 세워졌다.

16일의 집회가 한국의 간호계와 이를 돕는 많은 이들의 연대로 이어져 ‘등불을 든 여인’ 무브먼트로 확장될 날이 오진 않을까. 위기는 역사 가운데 언제나 기회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숭고한 죽음이 있었다. 나이팅게일 키즈들의 비통한 죽음이 의료계의 고질적 관습이라는 물줄기를 바꾸게 되길, 그리하여 물질적 가치가 전부인 이 시대에 사명감이라는, 신비로운 감정이 지켜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추상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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