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사람들’과 첫 만남…박지만 한마디에 판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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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10.27. 오전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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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41회) ‘다큐드라마 제3공화국’

1993년 2월 ‘제3공화국’ 방영 직전

이영신 작가 주선 시내 일식점에서

김성진 전 문공부 장관 등 20여명

박근영 앞에 무릎 꿇은 전 상공장관

“공주님! 늦어서…죽을죄 졌습니다”

술잔 도는 중 박지만의 도발적 질문

“왜 누나에게 ‘박근영씨’라 하시죠?”

‘인간 박정희’부터 26부작 방영 시작

‘다큐 방식’ 80명 섭외해 50명 등장

장도영 미국 은둔 30년만에 첫 인터뷰

“부인 이름 ‘백형숙’ 기억한 덕분에…”


1993년 2월부터 26부까지 방영된 <제3공화국>은 다큐드라마 형식을 도입해 박정희 시대 관계자 수십명의 증언과 인터뷰를 등장시켜 사실성을 높였다. 특히 5·16쿠데타 초기 합류했다가 63년 반혁명죄로 강제전역당한 장도영 전 국방장관을 은둔 30년 만에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1992년 늦가을 미국 미시건주립대 교수로 재직중인 장도영(왼쪽부터) 전 장관을 김영섭·고석만 피디와 이영신 작가가 만나고 있다. 고석만 피디 제공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93년 다큐드라마 <제3공화국>은 문민정부 시대를 맞아 군사문화의 청산, 병영사회 회귀 저지를 목표로 삼았다. 사진은 1961년 5월18일 박정희를 비롯한 5·16 반란군들이 육군본부에서 장면 총리의 쿠데타 승인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극중 장면이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1993년 <제3공화국>은 다큐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다큐멘터리 정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지금은 진정성의 시대이고, 리얼의 시대이며, 소셜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고귀한 피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이뤘다. 그 과정을 드라마로 엮어가고 있다. ‘동북아에서 떳떳하고 일관되게 평화와 민주를 얘기할 수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는 없다. 다른 나라들이 이를 인정하게 만들어야 핵 문제 해법과 꾸준한 동력이 나온다.’ <제1공화국>에서 정치드라마의 문을 열었고 <제2공화국>에서는 정치드라마의 완성도를 꾀했다. <제3공화국>은 ‘군인들의 세계’를 관통하여 ‘군사문화 병영으로의 회귀 저지’가 첫 목표이다. 지금도 촛불의 물결 뒤에서 쿠데타와 계엄령이 암약하는 오늘의 ‘군사문화’를 척결해야 한다. 아울러 ‘역사민주시대’이며 ‘역사소비시대’에 맞는 방송 문법이 나와야 한다.

‘박정희가의 사람들’을 만났다. <제3공화국> 방송이 임박한 그해 1월말 즈음, 이영신 작가와 함께 만나러 간 그곳은 서울 도심에 잘 차려진 일식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10·26 때 ‘박정희 유고’를 발표하던 김성진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첫눈에 보인다. 그때보다 좀 여윈 듯하지만 근엄했다. 초청자로 식탁 맨 앞에 앉아 있고 20여명이 죽 자리했다. 상석에 둘째 딸 박근영(박근령), 그 옆에 외아들 박지만도 앉아 있다. 우리는 그 맞은편 자리에 안내되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둘을 소개하자, 두 사람은 앉은 상태에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방바닥을 파서 발을 뻗게 하는 일식점의 구조로 보아 일어서기가 좀 불편했을 것이다. 둘이 떡하니 앉아서 손을 내밀고 우리는 구부려 인사드리는, 그 모양새는 어색했지만, 그러나 밝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의례적인 날씨 이야기부터 오갔다.

<제3공화국> 방영 직전인 1993년초 고석만 연출은 이영신 작가의 주선으로 박근령(박근영)·박지만 남매를 비롯해 ‘박정희 사람들’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사진은 1990년 언니 박근혜와 분쟁을 빚으며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는 둘째딸 박근영. <한겨레> 자료사진
김성진 전 장관이 전체 분위기를 끌고 나갔다. 몇년 전 <제2공화국>에 대한 논평이 시작되자 이영신 작가는 극도로 말수가 줄어 술만 마시고, 박지만도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제2공화국>은 이상현 작가의 작품이었고, 그 방송 당시 박지만은 사생활이 바빴을 때였다. 좋다는 반응보다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거야 당연한 이치 아닌가. 그때 우리 뒤로 문이 열리고 전 상공부 장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공주님! 학교 수업이 늦어서….” 모두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문을 닫고 들어서며 우리와 김성진 장관의 뒤를 돌아서 박근영의 옆으로 가 무릎을 꿇더니 “공주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당연히 일찍 와 모셔야 되는데… 공주님 죄송합니다”, 박근영은 그냥 끄덕이고, 그는 기어가듯 말석에 앉는 것이다. 조선조 사극의 한 장면 같았다. 술이 몇순배 오고 갈 때 박지만이 이영신 작가에게 “왜 누나에게 박근영씨, 박근영씨 하시죠?” 이 작가 말하길 “박근영씨니까 박근영씨라 하죠.” 박지만은 “육영재단 이사장이니 ‘이사장님’이라 해야 되잖아요?” ‘공주님’과 ‘씨’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이사장님’일까? 호칭 문제가 대두되고, 급기야 이 작가의 큰 소리가 나오며 술좌석은 깨졌다. 이 작가가 매개가 되어 이뤄졌던 ‘박정희가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것으로 처음이자 끝이었다.

1993년초 <제3공화국> 제작진과 만난 자리에서, 박지만은 이영신 작가에게 육영재단 이사장인 둘째 누나를 ‘박근영씨’로 호칭했다고 항의해 말다툼을 벌였다. 사진은 그해말 박지만이 마약 투약 혐의로 세번째 체포돼 재판에 출두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1공화국> 때부터 세워놓은 원칙이 있다. 관계 당사자들과 접촉 금지다. 평소 혹은 기획 단계 때 취재와 확인을 위해 만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제작이 발표되고 방송이 시작된 이후 접촉은 위험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미술부에서는 고증 문제로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하고, 그를 통해 연기자들과의 접촉도 종종 이뤄지고 있었다. <제1공화국>의 김기팔 작가는 방송 중 접촉 금지 원칙을 모범적으로 잘 지키고, <제2공화국>의 이상현 작가는 원고 속도가 늦어 관계 당사자들을 만날 틈이 없었다. 자료는 받곤 했다. 그런데 <제3공화국>의 이영신 작가는 여야를 넘나들며 당사자들과의 접촉이 일상이었다. 그 자신 정치 참여 경력을 바탕으로 취재원을 만나고, 새로운 자료를 얻어내는 극작 방법이기도 했다. 심지어 탈고한 원고를 수정하기도 했다. 라디오 드라마 <격동 30년>을 긴 시간 같이해온 성우 김종성의 추천이 <제3공화국> 작가 선정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영신, 그는 한마디로 ‘정치 인명사전’이었다.

이영신 작가는 라디오의 정치다큐 드라마 <격동 30년> 집필과 직접 정치 활동도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제3공화국>에서도 수많은 정치인들을 직접 취재해 반영했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우리는 실재했던 사건의 사실감을 증언으로 확인하고, 오늘의 시청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고조시킬 것이다. 이 증언들은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기록적 가치는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다. 드라마 진행과 함께 드문드문 혹은 집중적으로 그 시대를 증언할 것이다.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일’, 그것이 다큐의 본령이다.

다큐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아역부터 중년까지 ‘박정희’를 4명의 배우가 연기했다. 왼쪽부터 청년 시절 이창환, 소년 시절 홍경인, 중년 시절 이진수가 촬영 현장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1993년 2월7일 <제3공화국>은 ‘인간 박정희’로 26부작을 시작했다. 첫 장면은 출생을 거부당한 박정희, 45살에 임신한 어머니 백남의는 며느리 부끄러워 유산되길 기원했다. 높은 장독대 위에 올라갔다 뛰어내리기도 하고, 간장을 몇 사발씩 들이켜기도, 디딜방아에 배를 쳐대기도 했다. 그러나 1917년 11월14일,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과 함께 박정희는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왕복 40리 길 초등(국민)학교를 다니며 ‘일본군 기동훈련’을 감탄스레 참관하기도 했고, 셋째 형 박상희에게 감화되어 12살 때부터 민족주의 청년으로 자란다. 박상희 형과 같이 만난 <동아일보> 김천지국장 황태성은 훗날 박정희를 괴롭혔다. 윤보선과 맞붙은 63년 대통령 선거 때 ‘빨갱이 논쟁’의 빌미가 되는 것이다. 형 박상희는 46년 ‘10·1사건’ 때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띠동갑 형이 독립운동하다 수차례 경찰에 끌려다니는 것을 보며 자란 소년 박정희는 어느 날 묻는다. “아부지, 군인하고 순사하고 누가 더 니꺼?” “그야 군인 아니겠노.” 이것이, 이 땅의 ‘군사문화 진앙지’가 되었다.

박정희는 18살에 첫 아내 김호남과 결혼한다. 두 사람의 딸 박재옥은 증언한다. “중매로 하신 거죠. 부모님 강요에… 신혼, 결혼 생활은 없었다고 봐야죠.” 박정희는 부관 한병기를 박재옥과 맺어주며 아버지 노릇을 다했다.

박정희는 초등학교 교사 시절 총독의 삭발령에 항의하며 연회석의 술상을 엎어버렸다. 정작 70년대 장발 단속령을 선포하는 박정희. “어떻게 시대 상황에 순응할 것인가. 왜왕의 개가 되든 돼지가 되든… 만주에 가겠다.”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고,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42년 4월 일본 육사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일본 군복을 입고 해방을 맞는다. 1년 남짓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46년 9월24일, 조선경비대 2기로 들어가 8연대의 원용덕에게 신고한다. 그때 박정희는 이대 출신의 원산 여자 ‘미쓰 리’에게 매혹을 느끼고 동거에 들어간다. 그 뒤 ‘여순사건’은 박정희를 사상논쟁의 핵심부에 빠져들게 한다. 김안일·백선엽의 ‘숙군작업’에 동조, 황태성·이재복 등 남로당 관련자들을 고발한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동족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을 통감한다”며 수많은 명단을 내밀었다. 그 공로로 풀려난다.

<제3공화국>은 첫회 두편에 걸쳐 ‘인간 박정희’의 출생부터 5·16 쿠데타 때까지 개인사와 가족사를 집중 조명했다. 18살 때 중매로 결혼한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오연수)과 사이에 딸 박재옥을 낳고 이혼한다.
1946년무렵부터 박정희(박정희)는 이화여대 출신 ‘미쓰 리 이현란’(김애경·왼쪽)와 동거를 했으나 48년 여순사건 와중에 이현란은 그를 떠난다. 엠비시가이드 제공
한국전쟁 와중인 1950년 12월12일 박정희(이진수·오른쪽)는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교사 출신 육영수(왼쪽·김미숙)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엠비시가이드 제공
해방 공간 미 군사 고문단의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의 증언을 들어본다. 그는 35년간 한국에 체류하며 정치와 군사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92년 늦가을 미국 텍사스주 주도 오스틴에 살고 있는 하우스먼을 찾아갔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정희를 구명한 이유를 서슴없이 술회했다. “첫째 협력이 필요했다. 둘째 당시 정보국장 백선엽의 부탁이 있었다. 셋째 과거 공산당과 연루되어 있어 정보가 많다.” 하우스먼은 “남로당과 연루된 박정희를 내가 살렸다”며 큰소리쳤다. ‘남로당 학살 장면’ 필름을 우리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고석만(맨왼쪽) 연출과 이영신(왼쪽 세째) 작가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을 찾아가 해방공간 미군정 군사고문단의 제임스 하우스먼(맨 오른쪽)을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946년 ‘여순사건’에 연루된 박정희를 구명한 이유를 증언했다. 사진 고석만 피디 제공
박정희는 석방 1개월 뒤 복직한다. 곧 정보국장 이후락에게 신고하러 간다. 이제부터 ‘한 시대 이 나라를 지배한 군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락을 비롯해 육사 8기, 김종필·최영택·이영근·석정선 등 군 엘리트 집단과의 첫 만남이다. 그런데 ‘미쓰 리’는 편지 한장 써놓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박정희는 화가 많이 났다. 집안의 온갖 기물을 때려 부수고 심지어 짖어대는 셰퍼드 개를 총으로 쏴 죽인다. 이 장면은 심의에 걸려 삭제되었다. 박정희는 그 후유증을 안고 증발된다. 일년 남짓 지나 6·25가 터졌다. 누이의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전쟁 소식에 상경한 그는 수원 육군본부에 문관으로 합류한다. 장도영은 그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전쟁 와중에 복직 심사가 이뤄지고 박병권·송요찬 등의 옹호를 받으며 통과, 정일권 소장에게 소령으로 복직 신고를 하게 된다. 1950년 7월10일. 모멸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제2의 인생이 펼쳐진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직후 박정희(이진수·왼쪽)는 수원 육군본부 전투정보부 장도영(노주현·오른쪽)의 도움으로 군에 복귀한다.
<제3공화국>은 다큐드라마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93년, 문민정부라고 해도 70% 이상의 정부 고위직을 군인이 차지하고 있던 때, ‘너희는 쿠데타만 일으키지 말고 대신 이것 갖고 놀아라’ 하며 비싼 장난감 잔뜩 사주며 달래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어쩌지 못 하는 군사문화다. 드라마는 한편으로 그들의 작태를 보다 리얼하게 그려 군사문화의 폐해를 인식시키려 하는 것이다.

‘다큐’의 핵은 증언이다. 기획 때 후보로 선정된 인물은 100명 정도, 섭외를 마친 인물이 80명, 인터뷰를 딴 인물이 60명, 방송에 등장한 인물이 50명이다. 한두명을 빼면 대체적으로 ‘반박정희’ 정서다. 박재옥·한병기를 필두로 김점곤 권상하 최영택 이영근 석정선 선우종원 황용주 최영희 박영옥 김재춘 박치옥 윤길중 김용식 한태연, 일본과 미국에서 시마모토 겐조, 나카소네, 최서면, 마셜 그린, 하우스먼 그리고 장도영.

<제3공화국> 제작진이 미국에 은둔중이던 장도영의 인터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첫 전화 통화에서 부인 백형숙과 연결된 덕분이었다. 박마리아의 이대 제자인 백형숙(윤미라)은 1990년 방영된 <제2공화국>에서 등장했었다. 문화방송 제공
장도영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데 애를 먹었다. 모르거나 알려주지 않았다. 재향군인회에서 가까스로 미국 미시건주의 자택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미국과 시차도 조심스럽게 맞추고, 질문서도 준비하고, 거부할 때도 대비하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곧 전화를 받는데 뜻밖에 여자 목소리다. 유창한 영어로 “헬로”, 순간 나온 말이 “백형숙 여사시죠?” 곧바로 “네, 그런데 누구세요?” 부드럽기 그지없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 백형숙인가?’ 장도영 자료를 공부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력된 부인 이름이 엉겁결에 나온 것이다. 그 한마디에 모든 계획이 잘 풀렸다. 이렇게 해서 5·16 이후 최초로 ‘장도영 직격 인터뷰’가 성사됐다.

장도영: 6·25 때 내가 박정희를 살렸다. 백선엽에게 조직 명단을 제공, 남로당계를 발본색원하였고, 남로당 활동 사실을 조사 과정에서 다 밝혀 목숨을 건졌다.

(해설: 육참총장 장도영은 5·16 때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장도영: 여수에서 일어난 반란 때, 경장비로 포병부대를 제압했는데 그때 몇년이 걸렸으며 몇십만이 피해를 보았는가?

(해설: 5·16 그날, 귀하는 국민 배신행위를 저지른 것 아닌가?)

장도영: 난 그것밖에 들은 게 없어요.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이다’.

(해설: 그때 이한림의 1군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참모총장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장도영: 1군사령관이 군단장에게 다시 사단장에게 전화했다고 합시다. 출동해서 서울까지 오는 데 몇시간 걸릴까요? 만일 군사 동원해서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때로서는 민주공화국으로 돌아오기 힘들어요. 그러나… 이것이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볼 때… 커다란 죄를 범한 거다.(통렬한 참회의 눈빛이다.)

1992년 늦가을 <제3공화국> 제작진은 61년 5·16쿠데타 당시 주한 미대사 대리였던 마셜 그린을 미국 워싱턴 디시의 자택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김영섭·고석만 피디, 마셜 그린, 이영신 작가. 고석만 피디 제공
61년 주한 미국대사 대리 마셜 그린도 증언했다.(한국 유물 박물관 같은 그의 워싱턴디시 저택에서 녹화했다.)

마셜 그린: 이한림 1군사령관에게 서울을 포위하자 했다. 윤보선은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심지어 울기까지 했다. 미국대사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학생운동권도 아무 반응이 없고, 야권 지도자도 침묵했다. 모두들 두려워 내 성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그의 이런 한국 인식은 오랜 시간 한-미 관계를 냉각시켰다.)

상관이자 은인인 장도영 육참총장을 1961년 5·16쿠데타 때 ‘간판’으로 내세웠다 몰아내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마침내 군복을 벗는다. 63년 8월30일 강원도 철원 5군단에서 열린 전역식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육군 대장 박정희. <한겨레> 자료사진
1961년 5월18일 오전 11시. 장도영은 칼멜수녀원에 피신해 있는 장면 총리를 찾는다. 장면은 크게 노하여 “네놈의 더러운 행위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유다만도 못한 놈! … (긴 침묵) 아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다… 미안하이 장 장군, 중앙청으로 가서 내가 마무리 지어줄 테니….” 그날 오후 4시. 정부는 쿠데타군의 계엄령을 추인한다. 성공한 쿠데타다. 육본에 진을 치고 있던 쿠데타군은 공포탄을 쏘아대며 환호한다.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 참모총장직과 계엄사령관까지 맡아주십시오”, 장도영은 “내 짐이 너무 무거운 것 같소”라며 웃는다. 육본의 공포총 소리와 장도영의 웃음소리에 섞여, 63년 8월30일 ‘육군 대장 박정희 전역식’의 한마디가 들려온다.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이 땅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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