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모순과 역설의 현장
"현저동(峴底洞) 101번지, 이름갈이를 여러 번 했으면서도 우리의 뇌리에 끝내 서대문형무소로 박혀 버릴 수밖에 없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 그러기에 당연히 감옥의 대명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 서대문형무소는 암울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증언해 주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요, 바로 민족저항사와 민족수난사 그리고 민주화의 열망이 농도 짙게 집약된 곳이기도 하다." ―나명순, 「서대문형무소 소사」 중에서
근대적인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 서대문형무소. 1908년에 문을 열어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을 사진과 글로 조명해 보는 기록성 높은 책 『서대문형무소』를 선보인다.
1905년의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형정권(刑政權)까지 강탈한 일제는 감방의 태부족을 느끼고 무악재 고개 밑, 서대문 밖 인왕산(仁王山) 기슭 금계산(金鷄山) 자락에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신식 감옥을 짓는다. 1907년 간수 출신의 일본인 시텐노 가즈마(四天王數馬) 설계,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 시공으로 착공하여 이듬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개소(開所)한 이래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특히 1919년 삼일운동 이후에는 천육백아흔두 명이 한꺼번에 입감되어 형무소 수용인원이 삼천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해방과 육이오를 거치고 1960년 사일구 의거 직후에는 정치인, 군장성, 정치깡패 등이 수감되었고, 1961년 오일륙 쿠데타 직후에는 반혁명사건 연루자들이 대거 투옥되었으며, 이후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거쳐갔으니,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근현대사의 그늘진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민족사의 모순과 역설의 현장이라 할 수 있겠다. 1908년 현저동 101번지에서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이래, "서대문감옥"(1912-1922), "서대문형무소"(1923-1949), "서울형무소"(1950-1960), "서울교도소"(1961-1966), "서울구치소"(1967-1987) 등 격변하는 시대를 따라 그 이름도 숱하게 바뀌어 온 이곳은, 가장 오랜 기간 불렸던 이름 탓인지 작가 나명순의 말처럼 "우리의 뇌리에 끝내 서대문형무소로 박혀 버릴 수밖에 없는" 곳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관한 풍부하고 다각적인 기록
"당신은 혹시 길이 여덟 자, 너비 넉 자 크기의 관 속에 들어가 누워 본 일이 있습니까? …여름이면 낮에도 컴컴한 이 관 속 방바닥에서 '식사'라는 것을 차려 놓고 먹을라치면, 막힘이 없이 통해 있는 변소의 구멍에서 누런 구더기떼가 줄줄이 기어 나와 더불어 생존하기를 요구합니다. …시체를 넣는 관이 아니라, 지난 세월, 비인간적인 독재정권 아래서 수천, 수만의 청치수, 사상수, 양심수, 확신수 들이 처넣어져서 신음해야 했던 이 나라의 교도소와 형무소의 감방, 독방의 모습입니다. …이 관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세계 문명사회의 가려진 치부입니다."―리영희, 「서대문형무소의 기억」 중에서
이 책은, 1987년 경기도 의왕으로 옮겨 간 직후 그 자리에 남은 서대문형무소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글을 묶어 1988년 <열화당 사진문고 23?>으로 펴낸 바 있다. 그리고 꼭 스무 해가 흐른 오늘, 서대문형무소 개소 백 주년을 맞아 판형을 확대하고 일제시대 도면과 자료사진을 추가했으며, 백범 김구 선생, 시인이자 소설가인 심훈 선생, 독립운동가 김정련 선생이 쓴 서대문형무소에 관한 글 세 편을 더해 개정증보판으로 다시금 선보인다.
초판 당시 조선일보 사진기자였던 김동현.민경원이 촬영한 93컷의 사진은 서대문형무소의 바깥 풍경에서 형무소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는 옥사(屋舍)와 감방, 취사장, 목욕탕까지, 단 한순간에 생(生)과 사(死)를 가르는 사형장에서 수감자들의 낙서가 새겨진 감방 벽까지를 구석구석 비추고 있어, 지금은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은 이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증언한다. 소위 "반공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세 차례나 투옥되었던 언론인 리영희의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은 감옥에서의 생활상을 사진만큼이나 상세하게 그리고 있으며, 자료사진.도면과 함께 읽는 작가 나명순의 「서대문형무소 소사(小史)」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에 얽힌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그 파란만장한 발자취를 되짚어 보고 있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투옥된 김구(金九) 선생은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일상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 중 발췌한 글 「나의 옥중생활」을 통해 일제시대 당시 감방의 모습과 일본인 간수들의 횡포, 애국지사들이 겪었던 고통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은, 경성제일고보 재학 시 삼일운동에 가담하여 검거 투옥된 심훈(沈熏) 선생이 어머니께 쓴 편지글로, 감방 동료의 죽음을 지켜본 후 극한의 고통 속에서 오히려 굳건해지는 민족정신을 이야기한다. 1930년 일본 총독부 우편차를 습격해 징역 구 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독립운동가 김정련(金正連) 선생의 「형무소의 도산(島山) 선생」은, 당시 형무소에 수감된 동지들끼리 주고받던 암호인 <타벽통보법>을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에게 가르쳐 주려다 발각될 뻔하여 곤욕을 치렀던 사건을 그리고 있어, 서대문형무소가 민족 탄압의 장소인 동시에 해방운동의 방안이 모색된 장소였음을 알게 된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서대문형무소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일제 때의 자료사진과 도면, 그리고 유관순?강우규.안창호의 수형기록표 등 30컷의 자료 도판들로 인해 더욱 높은 기록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감옥사의 한 단면을 다각도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우리 근현대사의 깊은 상처를 간직한 음지, 한국의 바스티유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이젠 안으로만 간직한 채, 서대문시대 그 칠십구 년의 역사를 마감한 서대문형무소. <l한국의 바스티유>로 불리기도 하다가 이제는 퇴역한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그러나 오늘, 아직은 철문에 빗장을 지르고 텅 빈 채로 침묵에 싸여 얼룩진 벽돌담과 감시탑만으로 말없이 오가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나명순, 「서대문형무소 소사」 중에서
암울했던 일제시대, 군사독재정권 시절과 더불어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 경기도 의왕의 신축 건물로 이전함으로써 다사다난했던 서대문시대의 막을 내렸고, 이 서대문시대 79년 동안 줄잡아 35만여 명이 이곳에 어떤 형태로든 한을 묻었다. 일제 때부터 수많은 원(怨)과 한(恨)이 서려 온 서대문의 감옥 터는 이제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되어 현재까지 중앙사와 제9-13사, 한센병사 등 일곱 개의 건물과 사형장을 보존하면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수치스러운 것이든 명예로운 것이든, 역사란 그 민족이 보듬고 기억해야 할 무언가이다. 서대문형무소 100주년을 맞은 지금, 이 책을 다시 선보임으로써 우리 역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이 모순과 역설의 장소를 많은 이들과 함께 기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