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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죽마고우 '송몽규'…항일운동에 바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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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는 영화 <동주>. 제목에서 보다시피 이 영화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시인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동주뿐만 아니라 몽규도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름도 낯선 송몽규,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역사는 송몽규를 독립운동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윤동주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의 존재였습니다. 1917년 같은 해 명동촌에서 3개월 차이로 탄생. 윤동주와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외사촌 형이자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고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한 죽마고우입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문학적으로 조숙했고 반일투쟁의식도 남달랐던 정신적 동지였습니다. 그랬던 송몽규를 윤동주는 '완고하던 형'이라 표현했습니다. 그 표현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9살 송몽규는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 후 가출, 김구 선생이 있는 중국 낙양 군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뜻을 세우고 몸을 던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송몽규는 군사 훈련을 열심히 하면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조선인반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이 책 이름을 신민이라 지어줬습니다. 그곳에서 1년간 군사 교육을 받았으나 재정 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참여해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갖은 고문과 취조를 받았고, 풀려난 후에는 주요 감시대상자에 올라 평생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 윤동주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 표시로 7개월 만에 중학교를 자퇴하고 귀향했는데, 그 곳에서 송몽규를 그리며 <이런 날>을 썼습니다.

옥살이 끝에 귀향한 송몽규는 이후 학업에 전념,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우회 잡지 <문우>의 문예부장을 맡아 윤동주 외 학우들과 활동했으며, 문학작품 품평회 등을 하는 기숙사 모임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민족의식이 강한 송몽규도 1942년 소무라 무게이로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버티고 버티던 창씨개명이었지만 일본유학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일본 유학생이 된 송몽규는 항일 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의 핵심 인물로 체포됐고, 후쿠오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곳에는 윤동주도 함께 있었습니다.

송몽규의 죄수복은 다른 죄수들과 달리 붉은색이었습니다. 그가 사상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역시 후쿠오카 형무소의 다른 복역자들과 같이 생체실험의 대상이었습니다. 같은 곳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곳에서 공부하고 같은 죄목으로 수감된 윤동주와 송몽규. 윤동주 인생의 동반자였던 송몽규는 윤동주의 마지막을 이야기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윤동주가 사망한 후 불과 1개월이 되지 않아 송몽규 역시 옥사 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29세. 광복을 5개월 여 앞둔 날이었습니다.

 


                 송몽규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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