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윤청신 기자]

3.1절 100주년을 맞아 영화 '동주'가 방영돼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시인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1일 오후 tvN에서는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를 방송했다.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독립운동가 송몽규(박정민)의 빛나던 청춘을 담은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지간 동주와 몽규.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두 사람,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 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한편 윤동주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 김약연, 남종구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15세 나이로 명동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정재면이 교사로 부임해 마을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온 1909년이었다.

이듬해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한 윤영석은 1913년 3월 문재린 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와 모교인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동주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명동촌에서도 벼농사를 하는 몇 집 가운데 하나로 넉넉한 가세를 자랑했다.

윤동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큰 마을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윤동주의 성장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영향이다. 명동교회의 장로로 도량이 넓었던 할아버지 윤하현과 집안의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기독교정신을 배우며 자랐다.

또 1912년 결성된 북간도 최초의 한인자치단체 간민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 아래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뜰 수 있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송몽규는 앞서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1936년 4월 제남에서 체포 압송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된 전력이 있었다. 1937년 4월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 문과 별과시험에 합격해 윤동주와 다시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했다.

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친구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전시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는 도지샤의 자유로운 학풍을 호흡하고, 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한결 안정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 같은 증언을 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같은해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했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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