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話]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 날 무슨 일이?

입력 2015.04.02 (11:00) 수정 2015.04.0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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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이다.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달라는 안 의사의 간절한 바람에도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광복 70주년이 무색한 일이고 후손으로서 면목 없는 일이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가족들의 강력한 시신 인도 요구를 묵살한 일제는 안 의사의 시신을 압수한 뒤 극비리에 뤼순 감옥 묘지에 매장했다. 이날 저녁, 매장 완료 보고를 받은 안중근 재판의 최고 책임자인 뤼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요시토(平石義人)는 관사에서 성대한 술판을 벌였다. ‘안중근 사건 관계자 위로 만찬회’라는 이름의 축하연에는 고급 요정에서 동원된 기생들과 일왕의 하사금이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날 이후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졌다.

■ “뤼순 감옥 공공 묘지에 매장”



현재 안중근 의사의 매장지를 추론할 수 있는 문서는 사형 집행 당시 조선 통감부 통역인 스노끼가 작성한 ‘사형집행 시말 보고서’다. 일본어로 쓰인 이 보고서를 보면 “10시 20분 安의 시체는 특별히 감옥서(監獄署)에서 만든 침관(寢棺)에 이를 거두고 흰색 천을 덮어서 교회당으로 운구 되었는데 이윽고 그 공범자인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3명을 끌어내어 특별히 예배를 하게하고 오후 1시에 ‘감옥서의 묘지’에 이를 매장했다.” 스노끼 보고서는 안 의사의 매장지를 ‘감옥서(監獄署) 묘지’로 적고 있다. 또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 발행된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도 “안중근 사체는 오후 1시 ‘감옥 공동 묘지’에 묻었다”고 보도했다. 이외에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일일신문 등에서도 안 의사의 매장지로 “감옥 공동묘지”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 뤼순 감옥 공공묘지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사형집행 시말 보고서와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뤼순 감옥 공공묘지’가 어디일까? 현재 중국정부가 공식 인정하고 있는 ‘뤼순감옥 공공묘지’가 있다. 옛 뤼순감옥에서 1.2 킬로미터 떨어진 ‘둥산포(東山坡)’다. 아직까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지막한 야산이다. 이곳에는 현재 잡목이 무성하고 일반인 묘지도 다수 들어서 있다. 하지만 턱밑까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상태다. 개발 위험이 커지자 다롄시(大連市) 문물관리위원회는 지난 2001년 1월, 이곳에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旧址墓地)라는 비석을 세우고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했다. 더 이상의 개발을 막고 있는 것이다. 지정 면적은 2,000㎡ 정도로 300여 명을 매장할 수 있는 규모다. 이 지역은 뤼순감옥이 1907년부터 1942년까지 사형수와 병사한 죄수 대부분을 묻은 초기 감옥 묘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뤼순감옥 공공묘지에서는 지난 1965년과 1971년 두 차례 발굴에서 시신 15 구가 발견됐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안 의사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김월배 중국 다롄 외국어대 교수는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이 이뤄진다면 소나무 관에 안치돼 있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목에 십자가를 두르고 계신다면 안중근 의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한다.

■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 실현되나?



국가 보훈처가 특히 이 지역에 대한 발굴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현재로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2008년 4월, 뤼순 감옥 북쪽 야산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지만 깨진 그릇 몇 점만 발굴했을 뿐 유해 발굴은 실패했다. 특히 뤼순 감옥 주변은 2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가 잇따라 들어서면서 105년 전 지형과 많이 달라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발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정부는 중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뤼순 감옥 공공묘지’에 대한 발굴을 서두르고 있다. 국가 보훈처는 현재 뤼순 감옥 공공묘지에 대해 땅을 파지 않고 유해를 탐지할 수 있는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GPR)를 중국 측에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전면적인 땅 파기 발굴에 들어갈 경우 자칫 일반인 묘역의 유해를 훼손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를 통해 땅 속 깊이 1.5m를 탐지해 ‘소나무 관’을 찾겠다는 것이다. 땅 파기를 최소화하면서 유해발굴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표투과 레이더 조사로 유해를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다른 대안이 없고 단 1%의 가능성도 놓칠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제껏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에 대해 허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중국이 소극적인 이유는 우선 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 의사에 대해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굴을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북한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2008년 한 차례 이뤄진 발굴조사도 2007년 4월 남북이 공동 발굴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하고 중국 측에 요청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범정부적인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 어머니, 부인, 동생 유해도 못 찾아



유해를 못 찾는 건 안중근 의사뿐만이 아니다. 안 의사의 모친과 부인, 두 동생 유해도 어디 있는 지 모른다. 안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자 모친인 조 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조마리아의 전갈’은 너무나 유명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이 편지를 쓰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조 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 후원회에 가담해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상하이에서 별세해 프랑스 조차지 안의 외국인 묘지인 찡안쓰(靜安寺)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혔다. 하지만 현재 이 묘지는 도시 개발로 사라졌다. 1955년 무렵 상하이시 정부가 묘소를 쉬자후이(徐家匯) 만국공묘(현재 송경령 능원)로 이전을 추진하면서 조 여사의 유해가 이장되지 못했다. 부인 김아려 여사도 1949년 2월, 상하이에서 조마리아 여사와 같이 찡안쓰 만국공묘에 묻혔지만 그 뒤 묘소를 알 길이 없다. 동생 안정근(安定根)과 안공근(安恭根)도 상하이(上海)와 충칭(重慶)에서 돌아가신 뒤 지금껏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외국 땅을 떠도는 불귀의 객이 된 안중근 의사 일가는 지금 조국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영국 ‘더 그래픽’(The Graphic)지가 당시 보도한 안중근 의사 공판 참관기의 일부다.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돼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 우리의 영웅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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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話]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 날 무슨 일이?
    • 입력 2015-04-02 11:00:28
    • 수정2015-04-02 15:20:28
    중국話
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이다.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달라는 안 의사의 간절한 바람에도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광복 70주년이 무색한 일이고 후손으로서 면목 없는 일이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가족들의 강력한 시신 인도 요구를 묵살한 일제는 안 의사의 시신을 압수한 뒤 극비리에 뤼순 감옥 묘지에 매장했다. 이날 저녁, 매장 완료 보고를 받은 안중근 재판의 최고 책임자인 뤼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요시토(平石義人)는 관사에서 성대한 술판을 벌였다. ‘안중근 사건 관계자 위로 만찬회’라는 이름의 축하연에는 고급 요정에서 동원된 기생들과 일왕의 하사금이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날 이후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졌다.

■ “뤼순 감옥 공공 묘지에 매장”



현재 안중근 의사의 매장지를 추론할 수 있는 문서는 사형 집행 당시 조선 통감부 통역인 스노끼가 작성한 ‘사형집행 시말 보고서’다. 일본어로 쓰인 이 보고서를 보면 “10시 20분 安의 시체는 특별히 감옥서(監獄署)에서 만든 침관(寢棺)에 이를 거두고 흰색 천을 덮어서 교회당으로 운구 되었는데 이윽고 그 공범자인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3명을 끌어내어 특별히 예배를 하게하고 오후 1시에 ‘감옥서의 묘지’에 이를 매장했다.” 스노끼 보고서는 안 의사의 매장지를 ‘감옥서(監獄署) 묘지’로 적고 있다. 또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 발행된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도 “안중근 사체는 오후 1시 ‘감옥 공동 묘지’에 묻었다”고 보도했다. 이외에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일일신문 등에서도 안 의사의 매장지로 “감옥 공동묘지”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 뤼순 감옥 공공묘지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사형집행 시말 보고서와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뤼순 감옥 공공묘지’가 어디일까? 현재 중국정부가 공식 인정하고 있는 ‘뤼순감옥 공공묘지’가 있다. 옛 뤼순감옥에서 1.2 킬로미터 떨어진 ‘둥산포(東山坡)’다. 아직까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지막한 야산이다. 이곳에는 현재 잡목이 무성하고 일반인 묘지도 다수 들어서 있다. 하지만 턱밑까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상태다. 개발 위험이 커지자 다롄시(大連市) 문물관리위원회는 지난 2001년 1월, 이곳에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旧址墓地)라는 비석을 세우고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했다. 더 이상의 개발을 막고 있는 것이다. 지정 면적은 2,000㎡ 정도로 300여 명을 매장할 수 있는 규모다. 이 지역은 뤼순감옥이 1907년부터 1942년까지 사형수와 병사한 죄수 대부분을 묻은 초기 감옥 묘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뤼순감옥 공공묘지에서는 지난 1965년과 1971년 두 차례 발굴에서 시신 15 구가 발견됐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안 의사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김월배 중국 다롄 외국어대 교수는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이 이뤄진다면 소나무 관에 안치돼 있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목에 십자가를 두르고 계신다면 안중근 의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한다.

■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 실현되나?



국가 보훈처가 특히 이 지역에 대한 발굴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현재로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2008년 4월, 뤼순 감옥 북쪽 야산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지만 깨진 그릇 몇 점만 발굴했을 뿐 유해 발굴은 실패했다. 특히 뤼순 감옥 주변은 2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가 잇따라 들어서면서 105년 전 지형과 많이 달라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발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정부는 중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뤼순 감옥 공공묘지’에 대한 발굴을 서두르고 있다. 국가 보훈처는 현재 뤼순 감옥 공공묘지에 대해 땅을 파지 않고 유해를 탐지할 수 있는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GPR)를 중국 측에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전면적인 땅 파기 발굴에 들어갈 경우 자칫 일반인 묘역의 유해를 훼손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를 통해 땅 속 깊이 1.5m를 탐지해 ‘소나무 관’을 찾겠다는 것이다. 땅 파기를 최소화하면서 유해발굴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표투과 레이더 조사로 유해를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다른 대안이 없고 단 1%의 가능성도 놓칠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제껏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에 대해 허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중국이 소극적인 이유는 우선 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 의사에 대해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굴을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북한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2008년 한 차례 이뤄진 발굴조사도 2007년 4월 남북이 공동 발굴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하고 중국 측에 요청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범정부적인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 어머니, 부인, 동생 유해도 못 찾아



유해를 못 찾는 건 안중근 의사뿐만이 아니다. 안 의사의 모친과 부인, 두 동생 유해도 어디 있는 지 모른다. 안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자 모친인 조 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조마리아의 전갈’은 너무나 유명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이 편지를 쓰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조 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 후원회에 가담해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상하이에서 별세해 프랑스 조차지 안의 외국인 묘지인 찡안쓰(靜安寺)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혔다. 하지만 현재 이 묘지는 도시 개발로 사라졌다. 1955년 무렵 상하이시 정부가 묘소를 쉬자후이(徐家匯) 만국공묘(현재 송경령 능원)로 이전을 추진하면서 조 여사의 유해가 이장되지 못했다. 부인 김아려 여사도 1949년 2월, 상하이에서 조마리아 여사와 같이 찡안쓰 만국공묘에 묻혔지만 그 뒤 묘소를 알 길이 없다. 동생 안정근(安定根)과 안공근(安恭根)도 상하이(上海)와 충칭(重慶)에서 돌아가신 뒤 지금껏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외국 땅을 떠도는 불귀의 객이 된 안중근 의사 일가는 지금 조국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영국 ‘더 그래픽’(The Graphic)지가 당시 보도한 안중근 의사 공판 참관기의 일부다.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돼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 우리의 영웅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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