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 희생된 죽계천 어찌 이리 맑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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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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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에서 부석사 가는 길 순흥 땅에…

부석사 삼층석탑에서 본 일몰. 오른쪽이 무량수전, 정면이 안양루다. 미세먼지로 노을이 곱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마저도 욕심임을 일깨우는 평온한 풍경이다. 영주=최흥수기자


풍기에서 순흥면, 단산면을 거쳐 부석면에 이르는 소백산 골짜기는 깊고도 넓다. 곳곳에 숨겨진 사연을 더듬으며 부석사 가는 길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여행과 같다.

풍기역에 내리면 오른쪽 주차장에 커다란 급수탑이 서 있다. 풍기역은 중앙선 개통 때부터 모든 기차가 쉬어가는 곳이었다. 증기기관차는 풍기역에서 물을 채워야 험준한 죽령을 넘을 수 있었다. 단양에서 넘어 온 기관차도 당연히 물을 보충해야 했다. 전국에서 가장 큰 50톤 물탱크가 세워진 이유다. 30m 높이의 급수탑 외벽은 황금색 인삼 그림이 장식하고 있다. 인삼의 고장답게 역 앞에 ‘풍기인삼시장’이 형성돼 있다.

풍기역 주차장의 전국 최대 규모 급수탑. 내부 전시실은 잠겨 있다.

풍기에서 부석사로 길을 잡고 931번 도로를 조금만 달리면 순흥 땅이다. 지금은 일개 면에 불과하지만, 순흥도호부는 한때 강원 영월ㆍ단양과 경북 예천까지 아우르던 행정의 중심이었다. 민가로서는 가장 호사스러운 아흔아홉 칸 저택이 수두룩했고, 이에 딸린 행랑채가 끝이 없어서 ‘줄행랑’이라는 말이 순흥에서 유래했다고 할 정도다. 체험 교육 시설인 ‘한국선비문화수련원’에 조양루를 비롯해 일부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순흥에서 소수서원을 지나칠 수 없다.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은 나라에서 책ㆍ토지ㆍ노비를 하사하고 조세와 병역까지 면제받은 서원이다. 개원 당시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이었으나,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 명종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려 이름을 바꿨다. ‘소수(紹修)'는 '무너진 교학을 닦는다’는 뜻으로 학문 부흥의 의지를 담고 있다. 순흥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지은 안축, 그의 동생 안보 등 순흥 안씨 3인과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을 배향하고 있다.

소수서원 초입의 솔숲.
소수서원 솔숲의 숙수사지 당간지주. 서원이 들어서기 전 절터임을 알 수 있다.
죽계천의 ‘경’자 바위. 단군 복위를 꾀하다 처형된 선비들의 피가 내를 이뤘다고 전해진다.

소수서원은 주변 풍광도 뛰어나다. 입구의 아늑한 솔숲을 통과하면 바닥까지 투명한 죽계천과 마주한다. 솔숲에서 내려다보면 맞은편 바위에 한자로 ‘백운동’과 붉은 글씨의 ‘경(敬)’자가 새겨져 있다. 죽계천은 단종 복위에 나섰다가 실패한 선비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주세붕이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경’자에 붉은 칠을 했다고 전해진다. ‘경’자 바위 옆 누대의 이름은 취한대(翠寒臺)다. ‘푸른 산과 차가운 물빛을 벗삼아 풍류에 취한다’는 의미로 비취처럼 맑은 수면에 비친 풍광이 그 뜻 그대로다. 산책로를 따라 죽계천을 거슬러 오르면 ‘소수박물관’과 ‘선비촌’으로 연결된다. 선비촌은 영주지역 고택을 재현해 놓은 민속마을이자 체험 시설로 고택 민박도 운영하고 있다.

죽계천과 취한대. 계천을 따라 선비촌까지 산책로가 나 있다.
소수서원 입구 솔숲이 죽계천에 비친 모습.
영주지역 고택을 재현한 선비촌. 민속마을이자 고택 민박으로 이용하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나와 도로를 건너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순흥으로 유배된 뒤 단종 복위를 꾀하다 처형당한 그의 제단 옆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복위 모의가 발각돼 순흥 주민들이 처형당한 정축지변(1457) 이후 죽었던 나무는 200여년이 지나고 금성대군이 복권된 숙종 9년(1682)에 다시 잎을 피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금성대군 신단의 비석과 은행나무. 정축지변 후 죽었다가 단종 복권 후 되살아났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순흥에서 단산면을 거쳐 소백산 중턱으로 천천히 차를 몰면 드디어 부석사다. 주차장에서 사찰까지는 대략 1km, 완만한 산길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계단이 시작된다. 꼭대기 무량수전까지 아홉 층계 108계단이다. 층계를 오를 때마다 전각도 산세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석사는 극락 세계를 상정해 설계했다고 한다. 공중에서 보면 ‘빛날 화(華)’자 형상으로 가람을 배치했다. 눈앞으로 쏟아질 듯 세로로 돌출된 범종각 건물은 유난히 웅장하게 보인다. 범종각에는 종 대신 커다란 법고와 목어가 매달려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창할 때 부석사 범종을 녹여 당백전을 만드는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종은 범종각에 들지 못하고 바로 옆 새 종각에 놓였다. 울림의 조화까지 감안해 범종각을 짓기 때문에 애초부터 새로 만든 종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세로로 돌출돼 실제보다 웅장해 보이는 부석사 범종각. 현재 종 대신 법고와 목어가 걸려 있다.
안양루 지붕 받침목 사이 공간이 부처의 형상처럼 보인다.
안양루로 오르는 계단. 층계를 오를 때마다 산과 전각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안양루를 통과해 석등 앞에 서면 그 사이로 무량수전 현판이 보인다.
무량수전 서편의 부석.
돌이 다시 뜨는 것을 막기 위해 ‘석(石)’자에 점을 하나 더 찍어 놓았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는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지붕 받침목 사이로 보이는 무량수전 벽면이 마치 부처가 가부좌를 튼 모습으로 보인다. 의도했든 아니든 5기의 불상을 품은 셈이다. 불교에서 ‘안양’은 극락의 다른 말이다. 19금을 넘나드는 풍자시의 대가 김삿갓도 이곳에서만큼은 진지한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를 남겼다.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죽기 3년 전 안양루에서 읊은 시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본 일몰. 바로 앞 건물이 안양루다.
무량수전 동편 삼층석탑에서 보는 일몰 풍경.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도 좋지만, 동편 삼층석탑 뒤에서 보는 일몰이 한층 멋있다. 미세먼지 때문에 노을은 희뿌옇고 능선은 아슴푸레하다. “댕~ 댕~” 어둠이 내리는 산사에 울리는 깊고 묵직한 종소리가 한 줌의 아쉬움마저 삼킨다.

영주=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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