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사람이었던 내 동생, 독자들도 그래서 위로받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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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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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문학관’ 명예관장 누나 기향도씨

[저작권 한국일보]기향도 기형도문학관 명예관장이 시인의 대표작 제목이 적힌 벽 앞에 서서 문학관의 구성에 대해 안내해 주고 있다. 배우한 기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타계한 기형도 시인의 가장 사랑 받는 시 중 하나인 ‘빈집’의 한 구절이다. 경기 광명시 ‘기형도 문학관’에는 이 ‘빈집’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까만 가벽에 뚫린 조그만 창 틈으로 바깥의 빛이 새어 들어오고, 시인의 유품인 시계가 멈춰진 시간을 일러준다. 그 공간 안에서, 방문객은 잠시나마 시인의 고독을 떠올려본다.

2017년 11월 개관한 ‘기형도 문학관’. 기형도의 시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가는 이 공간을 지키는 이는 누나인 기향도 명예관장이다. 4일 문학관에서 만난 기 관장은 7일 30주기를 앞두고 각종 행사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전시돼 있는 유품은 대개 시인 본인이 박스에 모아 두었던 것들이에요. 워낙 꼼꼼하고 치밀했던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의 노트를 모두 보관하고 있었어요. 동생이 간 뒤에도 어머니가 이사 다니시며 그걸 전부 끌고 다니셨어요. 그래서 문학관을 꾸릴 수 있었죠.”

[저작권 한국일보]경기 광명시 기형도 문학관에는 시인의 숨결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전시와 함께 독자들이 직접 시에 대한 생각을 남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배우한 기자


누나와 동생의 나이 차이는 일곱 살. 기형도가 어린 시절 누나 등에 업혀 어깨 너머로 배운 언어들이 오늘날 독자들이 사랑하는 시의 원천이 됐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 역시 ‘엄마 걱정’ ‘나리 나리 개나리’같은 시의 소재로 쓰였다. “동생은 위대한 시인인 것을 떠나서 참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동생으로도, 아들로도요. 시를 읽는 독자들도 괜찮은 사람인 동생으로부터 위로를 받으시는 게 아닐지요.”

너무 일찍 떠난 시인의 숨결을 느끼고 싶은 독자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져, 문학관 개관 1년 5개월 만에 관람객 2만 7,000명이 다녀갔다. “먼 지방에서 새벽 첫차를 타고 왔다는 분부터, 동생의 시를 보고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다는 분, 하도 여러 번 읽어 책이 너덜너덜해졌다는 분까지 있었어요.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오히려 유족으로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기형도의 생전 소원은 자신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전해지는 것이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그 소원이 이뤄진 건 슬픈 아이러니다. “문학이 덩그러니 혼자 있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시를 쓴 것은 동생이지만 시의 생명력은 앞으로도 시를 읽는 사람과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겠지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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