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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장씨 중에 홍자 돌림을 쓰는 곳은 어디인가요?
비공개 조회수 3,161 작성일2018.10.12

장씨 중에 이름 중간에 홍자 돌림을 사용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대략적으로라도 부탁드립니다.

또 저희 아버지는 균자 돌림을 사용하시는데 여기에 맞는 장씨가 있나요??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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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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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장씨 중에 이름 중간에 홍자 돌림을 사용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대략적으로라도 부탁드립니다.

또 저희 아버지는 균자 돌림을 사용하시는데 여기에 맞는 장씨가 있나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 님은 장씨 이시군요,

 

인동 장씨 함평파(咸平派)에 홍자가 속(屬)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항렬표 돌림자가 아닙니다.

 

부친님 : 균자 돌림이라 하셨고,

님은 : 홍자 돌림이시가요.

 

님의 글을 읽어보고 장씨 본관과 인동 장씨에 대하여 그 정보를 올려드리겠습니다.

 

족보를 소장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조부님 증조부님 고조부님의 제적등본을 발급 받아 보시면 본관과 존함 그리고사시던 연고지가 상세히 다 나옵니다. 이를 근거로 연고지를 찾아 가셔서 같이 사시던 일가친척을 찾아 문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제적등본을 발급 받아 보시고 제적등본에 나오는 윗대 어른들의 존함을 인동장씨 항렬표가 맞으시다면 아래 항렬표를 올려드릴테니 한렬표 돌림자가 일치한다면 님의 파입니다. 그러면 사시던 연고지를 가지 않으셔도 간단히 찾을 수가 있겠지요.

 

님은 장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장씨 본관과 인동 장씨에 대한 정보 입니다.

 

 

장씨(張氏)의 본관(本貫)

 

덕수 장씨(德水 張氏)와 절강 장씨(浙江 張氏)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張氏) 비조(鼻祖) () 도시조(都始祖) 모든 장씨(張氏)는 장정필(張貞弼) ()이다.

 

장씨(張氏)의 본관(本貫)은 문헌(文獻) 63개 본()이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현재(現在) 30본 미만(未滿)으로 추정(推定)된다.

 

그 중에서 덕수 장씨(德水 張氏)와 절강 장씨(浙江 張氏)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張氏)는 도시조(都始祖)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後孫)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장씨세보(安東張氏世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에 의하면 장정필(張貞弼)은 중국(中國) 절강성 출신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덕수장씨(德水張氏)는 뿌리를 회회계(回回系)에 두고 있으며,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譜) 고려사(高麗史)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덕수현(德水縣)에 살게된 원()나라 사람 장경(張卿:일명 장백창)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를 그의 부 백익의 1대로 하여 신라(新羅)시대(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현전하는 문헌(文獻)들과는 상충되는 바가 있어 이들을 '13세 별록'이라 하여 별도(別途)로 취급(取扱)하고 있다.

 

하여! 우리나라 장씨(張氏)는 덕수(德水)와 절강 장씨(浙江 張氏)를 제외한 인동(옥산), 안동, 순천, 구례, 봉성, 단양, 목천, 울진, 결성, 흥성(흥덕), 하산, 려흥, 부안 등 제장씨는 장정필(張貞弼)의 혈손(血孫)으로서 그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으나 각() 관계(關係)보간에 연대의 차이(差異)가 있으니 박고 정정함이 좋을 것으로 안다.

 

하나 다른 말씀 드리고 싶지만 너무 모르는 본관(本貫)이 많이 밑에 몇 대() 본관(本貫)의 시조(始祖)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인동 장씨(仁同 張氏)

시조 : 장금용(張金用)

仁同(인동)은 우리 仁同 張氏(인동 장씨) 始祖(시조)이신 三重大匡公神虎衛上將軍(삼중대광공신호위상장군) (諱金用(휘금용))府君(부군)께서 肇基(조기) 卜居(복거)하신 고을로 千有餘年(천유여년) 世居(세거)해온 祖上(조상)의 얼이 심어져 있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仁同 張氏(인동 장씨) 貫鄕(관향)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동 장씨는

2000년에는 총 184,863가구 591,31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 안동 장씨(安東 張氏)

 

시조(始祖) : 장길(張吉)

시조(始祖)의 초() ()는 길()이요 후()에 다른 나라에서 쓰던 이름으로 공()을 높이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정필(貞弼)이라 개명 하였다. 관직(官職)은 통합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統合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公信) 태사(太師) 충헌공(忠獻公)이시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동 장씨는

2000년에는 총 25,552가구 83,96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3. 흥성 장씨(興城 張氏)

 

시조(始祖) : 장청계(張淸溪)

始祖 中始祖, 派祖 (시조와 중시조, 파조)

선조(先祖) 중에는 시조(始祖)가 있고 또 중시조(中始祖)가 계신다. 시조(始祖)는 우리 흥성(興城) 씨족(氏族) 중 가장 윗 선조(先祖)를 말한다. 현재(現在) 전국(全國)에 살고 있는 흥성(興城) 장씨(張氏)는 모두 시조(始祖)의 후손(後孫)들인 것이다.

시조(始祖) ()는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歷任)한 분으로 자()는 청계(淸溪)이시다.

중국어(中國語)에 매우 능통(能通)하여 항상 중국(中國) 사신(使臣)을 맞이하여 외교(外交)를 담당하시었다.

그의 아들이신 연우(延祐)께서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공신(功臣)으로 호부(戶部) 상서(尙書, 현재의 재무부 장관)를 역임(歷任)하였고 돌아가신 후() 나라에서는 충숙공(忠肅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흥성 장씨(興城 張氏)

2000년에는 총 14,023가구 44,70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 단양 장씨(丹陽 張氏)

 

시조(始祖) : 장순익(張順翼)

시조(始祖) 순익(順翼)은 도시조 정필(貞弼)의 현손(玄孫)으로, 고려(高麗)에서 시랑을 역임한 지현의 세째 아들이다.

그가 고려조(高麗朝)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지내고 단양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순익(順翼)의 아들 3형제(兄弟) () 맏아들 재일이 상장군(上將軍)을 지냈고, 차남(次男) 유일은 시랑(侍郞)을 역임(歷任)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人口調査)에 의하면 단양 장씨(丹陽 張氏)의 인구수(人口數)는 약33.000여명,

 

 

5. 결성 장씨(結城 張氏),

 

시조(始祖) : 장사(張楒)

결성 장씨(結城 張氏) 350여년 전()부터 세거(世居)하기 시작(始作)했다.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 장사(張楒) 18세손(世孫)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장씨 8(八貫)의 족보(族譜) 10년간에 편찬(編纂)한 장취오(張聚五, 1684~1770)가 그의 부친(父親)인 절충장군 장시서(張時瑞, 1653~1706)의 묘()를 쓰고 서울에 살았다. 그후() 취오의 장손(長孫) 장이검(張履儉)이 광주에서 3대를 살다가 충청도(忠淸道)로 이주(移住)하였다.

통계청의 인구조사(人口調査)에 의하면 결성 장씨는

2000년에는 총 6,708가구 21,06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6. 덕수 장씨(德水 張氏)

 

덕수 장씨(德水 張氏) 시조(始祖) 장백창(張伯昌, 일명 장순용(張舜龍:일명 ), 시호는 공숙)은 아랍(이슬람)계 사람으로 원()나라 세조(世祖)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1275(고려 충렬왕 1)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덕수현(德水縣)에 살면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고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덕수현(德水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았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덕수 장씨는

2000년에는 총 6,531가구 21,00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7. 울진 장씨(蔚珍 張氏)

 

시조(始祖) : 말익(末翼)

강원도(江原道) 울진(蔚珍)은 본래 우진야현(于珍也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때에 경덕왕(景德王)이 울진(蔚珍)으로 개칭(改稱)하여 군()으로 삼았으며, 고려(高麗) 때 강등(降等)하여 현()을 만들어 영()을 두었다. 고종 32(서기 1895)에 군()으로 고쳤다.

울진 장씨(蔚珍 張氏) 족보(族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말익(末翼)은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 5세손으로 고려(高麗) 정종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고, 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 상주국으로 울진부원군(蔚珍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울진(蔚珍)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천일(天鎰)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하여 추밀직하사(樞密直學士)를 지냈으며, 천일(天鎰)의 아들 원흡(元洽)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말익(末翼) 8세손 양수(良手)는 희종(熙宗)때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歷任)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선조(先祖) 16(서기1583)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158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울진 장씨는

2000년에는 총 6,664가구 20,79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8. 거창 장씨(居昌 章氏)

 

시조(始祖) : 장종행(章宗行)

본관은 거창(居昌)과 보성(寶城) 2본이 전()해지나 사실상 거창장씨(居昌 章氏) 단본(單本)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장씨(居昌 章氏)의 시조(始祖) 장종행(章宗行:忠獻公)은 원래 송()나라 건주(建州) 사람으로 700여 년 전에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였는데, 충렬왕(忠烈王)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예문관대제학 겸 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兼春秋館事)를 지냈고 안향(安珦)의 사위로 장씨보(章氏譜)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의 아들 두민(斗民)은 충숙왕(忠肅王) 때 광정대부 판삼사사(匡靖大夫判三司事)를 지냈으며,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에 갈 때 배행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아림군(我林君)이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恭讓王) 때 돈령부부정(敦寧府副正)을 지낸 삼장(參莊)이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군 화면(火面:熊陽面)으로 퇴거함으로써 거창(居昌)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현재(現在) 장씨(章氏)는 대부분(大部分) 경남(慶南) 거창군(居昌郡)과 함양군에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거창 장씨는

2000년에는 총 1,751가구 5,55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9. 옥구 장씨(沃溝 張氏) :

 

시조(始祖) : 장익(張榏)

옥구(沃溝)는 전라북도(全羅北道) 북서부(北西部)에 있는 지명(地名)이다. 본래(本來) 백제(百濟)의 마서량현이었으며 통일(統一)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구(沃溝)로 고쳐서 임피에 속()하게 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에 군산(群山)창이 되면서 옥구현(沃溝顯)이 되었다.

옥구장씨(沃溝張氏)는 도시조 장정필(張貞弼) 14세손인 장익(張榏)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는 고려(高麗)에서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歷任)하였으며 옥성(옥구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正確)한 계대(繼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다만 그의 후손(後孫)으로 판도판서를 역임(歷任)한 장송을 1세조(世祖)로 하고 옥구(沃溝)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후손(後孫) 가운데 장송의 손자(孫子) 장화가 고려(高麗)에서 판도판서를 지냈고, 장화의 아들 장대유가 부사를 역임(歷任)했다. 장대유의 아들 장한이 판서를, 장윤이 참의를 역임(歷任)하여 아버지와 함께 가문(家門)을 중흥(中興)시켰다.

군수를 지낸 장승조와 현감 장현손도 옥구장씨(沃溝張氏) 후손(後孫)이다. 어모장군을 지낸 장희와 장순명을 비롯 효자로 이름난 장만건, 장만준과 학자 장만웅, 현감 장위한도 가문(家門)을 빛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옥구 장씨는 2000년 현재는 5,708명이 있다.

 

 

10. 구례(봉성) 장씨(求禮(鳳城) 張氏).

 

시조 : 장악(張岳) 

시조 장악(張岳, 시호(諡號)는 양간)은 장정필(張貞弼) 21세손(世孫)이다. 그는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며 왕()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나이 70에 고향(故鄕)을 생각하고 근심이 가득하자 왕()이 봉성군(鳳城君)에 봉()하고 봉성(鳳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하였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구례(求禮)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 장악(張岳)의 묘소(墓所)는 전남(全南) 구례군(求禮郡) 백운동에 있다.

 

<인구> 구례장씨 10,670, 봉성 장씨 760명이 있다.(1985)

 

 

인동 장씨(仁同 張氏)에 대()하여

 

1. 인동 장씨(仁同 張氏) 시조(始祖) : 장금용(張金用)

2. 인동 장씨(仁同 張氏) 유래(由來) :

 

인동 장씨(仁同 張氏)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장금용(張金用)은 장정필(張貞弼)의 후손(後孫)으로 전()하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정확(正確)한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는 고려(高麗)때 삼중대광(三重大匡신호위(神號衛) 상장군(上將軍)을 역임(歷任)했고, 아들 선이 1072(고려 문종 26) 금오위(金吾衛)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후손(後孫)들이 옥산(玉山)에 정착(定着) 세거(世居)하며 지명(地名)을 따라 본관(本貫)을 옥산(玉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옥산(玉山)이 인동(仁同)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인동(仁同)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시조(始祖) 장금용(張金用)을 기일세로 하여 여러 파()로 분류(分類)하고 있으나 경북(慶北) 인동(仁同) 본향(本鄕)에는 황상, 진평, 진가, 남산, 경파(硬派) () 다섯 파()의 자손(子孫)들이 집중(執中) 세거(世居)하고 있어 대체(大體)로 이 다섯 파()가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다.

 

 

3. 인동 장씨(仁同 張氏) 가문(家門)의 대표적(代表的)

 

가문(家門)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장금용(張金用)의 증손(曾孫)인 국신이 봉정대부, 내사령, 직사관을 역임(歷任)하여 검교군기감사를 지낸 후손(後孫) 위와 함께 가문(家門)을 빛냈다.충렬왕(忠烈王)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歷任)한 계()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길이 뛰어났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벼슬을 던지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두문동에 은거(隱居)한 안세와 태조(太祖)가 한성부(漢城府) 좌윤의 벼슬을 제수하고 회유했으나 절의를 지켜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은거(隱居) 생활(生活)로 일생(一生)을 마친 중양은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자랑하는 절신(絶信)들이다.

1485(성종 16)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순손은 군수 중지의 아들로 정언, 판관 등을 지내고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編纂)에 참여한 후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앞서 직간을 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탄핵을 받아 원방에 부처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당시 훈구파의 김안로와 함께 조광조(趙光祖) 일파인 신진사류를 축출(逐出)하려던 혐의로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후 1533(중종 28)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한편 연복군에 봉해진 말손은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성종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해주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1 3의사"로 일컬어진 봉한 홍한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모두 의병(義兵)으로 활약(活躍)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함께 전사(戰死)한여 성주의 이양사에 제향되었다.

조선조(朝鮮朝)의 문신(文臣)이며 학자(學者)로도 유명(有名)한 현광은 선조(先祖) 때 학문(學文)과 덕행으로 천거(薦擧)되어 보은현감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전후(前後) 20여 차례 벼슬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모두 사퇴(辭退)하고 오로지 학문(學文)에만 전념(專念)했다.그 후 인조(仁祖)의 부름을 받아 정치(政治)에 대()한 많은 조언(助言)을 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각 주, 군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을 일으켰다.그는 학문(學文)에 있어서 덕은 도의 지선한 것이라고 논()하고, 이기설에 있어서는 이율곡(李栗谷)의 학설에 찬동하여 당대(當代)의 대표적(代表的)인 성리학(性理學)자로 추앙(推仰)받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는, 인동(仁同)의 동락서원과 선산의 여헌영당 등 여러 사우에 제향 되었다.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올라 숙종(肅宗) 때 우승지와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낸 응일은 현광의 아들 (양자)로 성품이 청렴(淸廉)강직(强直)하여 이름났고, 경우(境遇)는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영남(嶺南) 유생(儒生)들과 이이첨(李爾瞻) 등을 탄핵(彈劾)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벼슬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文)에만 전념(專念)했다.

용상의 아들인 지연은 경북(慶北) 상주(尙州) 출신(出身)으로 고종(高宗) 때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의병(義兵)의 궐기(蹶起)를 호소(呼訴)하는 격문(格文)을 각처(各處)에 보내는 구국(救國)운동(運動)에 앞장섰고, 진주(晋州)에서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주필이 되어 매천 황현의 국치(國恥)를 통분(痛憤)한 절명시를 게재했다가 폐간(廢刊) 당하자 실의 끝에 사망(死亡)했다.이렇게 선조(先祖)들의 빛난 위업을 받들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逮捕)되어 대구(大邱)의 감옥(監獄)에서 자결(自決)한 진홍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을 비분(悲憤)하여 단식(單式) 끝에 순절(殉節)한 기석, 독립운동(獨立運動)가인 승언 등이 명문(名文)의 대()를 이었으며,

대한민국(大韓民國) 부통령(副統領)을 지낸 장면과 2대에서 5대까지 국회의원(國會議員)에 당선(當選)되고, 국회(國會) 부의장(副議長)을 역임(歷任)한 장택상, 그리고 부총리(副總理)를 지내고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장 등을 역임(歷任)하며, 언론(言論), 정치(政治), 국민(國民) 보건(保健)에 공헌(貢獻)한 기영 등도 명문(名文) 인동 장씨(仁同 張氏)를 빛낸 자랑스런 후손(後孫)들이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본관(本貫)은 같으나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계()가 있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 장금용(張金用) ()

 

시조(始祖) 장금용(張金用)은 고려(高麗) 때 상장군을 지냈다.

 

후손(後孫)들이 인동(仁同)에 살면서 본관(本貫)을 인동(仁同)으로 삼았다. 인동(仁同)은 경북(慶北) 구미시 인동동(仁同洞)의 지명(地名)이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후손(後孫)이 번창(繁昌)하면서 결성, 울진 등 여러 본관(本貫)으로 갈라진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의 대표적(代表的)인 집성촌(集成村)은 인동 장씨(仁同 張氏) 천년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경북(慶北) 구미시 인동동(仁同洞)을 꼽는다.

시조(始祖) 장금용(張金用)이 고려초(高麗初)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8대를 내려오면서 한 때는 인근에 2천여호가 살았다.

학문에서 인동 장씨(仁同 張氏)를 대표(代表)하는 인물(人物)은 조선조(朝鮮朝) 중엽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장두광이다.

그는 선조(先祖) 28년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으로 천거(薦擧)되어 보은현감이 됐으나 곧 물러났다.

그 뒤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헌(大司憲) 등 벼슬로 20여 차례나 조정에서 부르는데도 나아가지 않고 인동(仁同) 향리에 묻혀 성리학(性理學) 연구(硏究)에 몰두했다.

율곡(栗谷)과 퇴계와는 또 다른 독자적(獨自的) 성리학설(性理學說)로 최근(最近) 국내(國內) 학계(學界)는 물론 일본(日本), 중국(中國)에서도 연구(硏究)되고 있다.

한말에 우뚝 선 인물(人物)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사설로 잘 알려진 위암 장지연이다.

위암은 고종 31(1894) 진사시에 합격한다. 다음해 을미사변 때 민비가 살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보냈다.

위암이 언론(言論)에 투신(投身)한 것은 비교적(比較的) 늦은 36세가 되던 1899년으로 격일간지 시사총보가 시발점이다.

이어 황성신문사의 주필(主筆)로 항일구국(抗日救國)의 필봉을 휘두르다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社長)에 취임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자 황성신문에 그 유명(有名)한 사설을 써서 일본인(日本人)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일로 위암은 일본(日本) 관헌(官憲)에 체포(逮捕) 3개월간 투옥(投獄)되었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 장계(張桂) ()

 

시조(始祖) 장계(張桂)는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등과(登科)하여 예문관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을 지냈으며 인동군(仁同)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인동(仁同)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장말손은 세조(世祖) 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을 지냈으며 세조(世祖) 11년에는 여진족(女眞族)을 격퇴(擊退)시켰다. 세조(世祖) 12년 이시애(李施愛)가 길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강순, 남이와 함께 이를 평정했다.

 

 

4. 인동 장씨(仁同 張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동정공파(同正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연복군파(延福君派)

문숙공파(文肅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용천파(龍川派)

구성파(龜城派)

연기파(燕岐派)

 

- 장금용계 종파 청주파 울진파 양양파 초계파 진평파 의흥파 진가파 영덕파 남산파 금구파 고흥파 경파 감무공파 안청파 영광파 함평파 흥해파 화순파

 

- 장계계 동정공파 주부공파 연복군파 문숙공파 승지공파 부사공파 판관공파 용천파 구성파 연기파

 

직제학계의 계파는?

 

동정공파, 안양공파, 주부공파, 판관공파, 승지공파, 부사공파, 송암공파(영월공파), 군수공파, 연복군파 등등 입니다.

 

 

인동 장씨는 두개의 계통이 아니라.

 

상장군계, 직제학계, 문숙공계, 장연좌계, 장수면계, 예빈경계

 

6계열로 나뉘어져있고 현재 상장군계와 직제학계만 찾아볼 수 있고 나머지계열은 자료가 안나와 있습니다.

   

 

인동 장씨<장계계>(仁同 張氏<張桂系>).

 

시조 장 계(張 桂) 1305(충렬왕 31)국학진사. 권지도평의 녹사. 동 진사에 급제하여 진현전 직제학을 거쳐 금자광록대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고 옥산군(옥산은 인동의 별호)에 봉해졌다.

 

그는 도시조 장정필의 14세손으로 인동현의 남쪽 발영전에 세거지를 마련했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인동(仁同)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칠곡군 석적면 성곡동 발영전에 있다.

 

주요 파계로는 6세 장안량(張安良)의 아들 형제 대에서,

 

동정공<선손>(同正公<善孫>),

주부공<경손>(主簿公<敬孫>),

안양공<말손>(安襄公<末孫>),

문숙공<순손>(文肅公<順孫>),

승지공<종손>(承旨公<終孫>)로 갈라지고,

장안량의 아우 장안식(張安式)의 아들 형제가,

부사공<이화>(府事公<以和>),

판관공<의손>(判官公<義孫>)로 갈린다.

그 외에 용성파, 연기파, 귀성파 등이 있다.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계 인동 장씨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을 역임한 장금용(張金用)이며 그의 아들인 장선(張善) 1072(고려 문종 26) 금오위 상장군(金吾衛 上將軍)에 올라 후손(後孫)들이 옥산(玉山)에 정착하여 본관(本貫)을 옥산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에 옥산이 인동(仁同)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을 관향(貫鄕)으로 삼았으나 일부는 옥산을 본관으로 고집하며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 옥산 장씨는 상장군계 인동 장씨와 같은 집안이다.

 

분파(分派)대동보(大同譜)에는 27개 분파가 있었으나 안주파(安州派)는 북한(北韓)에 거주(居住)하는 관계(關係)로 거황(居況)을 알 수 없고 성주파(城州派)는 세대(世代)가 끊어졌다고 하여 현재(現在) 25개 분파(分派)만 전해온다.

 

종파(宗派) : 시조(始祖) 장금용(張金用)의 직계(直系) 후손(後孫)으로 중리파(中里派)라고도 한다.

 

남산파(南山派) : 15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우(張俁) 조선(朝鮮)()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천진병마첨절제사행현감(泗川鎭兵馬僉節制使行縣監) 역임(歷任)

 

진가파(眞佳派) : 1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맹창(張孟倡) 조선초(朝鮮初)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 역임(歷任)

 

진평파(眞坪派) : 17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신손(張信孫) 조선(朝鮮) 중종(中宗) 2(1507) 진사(進士) 입격(入格)

 

황상파(凰顙派) : 18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잠(張潛) 조선(朝鮮) 중종(中宗) 진사(進士) 입격(入格)

함평파(咸平派) : 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백림(張百林) 고려조(高麗朝)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歷任)

 

흥해파(興海派) : 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세규(張世圭) 고려조(高麗朝)에 직장영동정(直長令同正) 역임(歷任)

 

화순파(和順派) : 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세재(張世榟) 고려조(高麗朝)에 우교위(右校尉) 역임(歷任)

청안파(淸安派) : 9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인계(張仁溪) 고려조(高麗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역임(歷任)

 

영광파(靈光派) : 9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인연(張仁璉) 고려조(高麗朝)에 소윤(少尹) 역임(歷任)

 

청주파(淸州派) : 10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득선(張得宣)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때 사순위중랑장(司巡衛中郞將) 역임(歷任), 원명군(元明軍)의 침입(侵入)을 막아 싸우다 순국(殉國)한 공()으로 충숙왕(忠肅王)이 평장사(平章事)로 증직(贈職)하고 기성군(箕城君)에 봉()하였다.

 

가평파(加平派) : 11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게(張垍) 고려조(高麗朝)에 감무(監務) 역임(歷任), 장계의 관직명(官職名)을 인용(認容)하여 감무공파(監務公派)라고도 한다.

 

경파(京派) : 13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백(張伯) 고려말(高麗末)에 태상경(太常卿) 역임(歷任), 장백의 관직명(官職名)을 인용(認容)하여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라고도 한다.

 

고흥파(高興派) : 13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중일(張仲日) 고려말 내사(內寺)를 역임(歷任)하고 조선초(朝鮮初) 한림(翰林)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금구파(金溝派) : 14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기건(張紀乾) 조선조(朝鮮朝) 진안현감(鎭安縣監) 역임(歷任)

 

의흥파(義興派) : 1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맹우(張孟佑) 조선조(朝鮮朝) 선무랑(宣務郞) 역임(歷任)

 

영덕파(盈德派) : 1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맹선(張孟善)

 

양월파(良月派) : 1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맹순(張孟洵) 조선조(朝鮮朝) 예빈사(禮賓寺) 참봉(參奉) 역임(歷任)

 

안성파(安城派) : 16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맹희(張孟僖) 조선조(朝鮮朝) 금화서(禁火署) 별좌(別坐) 역임(歷任)

 

양양파(襄陽派) : 17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달손(張達孫) 조선조(朝鮮朝) 훈도(訓導) 역임(歷任)

 

초계파(草溪派) : 17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지손(張智孫) 조선조(朝鮮朝)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역임(歷任)

 

양주파(楊州派) : 17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석손(張碩孫) 조선조 도사(都事) 역임, 通政大夫(통정대부) 左通禮(좌통례)로 증직(贈職)

 

호명파(虎鳴派) : 18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도(張濤)

 

울진파(蔚珍派) : 18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연(張演)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

 

무안파(務安派) : 18세 분파(分派), 중시조(中始祖) 장부개(張傅凱) 조선(朝鮮) 성종때 헌납(獻納), 보국숭록대부영돈영부사(輔國崇錄大夫領敦寧府事) 역임

 

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계 인동 장씨 충렬왕(忠烈王) 31(1305) 국자진사(國子進士)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에 등과(登科)하여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옥산공(玉山公)에 봉해졌던 장계(張桂)를 시조(始祖)로 삼아 인동현(仁同縣) 발영전(拔英田)에 전거(奠居)하였다. 조선초(朝鮮初) 5개 파로 분파(分派)되어 임지(任地)에 따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榮州), 예천(醴泉), 문경(聞慶)과 충청북도(忠淸北道) 단양 지역(丹陽地域)으로 옮겨 살았다.

 

분파(分派)송암공파(松菴公派): 중시조(中始祖) 장구주(張九疇)이며 장계(張桂) 10세손으로 강원도(江原道)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역임(歷任)하였으며 송암공파, 영월파, 군수공파라고 불리나 충북(忠北) 제천시 청풍면(淸風面) 고명산에서 말년(末年)을 보냈다고 청풍파(淸風派)로도 불린다.

 

판관공파(判官公派) : 중시조(中始祖)는 장의손(張義孫)으로 장계(張桂) 7세손으로 판관(判官) 역임(歷任).

 

안양공파(安襄公派) : 중시조(中始祖)는 장말손(張末孫)이며 장안량(張安良)의 삼남으로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짐.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승문원 박사(承文院 博士),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쳐 함길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내다 1465년 여진족(女眞族)을 격퇴(擊退)한 공()으로 예조좌랑(禮曺佐郞) 경차관(敬差官)이 되었다. 1467(세조 13) 조석문(曺錫文) 등과 함께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고 내첨시첨정에 올랐다. 1470(성종 1) 장악원 부정, 장악원정을 거쳐 해주 목사를 지내고 1482년 연복군(延福君 : 연복은 인동의 별호)에 봉()해졌다.

 

주부공파(主簿公派) : 중시조(中始祖)는 장경손(張敬孫)으로 장계(張桂) 7세손(世孫) 장안량의 차남, 사재감 주부(司宰監 注簿)를 역임(歷任).

 

동정공파(同正公派) : 중시조(中始祖)는 장선손(張善孫)으로 장계(張桂) 7세손(世孫) 장안량의 장남(長男), 승훈랑(承訓郞)으로 의정부(議政府) 첨서와 녹사(錄事)를 역임.

문충공(文忠公) 장계임(張繼任)계 인동 장씨 문숙공(文肅公) 장순손(張順孫))고려 충렬왕(忠烈王)때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歷任)하고 후에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정승(政丞), 춘추관사(春秋舘事)의 증직(贈職)이 내린 문충공(文忠公) 장계임(張繼任)을 시조(始祖)로 하는데 이는 문충공(文忠公) 8세손(世孫) 문숙공(文肅公) 장순손(張順孫)이 중종 17(1522) 병조판서(兵曹判書)때 그 아버지 증좌찬성(贈左贊成) 장중지(張重智)와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고씨의 묘비문(墓碑文)에 첫 선조(先祖)로 기록(記錄)한 것에서 유래(由來)한다.

 

분파(分派)선파(僐派) 또는 생원파(生員派) : 중시조(中始祖) 장선(張僐) 고려(高麗)때 생원(生員)이다.

국로파(國老派)

 

종손파(終孫派) 또는 도정승지공파(都政丞旨公派) : 중시조(中始祖) 장종손(張終孫)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좌승지(左承旨)를 역임(歷任)

 

경량파(景良派) 또는 증좌승지공파(贈左承旨公派) : 중시조(中始祖) 장경량(張景良) 조선조에 음보(蔭補)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

 

경안파(景安派) 또는 증이조판서공파(贈吏曹判書公派) : 중시조(中始祖) 장경안(張景安) 조선조(朝鮮朝)에 음직(蔭職)으로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오르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경복파(景福派) 또는 문장영공파 : 중시조(中始祖) 장경복(張景福) 조선조(朝鮮朝)에 음직(蔭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歷任) 계지파(季智派)

 

사신파(士新派) 또는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 중시조(中始祖) 장사신(張士新) 가선행룡양위부사직(嘉善行龍驤衛副司直)

 

만선파(萬善派) 또는 통정대부공파(通政大夫公派) : 중시조(中始祖) 장만선(張萬善) 통정대부(通政大夫)

 

안동 장씨(安東 張氏) 장수명(張壽命)계 안동 장씨(安東 張氏)계의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장태사(張太師)의 장손(長孫) 장금선(張錦善)의 후손(後孫) 장수명(張壽命)계로 본관(本貫)을 안동(安東)과 인동(仁同)으로 쓰는데 함경도(咸鏡道)의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북청 지방(北靑地方)에 사는 장씨(張氏)는 옥산 장씨(玉山 張氏)로 족보(族譜)를 해오다가 뒤에 인동(仁同)으로 개관(改貫)하였다.

 

흥성 장씨(興城 張氏) 장연좌(張延佐)계 인동 장씨 흥성장씨(興城張氏) 시조(始祖)인 시랑(侍郞) 장유(張儒)의 둘째아들 호부상서(戶部尙書) 장연좌(張延佐) 계의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장연좌(張延佐)가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하여 옥산 장씨(玉山 張氏)라 하다가 관적(貫籍)을 인동(仁同)으로 하였다고 한다. 흥성 장씨(興城 張氏)와 족보(族譜)를 같이하고 있다.

 

예빈경(禮賓卿) 장용서(張龍瑞)계 인동장씨고려말(高麗末) 예빈경(禮賓卿) 장용서(張龍瑞=혹은 用瑞)()의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과거(過去) 장연(張淵)이라고도 하고 주로 북한(北韓)의 평안도(平安道)에 많이 살았는데 8.15 해방후(解放後) 월남(越南)하였으며 본관(本貫)을 옥산(玉山)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인동(仁同)으로 많이 쓴다.

 

인동 장씨 유명인(有名人)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유명(有名) 인물(人物)로는 인조(仁祖) 때 팔도도원수 및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歷任)했으며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일등공신에 책록되었던 장만(張晩)은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지략으로 북변방어와 신흥 청국세력에 대한 정치와 외교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증산 현령으로 공을 세워 옥산군에 봉해졌던 장돈(張暾)은 병자호란 때 안주성에서 좌영장(左營將)개천군수로서 호병(胡兵)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돈령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장사진(張士珍)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군위에서 왜군(倭軍)과 싸우다가 한쪽 팔을 잘렸으나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절하여, 성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했던 장봉한(張鳳翰), 상주 판관으로 전사한 장홍한(張鴻翰) 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덕령부윤 장안세(張安世)의 후손(後孫)으로서 대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퇴계 이황 선생의 학맥(學脈)이자 한강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門人)이자 조카 사위이다.

 

문강공 여헌 장현광 선생은 1595(선조 28) 학행으로 천거되어 나이 42세에 보은현감이 되었는데 약 21일간 관직에 있다가 사임하고 물러난 후 형조좌랑, 순천 郡守, 이조참판, 대사헌, 공조판서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직 독서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인좌의 난에 훈공을 세우고 훈련대장을 역임한 장붕익(張鵬翼)과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장태소(張泰紹), 숙종 때 우승지와 대사간을 거쳐 부제학을 지내고 명신으로 이름났던 장응일(張應一), 병자호란 때 인동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장경우(張慶遇), 형조판서에 올랐던 장석룡(張錫龍) 등이 유명했다.

 

구한말에 와서는 장태수(張泰秀)가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비분단식(悲憤斷食) 끝에 순국하여 이름을 떨쳤고, 근대에 와서는 대한매일신보주필을 지낸 장지연(張志淵)과 국문학자(國文學者) 장지영(張志暎), 민주당을 조직하여 부통령(副統領)에 당선(當選)되었던 운석 장면(張勉)이 대표적(代表的)이고, 조국광복(祖國光復) 운동(運動)을 주도했고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지냈던 창랑 장택상(張澤相) 등이 인동 장씨를 더욱 빛냈다

 

현대의 유명인물로는 연예계로는 배우 장근석, 가수 장윤정, 장우혁, 2PM의 장우영, 인피니트의 장동우 등이 있고, 운동선수로는 역도선수 장미란이 있다.

 

 

5. 인동 장씨(仁同 張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성곡동·중동

- 경상북도 금릉군 대덕면 연화리

- 경상북도 영풍군 평은면 금광리

-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고예리

-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동양동·원송동

- 평안북도 박천군 청용면 대화동

- 평안북도 귀성군 방현면 변산동

 

 

6. 인동 장씨(仁同 張氏) 인물(人物)

 

장금용(張金用)

인동 장씨(仁同 張氏)의 시조(始祖)로 모시는 高麗(고려) 開國初(개국초) 柱石之臣(주석지신)이다. 三重大匡(삼중대광) 神虎衛(신호위) 上將軍(상장군)을 역임하였으며. 遺墟址(유허지) 仁同(인동) 玉溪祠(옥계사)를 세워 每年(매년) 淸明日(청명일) 祭享(제향) 하고 있다. 境內(경내)에는 遺墟碑(유허비)가 있다. 神虎衛(신호위) 高麗(고려) 中央軍(중앙군)으로 國防(국방)을 담당한 2()6()의 하나로 保勝(보승)5() 精勇(정용)2 ()으로 組織(조직) 되었으며 () 正規軍(정규군) 1.000()이다. 核心衛(핵심위)로서 首都(수도) 開京(개경) 守備(수비)와 아울러 國境(국경) 防衛(방위) 任務(임무)를 맡았으며 上將軍(상장군) ()3()으로 2() 6() 最高 司令官(사령관)으로 軍士(군사) 統率(통솔) 하였다.

 

장석규(張奭圭)

() 而靜(이정), 紀乾(기건) (), 進士(진사) 榮肅(영숙) (), 高宗(고종)31年甲午(년갑오)(1894) 式年進士試(식년진사시) 入格(입격)하였다.

 

장복규(張復圭)

() 公三(공삼), () 鶴雲(학운), 紀乾(기건) (), 生員(생원) 榮國(영국) (), 高宗(고종)22年乙酉(년을유)(1885) 增廣生員試壯元(증광생원시장원) 入格(입격)하고 宮內府主事(궁내부주사), 昌平郡守(창평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장영택(張榮澤)

() 文敬(문경), () 風軒(풍헌), 紀乾(기건) (), 副卿泰秀(부경태수) (), 光武辛丑年(광무신축년)(1901) 齊陵(제능)參奉 除授(제수)된후 蒙恩(몽은)으로 承訓郞(승훈랑) 陞敍(승서)되었다.

 

장영순(張榮淳)

() 公彬(공빈),() 後素(후소), 紀乾(기건) (), 鶴川鼎秀(학천정수) (), 光武辛丑年(광무신축년)(1901) 昌陵參奉(창능참봉) 除授(제수)된후 通政(통정)에 올라 秘書丞(비서승), 奉常寺副提學(봉상사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장동수(張東秀)

() 方勳(방훈), 紀乾(기건) (), 士人漢洛(사인한락) (), 通政大夫(통정대부)에 올라 秘書監丞(비서감승)을 역임하였다.

 

장겸수(張謙秀)

() 聖益(성익), () 雲坡(운파), 紀乾(기건) (), 僉中樞(첨중추) 漢斗(한두) (), 蔭職(음직)으로 繕工監假監役(선공감가감역),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등을 거쳐 通政大夫(통정대부)에 올라 中樞院議官(중추원의관)을 역임하였다.

 

장영수(張榮玉)

() 寶璟(보경), () 海史(해사), 紀乾(기건) (), 梅軒有秀(매헌유수) (), 生父鼎秀(생부정수), 高宗(고종)25年戊子(년무자)(1888) 增廣進士試(증광진사시) 入格(입격)하고 通政大夫(통정대부) 秘書監丞(비서감승)을 역임하였다.

 

장영직(張榮稷)

() 舜命(순명), () 敦菴(돈암), 紀乾(기건) (), 鶴川(학천) 鼎秀(정수) (), 高宗(고종)22()(1885) 文科(문과) 及第(급제)하여 承文院(승문원) 副正字(부정자), 副司果(부사과), 成均館典籍(성균관전적)(通訓(통훈)), 司諫院正言(사간원정언),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 通禮(통례), 司藝(사예), 弘文館侍讀(홍문관시독)등을 역임하였다.

 

장영덕(張榮德)

() 潤之(윤지), () 湖隱(호은), 紀乾(기건) (), 鶴川鼎秀(학천정수) (), 高宗(고종)17年庚辰(년경진)(1880) 增廣生員試(증광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장영국(張榮國)

() 景觀(경관), () 九溪(구계), 紀乾(기건) (), 鶴川(학천) 鼎秀(정수) (), 高宗(고종)11年甲戌(년갑술)(1874) 增廣生員試(증광생원시) 入格(입격)하였고 珍山郡守(진산군수), 通政大夫鎭安郡守(통정대부진안군수) 등을 역임하고 嘉善大夫(가선대부) 陞敍(승서)되었다.

 

장영숙(張榮肅)

() 若雨(약우), () 志湖(지호), 紀乾(기건) (), 生員觀秀(생원관수) (), 高宗(고종)7年庚午(년경오)(1870) 式年進士試(식년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장관수(張觀秀)

() () , () 松磵(송간), 紀乾(기건) (), 無憂翁漢房(무우옹한방) (), 生父(생부) 漢斗(한두), 高宗(고종)4年丁卯(년정묘)(1867) 式年生員試(식년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孝行(효행)이 지극하였다.

 

장복수(張復秀)

() 聖有(성유), () 竹軒(죽헌), 紀乾(기건) (), 生員(생원) 漢奎(한규) (), 高宗(고종)2年乙丑(년을축)(1865) 式年進士試(식년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장한두(張漢斗)

() 士吉(사길), () 三秀軒(삼수헌), 紀乾(기건) (), 杏齋錫輔(행재석보) (), 哲宗(철종)9年戊午(년무오)(1858) 式年生員試(식년생원시)에 입격하고,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內部協辦(내부협판)(嘉善(가선)) 贈職(증직)되었다.

 

장한규(張漢奎)

() 乃瑞(내서), () 海樵(해초), 紀乾(기건) (), 杏齋錫輔(행재석보) (), 憲宗(헌종)14年戊申(년무신)(1848) 增廣生員試(증광생원시) 入格(입격)하고 通政大夫中樞府事(통정대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장한진(張漢軫)

() 孝必(효필), () 三秀軒(삼수헌), 紀乾(기건) (), 杏齋錫輔(행재석보) (), 憲宗元年乙未(헌종원년을미)(1835) 增廣進士試(증광진사시) 入格(입격)하여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 敦寧府都正(돈령부도정)을 역임하였다.

 

장진유(張鎭維)

() 定甫(정보), () 玄岩(현암), 孝誠(효성) 出天(출천)하여 祖母憂(조모우) 斷指(단지) 注血(주혈)하고 母病(모병) () ()이 칼을 감추니 손가락를 깨물어 注血(주혈)하고 居憂盡禮(거우진례) 奉祀克敬(봉사극경) 杜門讀書(두문독서)하 여 以孝行學業(이효행학업)으로 累登鄕貢(루등향공)하였다. 事實(사실) 金溝邑誌(금구읍지)에 실려있다.

 

장부흥(張復興)

() 子纓(자영), 紀乾(기건) (), 乙世(을세) (), 掌樂院主簿(장악원주부)를 역임하였으며 嘉善大夫(가선대부) 贈職(증직)되었다.

 

장을세(張乙世)

() 東仲(동중), 紀乾(기건) (), 夢說(몽설) (), 司圃署直長(사포서직장)을 역임하였으며 通政大夫戶(통정대부호) 曹參議(조참의) 陞敍(승서)되었다. 353명의 인물이 있다.

 

 

7. 인동 장씨(仁同 張氏) 각파(各派) 항렬표(行列表)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경파

(京派)

중리파

(中里派)

황파

(凰派)

 진평파

(眞坪派)

 남산파

(南山派)

 진가파

(鎭佳派)

울진파

(蔚珍派)

 금구파

(金溝派)

고흥파

(高興派)

영광파

(靈光派)

함평파

(咸平派)

흥해파

(興海派)

화순파

(和順派)

浿

청주파

(淸州派)

의흥파

(義興派)

락 수

洛 洙

직제학파(直提學派)

 

 

 

 

 

 

8. 인동 장씨(仁同 張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에 의하면 인동 장씨는 184,863가구 총 591,315명인 것으로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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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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