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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朴烈,)
본명은 朴準植)
출생
사망
1974년1월17일(71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력
일본 도쿄 세이소쿠영어전문학교 중퇴
학창시절
경상북도 문경에서 박영수(朴英洙)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상주군에 있던 함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수학
경성고보 재학 중에 3·1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에서 수학
무정부주의자활동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1920년 1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노동자 사회의 상부상조를 표면 상의 목적으로 하는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
박열은 흑도회라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
1922년 김약수·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
1923년10월에 히로히토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
박열과 가네코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
가네코 후미코는 몇달 뒤 감옥 안에서 자살 후 시신으로 발견
박열은 2개월을 복역하고 해방 후 미군에 의해 석방.
해방이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 풀려나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이때 저서로 《신조선혁명론》(1946)을 남겼고, 이승만 노선을 지지
김구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 반발,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으로위촉
1946년2월~ 6월까지 김구의 부탁으로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유해발굴 봉환 위원장으로 활동.
1946년12월과1947년4월2차례에 걸쳐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과 회담.
1948년 재정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사임.
납북
한국전쟁 당시 납북
대한민국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경상북도 문경시의 생가 터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2012년 10월 9일에 개관되었으며,
기념관옆쪽에는2003년에 먼저 자리잡은 부인 가네코후미코의 묘소가 있음. 부인은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분입니다
201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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