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만능의 효자손 30년

물 오르기전에 호랑가시나무 가지치기하는 최용득 수목원장 ⓒ장정숙

호랑가시나무와 미선나무 최대 군락지

변산해수욕장으로 가기 조금 전에 국도 30호선을 벗어나 변산터널을 지나 오른쪽 구 도로로 들어서면 바로 풀꽃 펜션의 표지판이 나온다. 100 여미터 지나 아담한 2층 펜션이 오른쪽에 보인다. 그 일대 1만3,000여 평에 그만그만한 수목이 가득하다. 부안군 변산면 변산로 2177-38 새 주소다. 척추가 꼿꼿하고 고개를 쳐든 폼이 허리 구부리고 고개 숙이며 살기 십상인 농사꾼의 자세와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1958년생, 우리 나이로 62세. 여기 농장을 가꾼 지 36년이라고 한다.
   
원예학과 출신의 학사 산꾼

-어떤 연고로 여기 농원을 일구게 되었습니까?
“참 기구해요. 처음부터 이런 농장을 생각한 게 아니었어요. 아버지 대 위로도 몇 대를 여기 변산(산내)안에서 살았어요. 변산초등학교, 이리중학교를 거쳐 다시 저 앞 지서리에 있는 변산연초고등학교(뒤에 변산실업고)를 다니지 않았습니까.
-대학은 언제 나오셨습니까?
“1984년이오. 그때 농대(원광대 농대 원예과) 나와 영농하는 사람에게는 ‘복합영농’이라 해서 군 농협에서 두 사람을 특채 하도록 되어 있었대요. 부안읍과 진서 두 군데요. 그런데 저보고 진서로 가라 해서 그만 두고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아예 서울로 튀어야겠다 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지요.”
말 그대로 서울은 이리나 변산 산중에서 듣던 부지런하기만 하면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취직자리를 헤매다가 그래도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었는지 퇴계로 3가에 있는 ‘진양 꽃상가’에 4-5평 가게를 얻었다. 100만원 보증금에 월세 7만원, 변산 유지이던 아버지(최종규)는 자식이 대견했던지 시골에서는 적지 않은 돈을 대주셨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그 놈이 ‘농가 이농 현상대책’으로 우수상을 받았고 이어 ‘화훼 유통구조 분석’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관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운 원예지식은 꽃 장사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상가 빈 공간에 원예강좌를 내는가 하면 ‘엠비씨’ 생활 뉴스에 출연했다. ‘월간 원예’에 거의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이러한 활동은 돈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면을 넓히고 꿈을 키우는 데는 큰 힘이 되었다. 이 잡지사에서 만난 사람이 아내 김 숙이다. 그는 일곱 살 아래인 여인을 데리고 고향 변산으로 돌아와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었다. 억척같은 의지와 사랑의 정열로.
 

호랑가시나무 ⓒ장정숙

호랑가시나무 최대 군락지로 만들기까지

2017년 11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호랑가시나무 수목원(풀꽃펜션) 에서는 호랑가시나무 홀리(HOLLY)축제가 열렸다. 부안군청과 변산면 체육회 그리고 변산 국립공원이 후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후원 규모는 몇 백만 원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후원마저 호랑가시나무 30여년의 역사 가운데 최초였다. 전국 최대 규모의 군락지 행사로서는 말할 수 없이 초라했다. 변산반도는 이웃 정읍의 내장산이나 고창 방장산보다 식물의 수가 많고 고창 연안보다 어족 자원의 규모  뿐만 아니라 어족의 수에서도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랑가시나무와 꽝꽝나무는 군락지로 전국에서 유명하다. 최근 발견된 ‘변산 바람꽃’도 그런 희귀성의 하나다.
하지만 조개나 생선, 풀이나 나무를 그런 생태계의 산물로만 치고 만다면 인간의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천년을 두고 ‘천혜의 보고’ 어쩌고 말 것인가.
멸종되어가는 동물이나 식물이 얼마나 많은가. 천연기념물은 보호 이상으로 보살피고 가꾸지 않으면 퇴화하거나 멸종의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법과 돈을 쥐고 있는 관청이 못하고 여기 발붙이고 사는 부안사람 변산사람이 못하면 ‘내가라도 한다’고 나선 청년이 최용득이었다.      
-호랑가시나무로는 우리나라 최대 군락지라는데 나무가 대강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묘목에서 30여년 된 큰 나무까지 치면 한 2만 그루는 되지 않을까 싶네요.”        
-왜 하필 호랑가시나무에 손대게 되었습니까. 그 무렵에는 가이쓰끼라든가 편백 전나무 같은 것이 유행이었을 텐데.
“모장동 부모님 사시는 고향집에 제법 큰 호랑가시나무가 있었어요. 선친께서 나무를 좋아하셔서 아버님이랑 같이 호랑가시나무 모판을 만들어서 양묘를 했어요. 7-10센티 쯤 되는 묘목 2,000-3,000주를 키우고 이 묘목이 크자 지금 지서리 수목원 자리 전주 최씨 종중 산 몇 천 평을 세를 얻어 늘려 나갔습니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동남향이고 토질도 좋았고.”       
-하지만 돈은 자꾸 들어가는데 당장 나오는 수입은 없다 시피 했을텐데.
“그렇지요. 길게 보고 한 거지요. 곡식 농사 짓는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크는 걸 보는 재미로 농사 짓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무도 자고 나면 크는 것이 보여요. 이걸 키우면서 천연기념물로서도 소중하지만 술이나 차 약재로도 크게 효능이 있다 해서 그쪽으로 많이 개발하게 됐습니다. 관심도 자연히 높아지게 되고”

40년생 미선나무 묘목을 키워 2만그루의 최대군락지로 만들었다 ⓒ장정숙

-미선나무도 최대군락지로 만들었다는데.
“미선나무는 92년 부안댐 건설로 중계 묵정 군막동 같은 백천내 일대가 수몰될 때 꽤 큰 미선나무를 발견해 종묘를 하게 된 겁니다. 2002년 안면도에서 꽃 박람회를 할 때 우리 풀꽃 농원에서 기른 미선나무를 출품, 아주 호평을 받고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되었습니다. 미선나무 하면 부안 변산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미선나무는 어떻게 생장이 더딘지 30년이 되어도 크기는 겨우 2미터 남짓이고 굵기는 자름 2-3센티,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들어올 정도라고. 호랑가시나무와 동백나무 사이 군데군데에 수천 수만 그루의 ‘상사화’가 달싹 엎드려 있다.
이 미선나무는 2018년 4월 5일 청와대 기념식수 때 최 대표가 직접 가서 심어 주었고 충북 괴산 군청과 서울 영등포 구청에도 심어 주었다. ‘부안의 미선이’가 전국 어디에나 시집가서 잘 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정작 부안 군청에 호랑가시나무가 있는가, 미선나무가 있는가,
일찍이 800여 년 전 개성에서 벌목사로 부안에 온 이규보는 부안 변산의 소나무를 보고 궁궐을 짓는 천부(天府)라 했다.
누가 어떻게 그 좋던 소나무를 갉아 먹고 불태웠든 간에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이곳에 살고 있는 부안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호랑가시 수목원이 있는 전주 최씨 사문 중 선산에 두 사람이 맞잡을만한 꼿꼿한 200-300년 생 소나무가 있다고 한다. 선산은 굽은 소나무만 지키고 있지 않다. 날로 피폐해가는 농촌과 어촌 산촌도 여기 사는 사람들이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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