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동방에서 온 기마궁술의 달인들, 최초의 유목민 국가를 세우다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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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스키타이, 유목 국가의 탄생

우크라이나 키예프 드네프르강의 현재 모습. 흑해 북쪽에서 최초의 유목민 국가를 만든 스키타이 민족은 드네프르강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 쿠르간을 찾아서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헤르손으로 가는 대로는 포탄을 맞은 듯 여기저기 파여 있는데, 날마저 흐리고 안개가 자욱하니 차는 한없이 더뎠다. 버스정거장에 도착하니 장거리 택시 기사들이 다가와 말을 거는데, 어떤 이는 “끄름(크림), 끄름” 하며 호객한다. 그곳이 정작 가장 중요한 곳임에도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의 전운이 감돌고 있으니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밤에 니즈니 시로호지 마을에 도착하니 내리는 사람이라곤 동행한 윤성제뿐이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여관을 묻고 “토르구즈 쿠르간으로 간다”고 이야기하니, 여관까지 우리를 데려다주며 신나게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작년에도 미국 연구자들이 왔다 갔다. 내가 안내까지 해줄 수 있는데.” 다행히 쿠르간은 멀지 않은 모양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흙무덤을 찾아 나섰다. 지상에서 20m나 돌출된 거대한 인공 산, 스키타이 왕족이나 최고 유력가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스키타이는 카스피해 남쪽으로 가 정주 국가를 만든 메디아나 페르시아인 형제들과 달리 흑해 북쪽에서 최초의 유목민 국가를 만든 민족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은근히 말발굽을 찾아보았다. 흑해 북부의 평원에는 산도 없어, 맑은 날이면 그들이 만든 인공 산이 이정표 역할을 했을 것이다. 10리 정도를 걷다 보니, 과연 약 300m 앞부터 큼지막한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평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시커먼 무덤 발치로 안개가 깔리고 인적은 없으니, 말발굽 자국을 찾는 대신 고개를 들고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주위의 농경지는 거의 끝이 없어, 큼지막한 인공 산을 처량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최초의 유목민 국가는 흔적만 남기고 그렇게 사라졌다.

■ 동방에서 온 기마궁사

더 강한 유목민에게 밀려왔지만

볼가강 서쪽에선 맹위를 떨치며

드네프르강 유역 농경민들 복속

유목민 중심 농경 혼합 국가 형성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그들은 마사게타이라 불리는 더 강한 유목민에게 밀려 볼가강을 건너고, 먼저 자리를 잡은 킴메르인들을 몰아내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드네프르와 도네츠강 사이에 왕족이 있었고, 그 서쪽으로 순서대로 유목 스키타이, 농경 스키타이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가장 동쪽의 왕족이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말하는 전설을 하나 소개한다.

‘천신(天神·그리스인들은 뭉뚱그려 제우스라 부른다)과 드네프르의 하신(河神)의 딸 사이에서 난 타르기타우스는 세 아들을 얻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황금으로 된 쟁기와 멍에, 전투용 도끼, 그리고 잔이 내려왔다. 형들이 그 성물을 잡자 불길에 휩싸였지만 막내가 잡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스키타이의 조상이다.’

그는 이어서 그리스인들이 전하는 전설을 소개한다. ‘스키타이는 헤라클레스와 그들 땅의 어떤 동굴에 살던 사녀(蛇女·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뱀) 사이에서 난 세쌍둥이 중 막내 스키테스의 후예다.’

두 신화는 본질적으로 같고, 비슷하게 조작·합성된 것이다. 전편에서 살폈듯이 다뉴브에서 드네프르까지 고유럽의 삼림 농경지대에는 뱀이나 물고기와 인간이 결합된 형상의 강의 여신이 오랫동안 숭배되고 있었으니, 하신의 딸이나 사녀는 현지인들의 신이었을 것이다. 한편 스키타이는 ‘하늘’을 믿는 이들이다. 그들이 믿는 하늘은 페르시아인들이 믿었던 지혜의 주 아후라 마즈다가 아니라, 더 원시적인 인도-이란 만신전의 ‘아버지 하느님’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실질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던 태양신 미트라였을 수도 있다. 그들은 ‘하늘에서 가장 빠른 신(태양신)을 위해 지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말)을 희생으로 바친다’는 기록도 있으니까. 뒤늦게 드네프르 일대로 들어온 그들은 토착 신앙을 자신들의 것과 결합시켜 통치를 정당화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라고 강조했는데, 신화에서 막내가 통치권을 차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뒤메질은 성물을 쟁기/멍에, 도끼, 잔(성배·聖杯)으로 나누고 각자를 생산자, 전사, 사제를 상징하는 인도-유럽의 삼분(三分) 기능체계에 꿰맞추지만 억지스럽고, 이를 서방으로 온 스키타이가 유목민 중심으로 만든 유목-농경 국가체제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동방에서 스키타이는 그냥 유목민이었기에 쟁기를 성물로 보았을 가능성은 적기 때문이다.

■ 강력한 힘과 미숙한 통치력

몰도바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쿠쿠테니 문화 토기의 여신 문양, 미누신스크 분지 아르잔 고분의 황금옷을 입은 전사, 러시아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소장 중인 스키타이 황금유물(위 사진부터).


앞으로 거의 2000년 동안 유목세계 내부에서는 두 개의 흐름이 반복된다. 먼저 동방으로 서서히 옮겨가 알타이산맥을 넘어 몽골고원 동부까지 이동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벌어진 충격파로 여러 유목민 집단이 마치 당구공이 튀듯이 사방으로 움직이다. 동쪽은 바다요 북쪽은 극한, 남쪽은 유목에 적합하지 않거나 성을 쌓아 대비하는 인간들이 버티고 있으니 기후대가 비슷하고 비교적 손쉬운 서쪽이 탈출구가 되는 것이다. 유목세계의 중심이 알타이 서부에 있었던 서기전 9세기 무렵에도 이미 동강서약(東强西弱)의 형세는 고착된 듯하다. 스키타이가 밀려 흑해 초원에 도달한 때는 기껏해야 8세기 후반기로 추정된다.

처음엔 아시리아와 격돌했지만

동맹 맺고 메디아를 협공하기도

정복자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으나

통치기술은 갖추지 못해 도태돼


비록 동방에서 밀려났지만 볼가강 서쪽에서 이 기마궁술은 희귀한 기술이었고, 그들은 주어진 기회를 적시에 이용할 만큼 충분히 대담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서아시아의 패자인 아시리아와 격돌했지만, 둘은 금세 화해하고 그 사이에 있는 메디아인을 치는 동맹을 맺는다. 메디아는 수백년 아시리아의 지배를 벗어나자마자 서아시아 패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복잡한 정치판에서 동맹을 이용하는 데 익숙한 아시리아는 스키타이와 손을 잡았고, 메디아인은 배후의 적과 맞서다 패해 서기전 628년부터 600년까지 거의 30년 동안 스키타이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이 국가를 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대개 격심한 투쟁에서 패한 유목 집단은 근거지에서 밀려나더라도 이미 철저히 군사화되었기에 이주지에서 힘을 발휘한다. 흉노에게 밀려난 월지가 천산을 넘어 쿠샨 왕국을 세우고 번성한 것이나, 서방으로 밀려난 훈(Hun)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비슷한 이치다. 그들은 강하기도 했지만 몇 가지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물자를 사고팔 배후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니 흑해 일대에 식민지를 두고 활동하던 그리스 상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드네프르강 서쪽의 농경민들을 복속해서 곡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스키타이가 맹위를 떨치며 아시아를 벗어나 이집트로 향하자 다급해진 파라오가 직접 나서 화평을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서아시아로 들어온 메디아인이나 뒤를 이은 페르시아인 같은 통치기술은 없었던 모양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믿는다면 그들은 습격하고, 공물을 부과하고, 멈추지 않고 또 빼앗았다고 한다. 탁월한 정복자였는지 모르지만 통치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정복자에서 지배자로 전환하지 못한 통치 집단의 운명은 반란과 패배다.

메디아인들은 스키타이의 지배에 신물이 난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을 다시 카스피해 북쪽으로 몰아낸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서 참으로 기괴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그들이 메디아를 치러 가서 거기 머무르는 동안 ‘노예’들이 남은 부인들과 결합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그들이 주인의 귀로를 막고 저항했다고 한다. 그들은 크림반도의 산맥에 기대어 바다까지 긴 참호를 만들고 싸웠다고 한다.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 상호 사상자가 늘어났지만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 그때 귀환자 진영의 어떤 이가 제안했다.

‘우리가 사상자를 내며 싸울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무기를 들고 있으니 그들이 대등한 줄 안다. 우리가 채찍을 들면 그들은 노예인 줄 자각할 것이다.’

과연 그들이 채찍을 들고 오자 저항하던 노예의 자손들은 바로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그리스 흑도에 묘사된 스키타이 민족의 모습. 말을 타고 ‘전설의 동물’ 그리핀과 대결하고 있다. 예르미타시 박물관 소장


■ 연구의 아킬레스건, 유목 사회와 노예

유목사회에선 노예제 안 어울려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노예 반란’

명칭의 혼란으로 인한 오해인 듯

노예 무역에 관여 가능성은 있어


필자 역시 유목 사회에 노예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유목 사회에서는 전 집단이 비슷한 노동을 하기에 계급의 분화가 잘 생기지 않으며, 유목은 성격상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초원에서는 노예제를 뒷받침할 감시 기구나 감옥도 없다. 전쟁포로라 하더라도 대를 거듭하면 평민으로 바뀐다. 이것은 역사학과 인류학이 거의 공통적으로 밝히는 바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 사회 내의 노예 반란을 묘사한다. 무슨 까닭일까?

결론은 이렇다. 먼저 명칭의 혼란이 있다. 왕족 스키타이는 나머지 스키타이를 다 ‘노예’로 부르지만 그들은 예속 노예가 아니다. 페르시아인의 이름 짓기도 마찬가지다. 비스툰 비문에 속주의 태수들을 왕의 “노예(bandika)”로 부르지만 그들은 물론 노예가 아니다. 선전적인 성격이 강한 선언문을 제외하더라도, 페르세폴리스 출토 기록들은 페르시아인이 노예 대신 임금 노동자들을 선호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상기의 노예 반란 이야기 자체가 전설이므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 본국의 상황을 30년이나 방치하는 지배층이 어디 있으며, 30년 밖에 있어서 할아버지가 된 이들이 어떻게 말을 타고 전투를 하겠는가. 주인의 아내를 취해서 자식을 낳는 이들을 노예라 부르는 것이 타당한지도 모르겠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다 상대가 채찍을 들자 갑자기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황당하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불과 150년 전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스키타이 본영 내에서 ‘노예’로 불리던 집단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 전쟁에 패해 복속되어 ‘노예’로 불리던 의부(依付) 집단이었을 것이고, 그들이 저항한 장소로 보아 반란은 전국적인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두번째로 순수한 유목 사회 내에서 노예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유목-정주 복합 사회 내에서는 존재한다. 페르시아인들은 노예를 다루지 않았지만 제국 내의 바빌로니아인들은 자치도시 내에서 여전히 노예를 사고팔았다. 스키타이는 페르시아인들처럼 원대한 목표를 가진 이들이 아니었으니 역으로 노예 제도에 물들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책을 쓸 당시의 스키타이인들은 전쟁포로들을 잡으면 그 눈을 뽑아 노예로 만들고, 말 젖을 휘저어 마유주로 만드는 일을 시킨다고 한다. 반란을 겪은 후 겁을 먹었기에 무장시키는 대신 오히려 신체를 훼손했을 것이다. 이런 허드렛일에 동원되는 노예는 극소수였겠지만, 이것이 후대 유목 사회에 보이지 않는 잔혹행위임은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쓰지는 않더라도 유목민은 노예 무역에 관여할 수 있다. 유목 지배층에게 정주 사회의 거대한 노예 시장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특히 유럽과 서아시아의 노예 시장과 연결된 흑해 북부 초원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후대의 흑해 일대 유목 세력들은 대개 노예 무역에 가담했고, 크림 타타르는 특히 악명이 높았다. 당시에도 크림반도는 그리스 식민지들이 즐비한 스키타이의 무역 중심지였다. 그리스 항아리와 식민지 건물 명문(銘文)에 등장하는 스키타이식 노예 이름, 아테네에서 ‘스키타이 노예 경찰’의 존재, 그리고 최소한 서기전 2세기에는 기록으로 명백하게 증명되는 거대한 흑해 노예 교역망으로 볼 때, 초기 정복 과정에서 막대한 전쟁포로를 획득했을 스키타이가 이를 되팔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렇듯 역사는 도덕교과서의 장이 아니라서, 기술 전파 등의 순행은 물론 노예제 따위의 역행 추세도 강력한 감염성을 가지고 있다. 기마궁술도 감염권 밖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유목세계와 정주세계가 군사적으로 닮아가며 더 격하게 충돌하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먼저 세계제국을 꿈꾸는 페르시아는 스키타이를 칠 이유가 넘쳤다. 그리고 얼마 후 동방에서 진(秦)이 전국을 통일하는 대사건이 일어나고, 그 반작용으로 북방에는 스키타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잘 짜인 유목민 국가가 등장하니 바로 흉노다. 우리는 앞으로 2000년 동안 이어지는 남북 대결 시대를 목격할 것이다.

■ 필자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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