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베네수엘라] ③ 중남미 정치지형 '우향우'…역내 질서재편 '시동'(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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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3.09. 오전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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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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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후 좌파진영 퇴조…경제침체·부패·치안불안 실망표심이 정권교체

우파 연대 움직임 본격화…콜롬비아, 친시장 지역 기구 출범 추진

리마그룹 회의 영상 연설하는 과이도[EPA=연합뉴스 자료 사진]


(카라카스=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 지난 1월 4일 페루 수도 리마에서 베네수엘라 위기의 평화적 해법 도출을 위해 결성된 지역 기구인 '리마그룹'의 회의가 열렸다.

리마그룹은 작년 5월에 치러진 베네수엘라 대선이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은 만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채택, 곧 베네수엘라를 뒤덮을 '한 나라 두 대통령' 사태를 예고했다.

2017년 8월 리마에서는 중남미 17개국 외교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베네수엘라 위기를 논의하기 위한 첫 회의가 열렸다.

당시 참석 국가 중 의견이 같은 14개국은 마두로 정권이 우파 야권이 장악한 의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구성된 제헌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범 석방, 자유 선거 실시, 인도주의적 지원 수용, 민주주의 제도 훼손 등을 비난하는 리마 선언을 채택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회원국 면면을 보면 북미의 캐나다를 빼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멕시코,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가이아나, 세인트루시아 등 13개국이 중남미·카리브해 국가들이다.

리마그룹은 발족 이후 베네수엘라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마두로 정권을 압박했다.

리마그룹이 베네수엘라 위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중남미 정치지형이 우측으로 기운 것과 무관치 않다.

2013년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중남미에서 사회ㆍ경제적 불평등 축소를 지향하는 좌파 진영이 경제난 속에 쇠락의 길을 걷는 가운데 탈이념적 실용주의를 표방한 우파 진영이 빈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의 정권이 중남미를 호령하던 시절이었다면 베네수엘라의 두 대통령 사태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벽화가 그려진 담 옆에 서 있는 학생들 [연합뉴스]


◇ 중남미 '우파 득세'…저무는 '핑크 타이드'

소득 재분배를 통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축소를 지향하는 온건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물결은 1999년 태생했다.

1999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당선을 시작으로 브라질(2002년), 아르헨티나(2003년), 우루과이(2004년), 칠레·볼리비아(2006년) 등에서 좌파가 줄줄이 정권을 잡았다.

중남미 좌파 국가들은 미국 중심의 경제체제에 반대하고 경제자립을 위한 지역통합을 지지하며 소외계층을 위한 재분배 정책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특히 차베스 전 대통령은 역내 좌파 진영의 맏형 역할을 했다.

'반미'와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빈민 등 소외계층을 상대로 무상복지를 시행하고 외국 자본이 좌지우지했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다.

이 때문에 빈민 계급의 영웅, 남미 좌파 블록의 좌장이라는 평가와 함께 독재자, 무상복지 포퓰리스트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 등에 따른 경제 호황 속에 차베스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정부 세입의 60% 이상을 사회복지에 투입했다.

2003년 62.1%였던 빈곤율이 2011년 31.9%까지 떨어지면서 그는 빈민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중남미 좌파는 2010년을 전후로 세력이 약해졌지만 같은 해 10월 브라질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페루, 베네수엘라 등의 대선에서 좌파 후보가 당선돼 건재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지난 20여년간 남미를 휩쓸었던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물결)는 2015년 하반기부터 점차 기세가 꺾였다.

중남미 우파 약진의 진원지는 중남미 좌파 연대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던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였다.

2015년 11월 중도 우파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좌파성향 후보를 누르고 12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데 이어 다음 달 실시된 베네수엘라 총선에서도 중도 우파 성향의 야권이 17년 만에 강경 좌파성향의 집권 여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좌파가 집권하던 시절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좌파 연대의 경제ㆍ이념적 지주였던 베네수엘라와 함께 남미국가연합(UNASUR) 등 독립적인 중남미 통합운동을 주도하고 공개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한 좌파 블록의 선도 국가였다.

이후 페루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2016년), 칠레의 세바스티안 피녜라(2017년), 온두라스의 후안 올란도 에르난데스(2017년), 콜롬비아의 이반 두케(2018년), 파라과이의 마리오 압도 베니테스(2018년),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2018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우파 진영은 약진했다.

같은 기간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2016년), 에콰도르의 레닌 모레노(2017년), 코스타리카의 카를로스 알바라도 케사다(2018년), 베네수엘라의 마두로(2018년), 멕시코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2018년)가 대선에서 승리해 좌파 진영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지난해 반정부 시위로 위기를 겪었고, 베네수엘라는 야권과 국제사회의 마두로의 재선 불인정 속에 정국 혼돈이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멕시코에서 78년간 이어진 중도 우파의 집권 끝에 좌파 정권이 출범, 핑크 타이드 퇴조에 제동을 걸었지만 중남미에서 정치·경제적 비중이 큰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등 소위 'ABC' 3국에서 우파가 집권함에 따라 전반적인 우경화 판도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브라질 대선 결선투표 앞두고 극우 후보 지지 시위[EPA=연합뉴스 자료 사진]


◇ 우파 약진 일등공신은 경제침체·부패·치안 불안

중남미 전역에서 좌파 진영이 퇴조하고 우파 진영이 약진하게 된 이면에는 경제침체, 부정부패, 정경유착 등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권력형 비리에 염증을 느낀 국민의 실망감과 변화에 대한 기대 심리가 깔려 있다.

계속되는 경제침체와 만연한 부패, 치안 불안에 대해 정치적 대응 능력을 상실한 좌파의 장기집권을 바라보는 대중의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정치지형 변화가 불가피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여론조사기관인 라티노바로메트로가 지난해 실시한 중남미 주요 문제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실업, 빈곤, 소득감소 등 경제 문제가 35%로 가장 높았고 범죄·치안(19%), 정치문제(9%)가 뒤를 이었다.

무엇보다 침체에서 좀처럼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은 중남미에서 친시장·친기업을 지향하는 우파가 세를 불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엔중남미경제위원회(ECLAC)에 따르면 중남미 경제성장률은 2014년부터 하락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뒤 2015년과 2016년에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2017년부터 반등하기 시작했으나 더딘 회복세를 보인다.

경제침체 속에 소득감소, 빈곤율·실업률 상승이 이어지면서 분배와 복지를 중시하는 좌파 경제모델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과 불만도 높아졌다.

치안 불안에 대한 좌파 정권들의 무기력한 대응도 정권교체를 부추겼다.

중남미의 살인율은 10만 명당 21.5명으로 전 세계 평균의 3배에 달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살인율이 높은 도시 50개 중 43개 도시가 중남미에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0월 치러진 브라질 대선의 경우 변화를 갈망하는 중남미의 민심이 투영됐다.

한때 남미 좌파 블록의 중심에 서 있던 브라질에서 중남미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극우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는 사회자유당(PSL)의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된 것은 나라 전체에 만연한 부패와 경제침체에 대한 실망감이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보우소나루는 연방 선거에서는 무명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인지도를 보였지만 전·현직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이 대거 연루된 초대형 부패 스캔들인 '라바 자투'와 '오데브레시' 사건을 계기로 기존 정치권과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부패에 찌든 기성체제에 대한 브라질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결국 극단적이고 강력한 처방을 약속한 보우소나루가 대권을 잡은 것이다.

정치 분석가인 호세 그레고리오 콘트레라스 베네수엘라 국립 중앙대학교 교수는 "좌파가 장기 집권하면서 가난한 자와 소외계층을 대변하겠다는 초심을 잃고 과거 보수 기득권층과 마찬가지로 자기 배만 불리는 부패를 저질렀다"며 "우파의 약진은 좌파진영의 내부적 실패와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실망감이 복합적으로 빚어낸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는 "중남미 전체에 극우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좌우 이념을 떠나 부패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등과 같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인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고 실천력을 보이는 정치세력이 국민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중남미에서 집권에 성공한 우파 지도자 중 브라질의 보우소나루처럼 일부는 친시장·보수라는 이념적 가치를 견지하면서도 단순하며 자극적인 수사로 현상 타파와 급진적 변화를 주장하는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이 같은 극우 포퓰리즘은 이성, 토론, 합의 등 건전한 정치 문화를 해친다는 점에서 중남미 민주주의가 퇴보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를 낳고 있다.

[AP=연합뉴스 자료 사진]


◇ 뭉치는 우파…역내 질서 재편 '시동'

중남미 우파들은 정권교체에 이어 연대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중남미 지역의 보수우파 성향 정당과 단체 관계자들은 지난해 12월 브라질 남부 포즈 두 이과수 시에서 '제1회 미주지역 보수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역내 진보좌파 연대 모임인 '상파울루 포럼'에 대응하는 것으로, 중남미 지역에서 진보좌파의 집권을 막고 보수우파 진영의 조직화를 모색하려고 열렸다.

남미에 우파 정권이 속속 들어서면서 지역 기구의 재편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콜롬비아는 남미국가연합(UNASUR)을 대체할 새로운 지역 기구 창설을 추진하고 있다.

친미 우파 성향의 이반 두케 콜롬비아 대통령은 남미국가연합을 대신할 이른바 '프로수르(PROSUR)'를 출범시키기 위해 역내 다른 국가들의 지지를 구하고 있다.

두케 대통령의 구상은 브라질, 칠레 등 남미 우파 국가들의 지지에 힘입어 세를 불리는 양상이다.

앞서 두케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취임 직후 남미국가연합이 역내 통합을 깨고 베네수엘라의 독재를 용인하는 기구로 전락했다며 탈퇴를 공식 선언한 바 있다.

'남미판 유럽연합(EU)'을 내건 남미국가연합은 2008년 5월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남미 정상회의 합의에 따라 창설됐다.

당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기구 창설을 주도했다.

독자적인 지역 국제기구를 통해 남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궁극적으로 남미 통합을 지향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들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4월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콜롬비아·페루·파라과이 등 우파 정부가 들어선 6개국이 임시로 회원자격을 중지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현재 남미국가연합에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우루과이, 가이아나, 수리남만 회원국으로 남아 있다.

penpia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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