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그림과 만나는 우리 시대의 삶과 인생
한때의 붐으로 미술관 기행기나 그림 읽기에 대한 책이 무수히 쏟아졌다. 2000년 소설가 김원일은 소설가가 처음 쓴 미술 산문집인 『그림 속 나의 인생』(열림원)을 펴낸 바 있고, 쇄를 거듭하며 당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은 『그림 속 나의 인생』의 개정판으로, 20여 년 만에 새로운 구성과 판형, 디자인으로 독자들에게 또다시 선보이게 되었다. 새로운 글을 추가하되 기존 글 몇 편은 삭제하였고, 오랜 투병 생활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새롭게 글을 다듬어 펴냈다.
“그림이란 일절 선입관 없이 그림 자체로만 감상해야 한다는 원칙론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들은 그 그림에 뒤따르는 에피소드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작품을 해석하려 한다. 소설 쓰기가 생업인 나 역시 한 장의 그림을 볼 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화가의 당시 삶을 엿보려는 습성이 있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화가의 부단한 생애와 그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비록 미술에 문외한이더라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으며,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된 총 마흔여섯 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소설을 읽듯 다양한 인생사를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의 굴곡진 인생사가 화가의 생애와 그 작품에 자연스럽게 오버랩되고, 글 마디마다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문학이 그러하듯 그림 또한 그림으로만 존재하기보다 시대와 역사의 환희와 비극, 그 얼룩진 굴곡과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우리는 이 책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밀레에 대한 친근감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삭 줍는 여인들」을 마주했을 때, 옛집 벽에 걸렸던 그 그림과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떠올려주었다. 선잠 깬 내가 놀랐듯, 오밤중에 집으로 숨어든 아버지를 체포하러 순경들이 구둣발째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그림 속의여인네들도 겁먹어 놀랐을 것이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
“유배지 수용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몇 년 만에 소식도 없이 돌연 귀가한 사내와 이를 맞는 가족의 표정을 순간적으로 잡은, 팽팽한 긴장감이 넘치는 화면이다. 나는 레핀의 그 그림에서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 가는 아버지의 젊은 모습을 보았다.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 서울이 탈환되기 직전, 구로 지역 방어선 후방부 책임자로 마지막까지 서울에 잔류하다 월북한 뒤 유격6지대 간부로 다시 남하, 1952년 3월까지 태백산?일원산 일대에서 유격 투쟁을 벌였다는 아버지 모습의 상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우리 가족은 당신을 재상봉하는 기쁨보다, 당신이 가족 앞에 나타날까 봐 오히려 두려워했다.”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이 책의 구성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늘 결핍되어 있음을 뜻한다. 인간의 의식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늘 무언가를 갈망한다.” 장-폴 사르트르
이 책은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렘브란트의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을 시작으로 로댕, 뭉크, 호퍼, 자코메티, 프리다 칼로, 베이컨의 작품을 소개한다. 자기 성찰, 예술혼의 자만심과 오기, 열정 등 예술가의 초상이라 일컬을 수 있는 여러 모습을 담고 있는 글들이다. 2부 「사랑과 열정」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비롯해 앙리 루소, 고흐, 클림트, 로트레크, 코코슈카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삶이란 고해”이나 사랑 혹은 열정이 있기에 예술이 존재하고 삶은 또 반짝임을 이야기하는 글들이다. 3부 「도전과 파괴, 재창조」는 쿠르베의 「만남(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비롯해 마네, 드가, 세잔, 마티스, 뒤샹 등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고 상식을 파괴하여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조해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4부 「자연, 이상향」은 우리에게 친근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롯하여 윈즐로 호머, 고갱, 샤갈 등을 통해 인간이 돌아가고 싶은, 혹은 지향하는 자연, 고향, 이상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5부 「시대와 현실」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콜비츠의 「시립구호소」, 벤 샨의 「광부의 아내」 등 험난한 삶의 파고와 역사의 격동기를 표현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6부 「삶의 유한성」은 엘 그레코의 「베드로의 눈물」,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 등을 소개하며, 유한한 인간의 삶과 슬픔, 그렇기에 인간이 희구하는 종교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편 「예술가의 초상」에서부터 「삶의 유한성」에까지 이르는 책의 구성은 소설가 김원일의 기나긴 삶의 이력에 다름 아니다. 등단 52년째를 맞은 작가로서 힘겨운 투병 생활에도 불구하고 오래 일구어온 삶과 문학, 예술에 대한 그의 한결같은 자세와 투혼 그리고 뜨거운 열정은 여기 소개한 화가들의 생애 및 예술혼과 닮아 있으니, 이 책은 그 자체로 김원일이라는 하나의 예술가의 초상, 즉 자화상인 셈이다.
[책속으로 추가]
“삶이란 고해苦海다”라는 말이 있지만, 살아온 생을 돌아볼 때 우울과 슬픔의 긴 여로를 거쳐 올 동안 때때로 즐거웠던 한 시절 한순간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평생을 평범하게 살다 고희를 맞은 노인에게 생애 가장 기뻤던 적을 묻자, 첫 직장에 첫 출근하던 날, 첫아이를 보았을 때, 그 아이를 성례시키던 날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봄날의 낮 꿈 같은 그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힘든 삶을 견뎌낸다. 그림 속의 소년도 세월이 흘러 성년이 된 뒤 객지로 나와 살다, 몸이 편찮다는 고향에서 온 어머니의 편지나 힘없는 전화 목소리를 들을 때, 어느 해 달빛이 좋던 여름밤 어머니와 바닷가에서 추었던 춤을 떠올릴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어머니는 가족의 튼튼한 울타리로서 창무처럼 튼튼했고 젊음의 활기로 넘쳤다. (호머의 「여름밤」, 161쪽)
「시립구호소」는 웅크린 채 잠든 두 자식과 함께 시름에 차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스케치이다. 얼굴을 마주 대한 어머니와 자식의 절절한 표정을 보라. 고단한 잠에 빠진 앙증맞은 모습의 어린 딸과 엄마 품을 파고든 젖먹이, 그 자식들을 어떻게 굶기지 않고 살려낼까 근심하다 잠시 잠에 빠진 어머니의 광대뼈 불거진 초췌한 얼굴은 더 살아갈 기력을 잃어버린 절망적인 한순간이다.
“피란 내려와 얼마나 살기 힘들었던지 너거들과 비상이라도 먹고 죽을라꼬 앙심을 품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 젖먹이 어린것이(막내아우) 이틀 동안 피죽도 몬 묵어 울 힘도 없이 늘어져 누웠을 때, 증말 저 자슥과 함께 죽자꼬 어판장에 나온 복쟁이(복)를 한참이나 들이다봤니라. 돈만 있었다모 그놈을 사와서 우리 식구가 끓이 묵었을 끼다……” 「시립구호소」를 보면, 언젠가 어머니가 울먹이며 들려주던 말이 귓가를 울린다. (콜비츠의 「시립구호소」, 207~208쪽)
「임종을 맞은 카미유」에는 젊은 날의 동반자로서 고락을 함께해온 아내를 잃은 모네의 슬픔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안개 같은 검푸른색 속에 감싸인 채, 죽음의 순간을 맞는 카미유의 얼굴이 애처롭다. 그가 젊은 날부터 탐구했던 빛의 분광, 그 현란한 색채의 아름다움마저 아내의 죽음 앞에선 숨을 죽였다.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엷은 잔광이 카미유의 얼굴 윤곽을 살려내고, 그 주위로 마치 그녀가 당하고 있는 죽음의 고통을 표현하듯 검푸른 색을 비질하듯 거칠게 표현했다.
아내가 죽음을 맞는 비통한 순간에도, 모네는 직업적으로 죽음 주위에 머물며 순간순간 변해가는 색채를 보았다. 뒷날 벌판의 노적가리와 루앙의 대성당과 영국 국회의사당의 연작 속에 아침?낮?저녁, 기후 조건에 따라 대상(사물)이 변하는 빛의 분광을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내의 죽음을 보는 순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사랑하는 사람을 곧 잃게 된다는, 자신의 내면에서도 점차 빛이 꺼져가는 절망을, 그러한 자신의 심리적 변화까지 화가는 본능적으로 추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 236~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