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한국 패션의 산역사` 83세 현역 디자이너 진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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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7.06.16. 오후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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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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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마르소도 내 옷 입어…앙드레김은 날 무서워했다더라

트레이드마크인 화이트 셔츠를 입은 디자이너 진태옥이 올가을·겨울 컬렉션 의상을 입힌 마네킹 사이에 서 있다. 그는 "이 작품들을 만들 때의 내 에너지와 동기를 회상하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승환 기자]
디자이너 진태옥(83)은 거리에서 종종 낯선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그가 인사를 하는 줄 모른 채 지나갈 때가 많다. 서울 청담동 매장에서 만난 그는 "내가 만든 옷은 자식 같아서 길을 가다가도 보인다.

마치 수많은 아이들이 모인 학교 운동장에서 내 아이가 보이듯이"라며 "너무 잘 입어줘서 감사하다고 혼자 인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의 옷을 막 입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지은 옷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젊은 분이 어머니가 입었던 원피스를 물려받았는데 안감에 사인을 해달라고 찾아왔더라. 내가 만든 옷인데 보따리에 곱게 싸여 있었다. 평생 소장하겠다는 의미였다. 진태옥 옷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

비싸서 그런 게 아닐까. 그는 "수입 명품에 비하면 비싼 축에도 안 든다"고 일축했다. 1965년 이화여대 앞에서 처음 의상실을 연 진태옥은 한국 패션의 산 역사다. 그해 패션 브랜드 '프랑소와즈'로 기성복 시대를 열었고 컬렉션(패션쇼)을 시작한 디자이너 1세대다. 고령에도 그의 디자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다음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오픈하는 팝업스토어(일시적 매장) 의상 준비에 여념이 없다.

―평생 몇 벌의 옷을 만들었나.

▷셀 수 없다. (내가 만든 옷을 늘어놓으면) 아마 지구를 몇 바퀴 돌았을 것 같다.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있지만 다시 돌아와 옷을 만들었다. (디자이너는) 천직이다. 일생을 걸어야 할 길, 그야말로 마이 웨이(My Way)!

―83세에도 현역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그 열정의 원동력은.

▷초지일관 옷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단순하니까 이렇게 됐다. 디자인 외에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불쌍하다. 다양하게 흡수해서 표현해야 하는데 옷 이외에는 모른다. 스마트폰도 잘 다룰 줄 모른다. 밤낮 문자 보내는 방법을 배워도 기억을 못한다. 관심이 없고 절실하지도 않다. 아마 생존 문제가 걸려 있다면 했을지도.

―디자이너는 계절을 앞서 유행을 예측해야 한다. 주로 어디서 영감을 받나.

▷적어도 시즌 1년 전에 이상한 기류가 찾아온다.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다. 거기에 맞춰 디자인, 소재, 컬러를 선택한다. 그런데 트렌드가 맞아떨어진다. 신기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다. 뭔가 내 머리에 꽂힌다.

―그 과정이 마치 포천텔러(점쟁이) 같은데.

▷항상 더듬이가 열려 있다. 무엇을 봤을 때 탁 잡아챈다. 영감을 받으면 에너지가 분수처럼 폭발한다. 거기에 매달려 씨름한다.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래서 재미있다. 자극을 안 받으면 지루하고 힘들다. 여행을 하다가도 뭔가 촉수에 걸리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희열을 느낀다.

―옷을 만드는 과정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나.

▷아이를 낳는 것과 비슷하다. 끔찍한 산통을 겪고 첫아이를 낳지만 곧 그 고통을 잊어버리고 둘째아이를 가진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허허벌판에서 뭔가를 잡으려고 몸부림친 후 작품을 만들어낸다. 죽을 듯한 고통을 반복하면서 옷을 만들어왔다.

―옷을 잘 입는 방법은.

▷나는 그냥 제시한다. 디자인의 완성은 손님 몫이다. 똑같은 와이셔츠를 입어도 어떤 손님은 빛이 난다. 옷은 입은 사람의 삶과 교양, 멋을 보여준다. 그게 스타일이다. 그래서 옷을 팔 때 손님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린다. 진태옥 옷이 잘 빛날 수 있도록, 디자인할 때 그 마음이 잘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람에게 옷은 어떤 의미일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옷은 그 사람의 인격 그 자체를 마무리시켜주는 장치가 아닐까….

지난봄에 진태옥이 제시한 올해 가을·겨울 컬렉션은 '젠더 매치(Gender Match)'. 남성복의 강인한 실루엣과 감미로운 여성성이 혼재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벨벳·울·실크 소재와 레드 색상, 복고풍, 오버사이즈(체형보다 큰 옷)로 감각적인 패션 향연을 펼쳤다.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매치됐을 때 나오는 에너지가 굉장히 섹시하다"며 "여성적인 소재 벨벳과 남성적인 울이 만날 때 멋과 에너지, 섹시함은 무한대로 파생된다"고 설명했다.

1995년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봄·여름 컬렉션 런웨이에서 진태옥이 모델들과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다. 그는 1993년 한국인 최초로 이 무대에 섰으며 저명한 패션 평론가 수지 멩키스로부터 "한 편의 시"라는 극찬을 받았다.
―패션쇼를 준비할 때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인가.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면 생각의 리듬이 깨질까봐. 그리고 벙어리가 된다. 말을 하면 주변이 산만해지고 리듬을 이어갈 수 없다.

―패션쇼가 끝난 후 조명이 꺼진 런웨이에 혼자 서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

▷남들이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너무 행복하다. 아무도 없을 때 외로움이 좋다. 그때 다음 컬렉션이 딱 떠오른다. 특히 고생한 컬렉션을 마친 후에는 혼자 집에 가서 와인을 마시고 밥을 먹는다.

―패션은 사회를 반영하나.

▷그렇다.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여성 옷은 남성적이고 노동자적이었다. 어깨가 넓고 투박했다. 패션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진태옥 옷은 문화예술 공연 무대로 영역을 넓혀왔다. 현대무용가 홍신자 등 무용수들의 춤에 날개를 달아줬으며 최근에는 국립극단 연극 '메디아'의 의상 디자인을 맡았다. 오랜 지인인 배우 이혜영이 메디아와 닮았고 헝가리 연출가 로버트 알폴디가 마음에 들어서다. 메디아는 남편이 배신하자 자식을 죽여 복수하는 그리스 신화 속 마녀다.

―작업 과정은 어땠나.

▷대본을 15번 읽고 캐릭터를 분해했다. 메디아가 너무 매력 있고 강렬하더라.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는데 배신당했을 때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게 진짜 아름다운 사랑이 아닌가.

―연극 무대와 패션쇼 런웨이의 공통점은.

▷다 같은 무대다. 우리 무대(패션쇼)도 연극처럼 드라마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스토리가 분명해야 한다. 때로는 한 편의 시(詩)와 같아야 한다.

―1999년 서울예술단 가무악 '향가―사랑의 노래' 의상도 화제였다.

▷무용수에게 광목을 입히고 나 혼자 만족했다. 광목이 춤을 추니까 너무 행복하더라. 무용수들은 투박한 옷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지금쯤 젊은 친구들은 좋아할 것이다. 피나 바우슈(작고한 독일 최고 현대무용가) 무대 의상도 심플하고 자유롭지 않은가. 그런 게 참 매력 있다.

―박정자, 손숙, 윤석화 등 연극인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지난 6일 강릉 폐교에서 세 여자가 공연한다고 해서 내려갔다. 지방 문화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더라. 산불 피해 바자회도 열렸는데 남김 없이 다 팔려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도 무대 의상 디자인을 계속할 생각인가.

▷작품만 좋으면 할 의향이 있다. 배우, 연출, 무대 3박자가 맞으면 하겠다.

―패션은 예술인가, 산업인가.

▷작품을 만들고 컬렉션을 할 때까지는 예술가 마인드로 최선을 다한다. 그 후 소비자에게 가는 과정은 산업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몸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 게 아니다. 옷에 투영된 판타지를 갖고 싶어 한다. 디자이너는 그것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요즘 SPA(제조·유통 일괄) 브랜드도 예술가와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하는 이유다.

팔순이 넘었지만 진태옥은 개구쟁이처럼 까르르 웃는다. '진소녀'란 별명이 붙은 그는 193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 만든 저고리가 그의 첫 작품이다. 팔이 4개여서 실패작으로 끝났다. 하지만 버선과 베개에 수를 참 잘 놓았다.

―바느질은 누구에게 배웠나.

▷엄마한테 배웠다. 무남독녀인 내 원피스를 직접 만들어주셨을 정도로 솜씨가 좋았다. 엄마는 참 단아하고 정갈한 분이었다. 나보고 '선머슴 같다'고 늘 걱정하셨다. 일찍 과부가 된 엄마는 금비녀를 금기시하고 은비녀만 꽂았다.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옥색 두루마기에 명주 '마후라(목도리)'를 두르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외출하면서 '너 오늘 숙제해라'라고 단속을 하셨다. 그 자태가 참 고왔다. 그 핏줄을 이어받아 나도 멋 내는 것을 좋아한다.

―고향 생각은.

▷내 사촌들은 아직 거기에 산다. 30대에 강원도에 갔다가 우연히 38선 푯말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북받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때 그리움이 터진 후 (고향 생각은) 끝이었다.

어머니의 하얀 고무신은 훗날 그의 디자인 세포가 된다. 열여섯 살 때 피란 간 제주도에서 본 흰색 셔츠 역시 진태옥 디자인의 근원이다. 그는 "빛과 바람 속에서 하얗게 바스락거리던 흰 셔츠가 내 상상력을 확장시켜주고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환상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화이트 셔츠는 진태옥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1993년 한국인 최초로 참가한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컬렉션을 모두 화이트 셔츠로 구성했다. 이를 지켜본 세계적인 패션 평론가 수지 멩키스가 찾아와 "당신 작품은 시"라고 극찬했다. 20대부터 손톱에 발라온 흰색 매니큐어 역시 그의 정체성이다.

―설마 출산할 때도 매니큐어를 발랐나.

▷일평생 손톱이 흰색이었다. 애를 낳으러 병원에 가니까 간호사가 놀라더라. '이 여자가 뭐하는 여자인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웃음)

길가다 내옷 보이면 꾸벅 인사 "난 천생 디자이너"

진태옥 디자이너가 서울 청담동 자신의 의상실에서 옷감을 살펴보고 있다. "나는 제시할 뿐 완성은 결국 손님 몫"이라는 그는 옷을 팔 때 손님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고 말했다. [이승환 기자]
―첫아이를 낳은 후에야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시부모님에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면서 하루 종일 집안일만 했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국제복장학원을 다닐 수 있게 됐다. 숙제가 많아 밤새워 재봉틀을 돌렸다. 그래도 아침저녁은 다 챙겼다. 그 덕분에 지금도 김치를 잘 담근다. 빨래와 다림질도 잘해 요즘도 매일 아침 내 옷을 다려 입고 나온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은 성에 안 찬다.

―열정만큼 연애도 뜨거웠을 것 같은데.

▷그 시절에는 손만 잡았다. 스물다섯 살에 내가 선택됐다. 서울대 총장 부속실에서 일했는데 (남편이) 매일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왔다. 나한테 '올인'해 넘어갔다. 사업가 남편은 괜찮은 집안 출신 금수저였고 나는 흙수저였다. 그때 내가 예뻤나보다.

―1970~1980년대 서울 명동 '프랑소와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돈은 많이 벌었나.

▷세일 때는 서울 명동 한복판이 북새통이었다. TBC(동양방송)가 생중계하고 경찰들이 긴 줄을 통제해야 할 정도였다. 진짜 돈을 끌어모았다. 수표를 들고 온 여자들이 옷을 싹쓸이해 가서 저녁이면 매장이 텅 비었다.

―브랜드명으로 프랑소와즈를 선택한 이유는.

▷프랑스에 다녀온 선배 언니(작곡가 이영자)가 가장 흔한 프랑스 여성 이름이라며 추천했다. 파리에서 프랑소와즈(프랑수아즈)는 한국의 개똥이 같은 이름이고 영자와 똑같다면서.

―옷을 맞추는 양장점 시대에 기성복을 시작한 이유는.

▷1971년 외국에 나가니까 모두 기성복을 팔더라. 맞춤옷은 15~20일이 걸리는데 기성복은 바로 살 수 있어 시간이 절약된다. 디자인과 소재까지 좋으면 굳이 맞출 필요가 있나. 내 나름대로 사이즈 스펙을 만들었다.

―그 시절에는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남편 무역회사 이사로 등록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녔다. 크리스찬 디오르와 입생로랑 숍을 보니까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신기했다. '책에서 보던 것이 지구에 있구나' 너무 뿌듯해서 지구를 정복한 것 같더라. 뉴욕 맨해튼 29가부터 79가까지 옷만 걸려 있으면 모든 매장에 다 들어갔다. 화장실에 가서 소재와 디자인, 박음질을 꼼꼼히 메모했다. 눈이 올 때는 신발이 다 젖고 호텔에 오면 발이 퉁퉁 붓고 얼음이 뚝뚝 떨어졌다. 열정과 노력, 목표가 있어 할 수 있었다.

―1960~1970년대는 옷감이 귀하던 시절인데.

▷미군부대에서 나오거나 밀수한 원단을 쓰기도 했다. 외국 의류회사가 국내 업체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부탁하면서 보낸 원단(보세품)을 구할 때도 있었다.

―단골손님 중에 권력자나 명사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배우 배두나는 기저귀를 찰 때부터 '베베프랑소와즈'(어린이 브랜드)를 입었다. 실명을 거론할 수 없지만 정치 권력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 배우 소피 마르소를 비롯해 배우 김희애 등 스타들이 선생님 옷을 입었다. 누가 가장 잘 소화했나.

▷서로 이야기가 통하면 내 옷을 잘 소화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옷을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에게 절대 내 옷을 권유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패션 한류의 선구자다. 1989년 왜 파리로 갔나.

▷'한국에도 외국 못지않은 디자이너가 있다. 그게 나'라고 알리고 싶었다. 돈이 엄청 들었지만 슈퍼모델만 내 패션쇼 무대에 세웠다. 잡지사들이 톱모델 사진만 실어줬기 때문이다. 1994년 유력 신문 '헤럴드트리뷴'이 내 밀리터리룩을 집중 조명한 기사를 봤을 때 눈물이 확 쏟아졌다. 내가 이렇게 됐구나….

―패션 1세대로서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나.

▷외환위기(1998년)다. 파리에서 한창 활동할 때 환율이 치솟았다. 한국 패션 깃발을 꽂으려고 외국에 갔는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언론도 깜짝 놀라더라. 조금만 더 있으면 비비안 웨스트우드(영국 출신 유명 디자이너)처럼 뜰 수 있다고 말리더라. 하지만 파리 사무소와 뉴욕 숍을 유지할 만한 자신이 없더라. 10년간 외국에서 활동하느라 서울 테헤란로 빌딩이 날아갔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재충전할 겸 한국에서 충실히 작품을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패션 1세대 중에 가장 많이 라이벌 의식을 느낀 사람은.

▷박윤수, 한혜자, 이신우, 지춘희, 앙드레김 등을 패션 1세대로 꼽을 수 있다. 사실 모두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모두 친하게 지냈다. 컬렉션이 시작되면 서로 전화 한 통을 안 하고, 중간에 만나도 절대 작품 이야기는 안 했다. 외국에 가서 똑같은 원단을 샀는데 작품은 다 달랐다. 신기할 정도로.

―오래전 앙드레김(1935~2010)과 진태옥 대담을 추진하려고 했다. 그런데 앙드레김이 '그분(진태옥) 무서워요'라며 고사했다. 왜 그랬을까.

▷나도 앙드레김이 무서웠는데. 그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했다. 우리(패션 1세대)는 다 함께, 그분은 나 홀로. 근데 왜 나를 무서워했을까.

―단순한 선과 색깔을 추구하게 된 이유는.

▷내 패션 철학이다. 디자인이 공허하면 자꾸 붙이려고 한다. 그런데 뜯어내는 과정이 그렇게 아플 수 없다. 마치 각질을 뜯어내는 고통을 느낀다.

―패션 불황이다. 예전만큼 옷이 잘 팔리나.

▷지금도 잘된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한민국에 너무 멋쟁이가 많다. 어쩜 그렇게 내 옷을 잘 소화하는지, 똑 떨어지는지….

―치과의사의 길을 가던 딸(노승은)을 패션 디자이너로 만든 이유는.

▷내 후계자가 필요했다. 딸에게 '평생 남의 입안만 들여다보지 말고 세상을 행복하게 살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딸이 마흔다섯 살에 셋째아이를 낳고 (디자인을) 그만뒀다. 애한테 올인해 나도 잘 만나지 못한다. 참 감각이 있었는데 아쉽다.

―두 아들은 여전히 인테리어숍 '태홈'에서 같이 일하나.

▷첫째 아들(노승욱)만 남고 둘째(노상원)는 나갔다.

―자식까지 끌어들인 패션의 매력은 무엇인가.

▷나를 자극하고 흥분시킨다. 그게 매력이다. 내 패션은 일기이자 반성문이기도 하다. 발자취를 남기고 반성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결국 인생도 바느질 아닌가.

▷맞는다. 뭐든 잘 꿰야 좋은 인생이다.

―디자이너로서 더 이루고 싶은 게 있나.

▷없다. 너무 욕심을 가지면 안된다. 인생의 마지막이 망가지고 불행해진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일이 안될 때는 어떻게 푸나.

▷수영과 헬스. 주중에는 바빠서 주말에 운동을 한다.

―은퇴를 고민한 적은 없나.

▷내 열정이 은퇴를 용납하지 않는다. 죽는 날이 퇴임식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유, 포용, 지혜가 생겨나 좋다.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며 산다. 사람들이 잘 쳐다보지도 않는 들꽃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후 아이슬란드 여성 가수 비요크의 음반을 건넸다. 이 음악을 들으면 진태옥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거라면서.

디자이너 진태옥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진태옥의 기억은 또렷했다. 그는 1934년 6월 2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1963년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한 후 '이종천패션연구소'에서 실무를 배웠다. 1965년에는 서울 명동에서 브랜드 '프랑소와즈'를 설립해 한국에 기성복 시대를 열었다. 전통 문양과 색상을 서양 복식에 접목한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유니폼과 아시아나항공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1989년 서울패션협회(SFA) 창단 멤버로 1993년까지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90년 이후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컬렉션에 매회 참가하고 있다. 1993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컬렉션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뉴욕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에 입점하고 파리에도 부티크를 열었다. 1999년에는 영국 예술 전문 출판사인 파이돈사가 선정하는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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