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가수 김연자와 가족 이야기

2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가수 김연자와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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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국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김연자를 한류라고 부르지 마라. 그녀는 한류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부터 한복을 입고 일본 무대에 선 가수다. 오로지 ‘한국인 김연자’라는 타이틀로 엔카의 여제가 됐다.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과 각종 음악 차트 1위, 연말 인기 프로그램 홍백가합전 출전, 디너쇼 연일 매진 등 그녀의 이력을 단 몇 줄에 담기는 쉽지 않다. 김연자는 향후 2년간 일본 스케줄이 모두 정해져 있을 정도. 그녀가 가족을 만나러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2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가수 김연자와 가족 이야기

2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가수 김연자와 가족 이야기

김연자를 만나다
기자는 지난 2007년에 일본 신주쿠 케이오프라자 호텔에서 열린 김연자(50)의 크리스마스 디너쇼를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 객석은 만석이었고 일본의 유명 인사들도 참석한 공연이었다. 열창하는 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매너 그리고 열광하는 현지 사람들까지 매우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공연 막바지에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그녀가 자랑스러워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일본에서 그녀의 높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그녀를 한국에서 다시 만나다니 여간 반갑지 않았다. 막상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때 무대에 섰던 그 사람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친근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톱스타에게서 느낄 수 있는 위화감이 전혀 듣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일까. 그녀는 고국 방문과 가족을 만난 기쁨에 들떠 있었다. 비공식적으로 따지면 딱 1년 만의 방문이라고 한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가족을 보러 한국에 들어왔어요. 특히 연말은 늘 가족과 보냅니다.”
그녀는 가족의 큰 버팀목이었고 그녀가 타국에서 노래를 부르는 원동력도 한국에서 응원하는 가족 덕분이었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그녀보다 열일곱 살 어린 막내 여동생 수진씨(35)도 언니를 무척이나 자랑스워했다.

“일본에서 항상 한복을 입고 한국어로 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더없이 자랑스러워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언니가 제겐 부모님과 다름없어요. 저도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언니가 항상 회사 월급만큼 용돈을 쥐어주곤 해요(웃음).”

그녀는 현재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면세점의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어릴 때 함께 대중목욕탕에 갔다가 ‘김연자가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한 동생이다.

“어렸을 때는 언니가 무서웠어요. 장난을 치다가도 엄마가 ‘언니한테 이른다!’고 겁을 주면 그만둘 정도였지요(웃음).”

어머니 김옥순(70) 여사는 딸이 큰 공연이 치를 때마다 일본을 찾곤 하는데 아직도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딸의 모습을 떨려서 볼 수가 없단다. 김연자는 지난해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일본에서 성대하게 치러준 효녀다.

“한국에서도 잔치를 했지만 아무래도 일본에서 20년 이상 생활해온지라 지인이 많아요. 특히 식구처럼 돼버린 골수 팬들이 있거든요.”

이번 고국 방문길에도 따라나선 일본 팬들의 모습을 그녀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낸 싱글 앨범만 해도 31장. 종합 앨범과 골든 앨범을 합치면 50장 정도 된다. 지난해 8월 2일 발매한 싱글 앨범이 31번째 곡인 ‘동트기 전’이다. 그 주 오리콘 차트 엔카 부문에서 3주간 1위를 했다. 여기저기서 공연 의뢰가 쇄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였다. 그 당시 그녀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당했다. 한국에 있는 아버지가 급성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하늘로 간 아버지, 사부곡
“나중에 들어보니 입원하신 지 이틀 만인 지난 8월 8일에 돌아가셨더라구요. 8월 2일에 새 음반이 발매된 상황이라 공연이 많았어요. 가족들이 일부러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제게 비밀로 했죠.”

큰 공연을 앞둔 김연자에게 아버지의 비보를 알릴 수가 없었다. 분명 장녀인 그녀가 받을 충격이 클 것이고 만사 제치고 당장 한국으로 달려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의 공연도 팬들과 지켜야 할 소중한 약속이라는 것을 이미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공연을 끝낸 후 회식 자리에 가서야 그녀는 아버지의 비보를 들을 수 있었다.

1 한국에서 활동하던 당시 사진. 고(故) 이주일과 이은하의 모습도 보인다. 2 한복을 입고 해외 공연을 다니던 시절 와이기획 유수태 대표와 찍은 사진. 3·4 1987년 일본 도쿄음악제 참가한 당시 모습.

1 한국에서 활동하던 당시 사진. 고(故) 이주일과 이은하의 모습도 보인다. 2 한복을 입고 해외 공연을 다니던 시절 와이기획 유수태 대표와 찍은 사진. 3·4 1987년 일본 도쿄음악제 참가한 당시 모습.

“울고 또 울었죠.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라 충격이 컸어요. 아버지는 항상 당당하고 강한 모습이셨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로 소식을 들고는 그 자리에서 1시간가량을 울었어요. 즐거워야 할 회식 자리가 그야말로 초상집이 됐지요.”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연말이 돼서야 귀국해 아버지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늘 불변할 것 같잖아요. 근데 이제는 영영 아버지를 볼 수 없다니…. 너무 큰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부모님은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인데….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모든 걸 취소하고 달려왔을 텐데… 큰딸로서 불효를 했어요. 죄송한 마음뿐이죠.”

아버지는 그녀가 가수로 성장하기까지 큰 버팀목이 되어줬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긍지와 자립심을 키울 수 있도록 해준 존재였다.

“가수가 되고 나서 한창 어려울 때는 미장원에 갈 돈이 없었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집에서 손수 머리를 만져주셨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는 고향인 전남 광주에서 이발소를 했다. 그녀가 공부하는 것보다 노래할 때 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발소에 온 손님 앞에서 매일 노래를 시켰다. 결국 열네 살이 된 그녀에게 가수가 되라고 완행열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아버지의 숙원대로 열다섯 살 때 ‘TBC 가요신인스타’에서 우승을 했어요. 당시 이미자의 ‘수원 처녀’를 불렀는데 이미자 선생님의 목소리와 흡사하다는 평을 들었어요. 그리고 1974년 10월에 첫 앨범을 냈지요.”

1974년 김연자는 ‘말해줘요’로 데뷔했다. 그리고 1977년 18세가 된 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공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월급으로 안정적인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수은등’ 등 히트곡을 내고 올림픽 폐막식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부르는 행운을 거머쥐었어요. 일본에서도 반응이 좋았죠. 3년간 활동하고 돌아온 한이 있어 재도전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스물세 살에 재일교포 김호식씨(68, 현 예총 일본지부장)와 결혼했다. 일본 연예계를 잘 아는 남편은 그녀에게 일본 진출을 다시 한번 제의했다. 그렇게 그녀는 또 한번 일본행을 택했고 1988년 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엔카 여제가 되기까지… 지난 22년
그녀는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은 노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 버전으로 노래하며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인기를 얻었다. 그녀의 일본 열도 정복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 처음 NHK ‘홍백가합전’에 한복을 입고 출연했다. 홍백가합전은 출연진으로 선발되는 것만으로도 인기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권위있는 연말 가요 프로그램이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이 프로그램을 보며 1월 1일을 맞는 것이 관례가 됐을 정도다. 이후 김연자는 1994년, 2001년에도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그녀는 앨범을 출시할 때마다 큰 인기를 얻었고 디너쇼는 물론 해외 공연 제의도 물밀 듯 들어왔다. 그간 공연한 나라를 물어보니 미국, 프랑스, 중국, 쿠바,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베트남 등등으로 인터뷰 중 “너무 많은 나라를 다녀서 어느 나라를 다녀왔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을 정도로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노래를 했다. 그녀의 공연 관객석 구성은 간단하다. 한국인, 일본인, 그곳 현지인이 각각 1/3씩 채워진다. 20년이 넘은 골수팬들은 해외 공연까지 원정을 가는 경우도 많다.

좌로부터 김연자, 어머니 김옥순 여사, 동생 김수진씨.

좌로부터 김연자, 어머니 김옥순 여사, 동생 김수진씨.

“아직도 기억에 남는 팬이 있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콘서트에 와서 응원해준 분이 계세요.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인께서 돌아가신 분의 사진을 품고 제 공연에 오셨더라구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남편이나 부인이 팬인데 입원해 있으니 응원 메시지를 써달라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가 이토록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얼까.

“잘 모르겠는데…, 무대에서 열창하는 모습이 좋다고 해요. 여느 일본 가수들과 달리 노래에 감정을 실어 강하게 호소하는 부분이 와 닿는다고 하세요. 그리고 체구가 작은 제가 넓은 무대를 종횡무진 하는 모습이 좋다고 하시구요.”
요즘 일본에서는 ‘배용준 김치’가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김치 브랜드는 ‘김연자 김치’가 먼저다. 또 그녀와 한국어로 대화하기 위해 한글 공부를 하는 팬들도 있다. 지난해에는 2007년부터 시작한 일본 데뷔 20주년 투어를 마쳤다.

“올해로 일본 활동 22주년이 돼요. 저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고생을 모르고 지냈어요. 마치 1년을 하루같이 정신없이 20년을 보냈죠. 그렇지만 앞으로 노래 부를 날이 많이 남은 만큼 고생을 하게 될지 어떨지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죠(웃음).”

그녀는 자신이 잘못하면 한국이 비난받지 않을까 늘 긴장하며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귀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저는 절대 그런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은 고국이고 제 인생의 마지막은 역시 한국에서 보내고 싶거든요. 귀화 고민도 해본 적 없어요. 요즘은 보아나 동방신기 등 일본에 와서 활동하는 후배 가수들이 많아서 좋아요. 고맙고 나름 보람도 느낍니다.”

그녀는 현재 도쿄 스기나미구에서 18세 연상의 남편, 그리고 치와와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근처 공원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운동이다. 자녀가 옆에 있으면 좋을 나이이건만 그녀는 아이를 두지 않았다.

“스물셋에 결혼했지만 노래를 하다 보니 기회를 놓쳤어요. 후회는 없어요. 제게는 평생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바로 노래요.”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결심
그녀는 이번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가족과 고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20년을 뒤돌아보면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잊게 해주고 힘이 돼준 것은 가족과 고국이었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싶다.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녀의 히트곡 ‘수은등’의 작사가이기도 한 ‘와이기획’ 유수태 대표가 나서서 그녀의 한국 복귀를 돕는다. 이번 방문 동안 2월 말에 발매될 그녀의 음반 녹음을 마쳤다.

“김연자는 우리들 사이에서 ‘레코드 녹음 기계’라고 불려요. 하루에 30곡도 문제없이 부르죠. 한 곡을 세 번 이상 부르지 않아요. 그래도 깔끔하게 곡을 완성시키니까요.”(유수태 대표)

이번 음반에는 송창식 작사·작곡의 ‘안 돼’, ‘당신은’과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불꽃’, 히트곡 ‘수은등’, ‘아침의 나라에서’ 등이 담긴다.

“송창식 선배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주지 않기로 유명한데 제게 곡을 주셨으니 영광이지요. 선배님께서 진두지휘를 하고 같이 활동하게 될 것 같습니다. 듀엣 계획도 세우고 있어요.”

그녀는 일본 활동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다면 오는 5월에는 국내에서 콘서트를 열고 싶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할 예정이다. 드디어 한국에서 노래를 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처음 음반을 취입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어요. 신인으로 돌아간 것 같아 정신이 없어요(웃음).”
한국에 2주간 머물면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만났다. 20년 동안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팬들이 고마울 뿐이다.

“20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솔직히 고국에 대해 잊어버린 것도 많아요. 그동안 한국 가요계도 많이 변했을 테고 그야말로 신인이죠. 긴장도 되고 겁도 많이 나요. ‘언젠가는 와야지’ 늘 생각했는데 용기를 내지 못했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녀는 음악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 든든한 가족과 팬들이 함께하는 즐거운 도전이 될 것이다.

“절 잊지 않은 팬들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드리고 싶어요. 20년간 잊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한 거잖아요.”

김연자는 일본으로 돌아가자마자 현지 싱글 녹음 작업에 들어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가 피곤할 때나 심신이 지칠 때 찾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한국 음식이다. 일본에서 2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고 분에 넘치는 사랑도 받았다는 그녀. 하지만 직접 만난 그녀는 누가 뭐래도 ‘아침의 나라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 경향신문 포토뱅크, 와이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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