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오늘은 전기(傳記)영화인 ‘트럼보’(감독 제이 로치)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지.

배종옥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인 달튼 트럼보(Dalton Trumbo·1905~1976)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시대 상황 묘사가 적잖이 나오지.

신용관 194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옛 소련의 냉전 분위기가 삼엄하던 시기지. 미국에서는 공산당원들을 색출해내기 위한 ‘반미활동 조사위원회(HUAC)’를 조직했고, 조사위원회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 배우, 시나리오 작가 등 40여명을 청문회에 소환했지.

배종옥 당시 일급작가 대우를 받던 트럼보를 비롯한 동료 작가들이 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했고, 이른바 ‘할리우드 텐(10)’으로 지목되어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어.

신용관 감옥에까지 가야 했던 트럼보가 출소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11개의 가명을 내걸면서 계속 작품을 썼다는 거고. 그중에는 ‘로마의 휴일’(1953)과 ‘브레이브 원’(The Brave One·1956) 등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작품이 2개나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

배종옥 감옥에서 나온 뒤 그전보다 작은 집으로 옮기고, B급 영화사의 3류 각본을 대필해주고, 자식들을 시켜 대본을 영화사에 전달하는 장면 등은 무척 인간적으로 다가오더라고.

신용관 생존을 위한 처절한 글쓰기였지. ‘가족의 노예로, 열 손가락으로 가족을 먹여살렸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각성제를 먹어가며 3일 만에 시나리오 한 편을 끝내기도 하고. 집필 장면들을 채운, 화면 가득한 담배 연기는 보는 사람마저 숨이 턱턱 막히게 만들더군.

배종옥 그런 측면들을 잘 살렸으면 좀 더 감동적이었으려나?

신용관 그랬을지도. 딸의 생일 케이크 촛불 끄는 그 짧은 시간마저 내지 않아 가족들의 반발을 사는 장면에서는 ‘식구(食口)’의 의미까지 생각이 나더군.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가족들 밥을 먹이기 위해 돈을 버느라, 정작 가족들과 끼니를 같이할 시간이 없는.

배종옥 전반적으로 나는 큰 감동을 받지 못했어. 인물 묘사가 평면적이었다고나 할까, 정확한 원인을 대기엔 애매하지만 그냥 그저 그랬어. 인물을 다룬 영화 중에 ‘링컨’(감독 스티븐 스필버그·2012)이라고 있는데, 영화를 좀 지루해 하며 보긴 했지만 어찌됐든 그 영화를 통해 링컨이란 인물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거든. 그런데 ‘트럼보’엔 그런 강렬함이 없는 듯해.

신용관 주인공 트럼보의 형상화에 미흡했다는 얘기네.

배종옥 원래 할리우드가 영화를 만들 때 실제 인물과 상당히 근접하게 생긴 배우를 쓰거나 그렇게 분장을 하는데 이번 영화는 실제 모습과 많이 달랐던 거 같아. 굉장히 독특한 캐스팅으로 느꼈어.

신용관 트럼보 역할을 맡은 브라이언 크랜스톤은 꽤 관록 있는 배우더군. ‘브레이킹 배드’라는 드라마로 에미상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네 번이나 받았고, ‘트럼보’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어. 글을 무리하게 쓰면서 피폐해져 가는 모습의 연기는 좋더군. 그런데 극중 40대 나이였을 시기가 거의 50대 후반으로 보이긴 하더라. 딸이 손녀처럼 느껴졌어.(웃음)

배종옥 할리우드는 묘사하는 등장인물보다 나이가 10년 정도 많은 배우를 쓰는 경향이 강하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맘마미아’(2008) 찍을 때 메릴 스트립이 만 59세였어.

연기를 해보면 알지만 자기 나이보다 어린 역할은 연기하기가 수월해. 다 겪어본 경험과 감정들이니까. 하지만 같은 나이나 더 늙은 나이를 연기하는 건 무척 힘들어. 그래선지 서양에서는 여배우들의 전성기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야.

신용관 그거 말 되네. 우리는 특히 여배우들은 젊은 배우를 선호하잖아. 그러고 보니 트럼보를 계속 괴롭히는 가십 칼럼니스트 ‘헤다 호퍼’ 역을 맡은 여배우도 상당히 들어 보이더군.

배종옥 영국 배우 헬렌 미렌(71)이지. ‘더 퀸’(2006)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야. 화가 클림트를 다룬 ‘우먼 인 골드’(2015)의 주연도 맡았었고.

신용관 영화에서 표현된 트럼보의 아내는 정말 완벽에 가까운 여성이더군. 전형적인 외유내강 유형에 남편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감싸주는. 트럼보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 아들에게 ‘하루에 한 번 꼭 엄마를 웃겨 드리거라’라고 당부하는 장면은 살짝 짠했어.

배종옥 부인 역할을 맡은 배우(다이안 레인)가 너무 예쁘게 나와서 오히려 영화 몰입에 방해가 된 경우 같아. 영화에 묻혀 가는 배우가 나왔으면 그 가족의 고통스러운 시기가 더 잘 전달됐을 거 같은데. 다이안 레인이 너무 화려하게 생겨선지…. 작품에선 ‘배우’가 아니라 ‘역할’이 보여야 하거든. 여배우는 힘들어. 너무 예뻐도 안 되고, 못생겨도 안 되고.(웃음)

신용관 ‘트럼보’에는 1940~1950년대 할리우드의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당시 자료화면이 부분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 트럼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데 영향을 끼친 장본인으로서의 존 웨인, 트럼보에게 ‘스파르타쿠스’의 각본을 맡겨 다시 대작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준 배우 커크 더글라스 등의 모습은 흥미로웠어.

배종옥 할리우드 일급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다룬 작품이라선지 중간중간에 위트 있는 대사들이 적지 않더군. 아무래도 가장 인상 깊은 대사는 조사위원회로부터 정치적 입장을 추궁받는 장면에서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노예밖에 없다”라고 답변을 거부하는 대목이겠지.

신용관 급진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할리우드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을 만들어낸 주인공의 정체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남아 있는 듯해.

배종옥 ‘트럼보’에 등장하는, 동료들을 배반한 배우와 달리 트럼보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고 생각해. 저급한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고, 결국 쓰고 싶은 작품을 써서 오스카상까지 받았으니.

신용관 그런가? 어쨌든 내 별점은 ★★★. 한 줄 정리는 ‘극적 인물이 평면적 연출을 만났을 때’.

배종옥 나는 ★★. ‘신념을 지키고 산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구나.’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