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다 프랑스에 건너온 뒤에도 조국의 저항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廈·1898∼1960)의 구체적인 발자취가 재불 동포들의 노력으로 그의 사후 60년 만에 확인됐다.
장자크 씨는 부친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교류한 서신 등 희귀문서들을 지난 2006년 누나로부터 물려받아 보관해왔으며 최근 한인 부부의 도움으로 이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홍재하는 1898년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위험에 처하자 1913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건너갔다. 그는 1919년 전후 영국 에든버러를 거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의 노력으로 다른 한인 34명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왔다.
여기까지는 학계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나, 이들과 그 후손이 2차대전 종전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후 재불 동포 부부 김성영(렌 경영대 교수), 송은혜(렌2대 강사) 씨가 장자크 씨를 한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되며 홍재하의 삶의 궤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장자크 씨에 따르면, 홍재하는 1920년대 파리의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를 거쳐 프랑스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자신이 번 돈을 계속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해방 후 처음 설치된 주불 대한민국 공사관 문서에서 그는 체류목적에 대해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라고 적었다. '국속'을 '國束'으로 읽을 경우,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것에 복수하고 인류 평등에 공헌하고자 프랑스로 건너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오매불망 고국행을 그리던 그는 프랑스와 한국이 해방된 뒤에도 귀국하지 못했고, 고국이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비탄에 빠져 말을 거의 잃었다고 전해졌다.
이후 홍재하는 전쟁 구호물자 조달에 매달렸고, 휴전 뒤엔 귀국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960년 암으로 타계했다. 마지막까지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유해는 현재 파리 근교에 묻혀 있다.
온라인이슈팀 issu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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