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가습기 살균제 7년만에 수사… '매값 폭행' 담당했던 전직 검사도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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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4.06. 오전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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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수사 왜 오래 끌었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는 지난 1일 박모(53) SK케미칼(현 SK디스커버리) 부사장을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박 부사장은 법무부, 서울중앙지검 부장 검사 등 요직을 거친 검찰 출신이다. 법복을 벗고 기업에 근무하던 이가 구속까지 된 것은 이례적이다.

박 부사장은 가습기 살균제 관련 유해성 연구 자료를 은폐한 혐의를 받는다. SK케미칼 측이 조직적으로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 관련 자료를 은폐했는데 여기에 박 부사장의 지시 등이 있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2016년 검찰 수사로 처벌됐던 옥시, 홈플러스, 롯데마트 외에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등은 피해자들에게 사과나 배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사진 왼쪽은 2016년 8월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특위 회의 모습. 오른쪽은 같은 시기 시민단체가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이마트 등을 검찰에 고발하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성형주 기자·장련성 객원기자


폭행 피해자 기소한 후 SK행

박 부사장은 2011년 9월 검찰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1월 SK에 입사했다. 검사 출신으로 박 부사장의 고교, 대학 선배이기도 한 윤모 SK 사장의 추천이 있었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박 부사장의 입사는 여러 뒷말을 낳았다. 그는 불과 몇 개월 전 SK 오너가인 최철원 전 M&M 대표의 '매값 폭행' 관련 사건을 처리한 부장검사였다.

지난 2010년 11월 최 전 대표는 고용 승계 거부에 항의 시위하던 유모씨를 회사 내로 불러 야구방망이로 폭행했다. 화장지를 말아 유씨 입안에 넣고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이후 유씨에게 1000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매값이라며 줬다. 유씨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인수·합병한 M&M이 근로자들에게 고용 승계 조건으로 '화물연대 탈퇴와 가입 금지'를 제시한 데 반발해 시위에 나섰다가 폭행을 당했다.

박 부사장은 M&M 측이 피해자 유씨를 고발한 사건을 담당했다. 그는 유씨를 업무 방해, 일반 교통 방해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겼다. '유씨가 시위 도중 화물차로 도로를 막았고 운전석에 흉기를 두는 등 위협 행위를 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았다. 박 부사장은 SK에 전무 급으로 입사한 후 윤리경영 부문을 맡으며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은 1994년 국내 최초로 '가습기 메이트'라는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한 회사다. 박 부사장이 은폐한 자료들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유공은 1994년 10월부터 석 달간 서울대 수의대 이영순 교수팀에 흡입 독성 실험을 의뢰했다. 실험 쥐를 가로세로 1m 크기의 틀에 넣어 호흡 독성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당시 연구 보고서에는 쥐의 백혈구 수 변화가 감지돼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 등 가습기 메이트가 인체에 해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SK케미칼 측은 2015년 환경부 조사, 이듬해 국회 국정조사 등에서 이 자료가 없다고 얘기했다.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김철 SK케미칼 대표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가 시작된 후 SK케미칼 측이 보고서 사본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검찰은 이 자료를 구하기 위해 애경산업 본사뿐 아니라 법률 대리를 맡은 김앤장까지 압수 수색했다. SK 관계자는 "연구진 이름이나 데이터 등이 빠진 전체 문서의 일부인 12쪽 사본만 가지고 있어 국정조사 등에서 없다고 한 것"이라며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임의 제출 방식으로 제출했다"고 했다. 사건 변호를 맡은 송기호 변호사는 "사본이라고 증거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 데다 충분히 사정을 설명하고 자료를 내놓을 수도 있었다"며 "보고서가 나온 것은 1995년 초였지만, 판매는 이미 1994년 11월 시작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7년간 수사 피했던 SK와 애경

전문가들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유해 물질이 버젓이 유통돼 살균제 원료로 쓰였고, 가습기 살균제가 공산품 안전 검사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어린이와 임산부를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피해자가 나오는 등 경고음이 울렸지만 역학조사를 하고 가습기 살균제를 수거한 것은 2011년이 되어서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그때까지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는 1000만개가량, 800만명이 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6년 서울중앙지검 가습기 살균제 특별수사팀은 정부 관계자들을 겨냥했다. 환경부,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질병관리본부, 식품의약품안전처, 국가기술표준원, 국립환경과학원 등이 대상이었다. 수사팀에선 장관급 소환 대상자가 담긴 리스트도 만들었다. 그러나 수사는 진전되지 못했다. 그해 7월 최순실 국정 농단 스캔들이 터지며 검사 대부분이 이 사건에 투입됐기 때문이다. 여력이 없었다.

이번에 수사 대상이 된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등은 2012년 8월 고발됐지만 7년간 수사를 받지 않았던 기업들이다. 검찰이 그동안 이들을 수사하지 못했던 이유는 가습기 살균제 원료의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유해성이 입증된 원료는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와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뿐이었다. 옥시, 롯데마트, 홈플러스, 버터플라이이펙트 등이 PHMG와 PGH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처벌됐다.

SK와 애경 등이 만든 '가습기 메이트'의 원료 CMIT(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는 유해성이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환경부가 지난해와 올 초, CMIT·MIT 역시 유해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 SK케미칼과 애경 등은 이제껏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하거나 배상 조치에 나선 적이 없다.

옥시와 비슷한 처벌 받을 듯

SK케미칼과 애경 관계자들은 이전 수사를 받았던 옥시레킷벤키저 등 관계자들과 비슷한 혐의가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2016년 검찰 수사에서 신현우 전 옥시 대표를 업무상 과실치사, 사기 혐의 등을 적용해 재판에 넘겼고,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징역 6년 형이 확정됐다.

검찰은 SK케미칼과 애경 모두 안전성 검사 등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인체에 해가 없다는 식의 광고를 한 혐의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 경우 업무상 과실치사상(過失致死傷), 사기나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앞서 지난 2월 가습기 메이트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만들어 원도급 업체인 SK케미칼에 넘긴 하도급 업체인 필러물산 김모 전 대표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다만 애경 측은 "가습기 살균제를 SK케미칼 측으로부터 매수해 판매한 것일 뿐 제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유공에서 개발한 이 가습기 살균제는 2002년까지는 유공과 SK케미칼, SK에서 계열 분리한 SKM의 계열사인 동산C&G를 통해 판매했다. 2001년 동산C&G가 파산하면서 애경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이를 넘겨받아 판매·유통했다.

그러나 검찰은 애경의 혐의를 입증할 정황을 다수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SK케미칼이 2005년부터 이전과 달리 라벤더 향을 넣은 새로운 가습기 메이트를 애경에 제공했는데, 원료 성분이 바뀌었는데도 안전성 검사 자료를 요구하거나 받지 않은 것도 잘못이라고 보고 있다. 애경 측으로부터 확보한 이영순 교수팀의 흡입 독성 실험 결과 자료 중 일부가 삭제된 것도 수상한 정황 중 하나다.

[김아사 기자 asa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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