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감기약, 집으로 배달하게 해달라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편의점 CU가 1일부터 도시락, 삼각김밥, 음료 등 200여 종류 상품을 고객이 원하는 곳으로 배달해주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배달앱으로 1만원어치 이상 주문이 접수되면 배송전문회사에 맡겨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배달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단 4월에는 수도권의 CU 직영점 30여 곳에서 시행하다가 점차 배달 가능한 지역을 넓혀갈 것이라고 한다. '배달서비스 전쟁'이 온라인상점, 대형마트, 슈퍼에 이어 편의점으로 옮겨 붙었다. 이제 '소비자 편의시대'라며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각지대' 탓에 짜증이 더 커지는 국민도 있다.

편의점에서는 2012년부터 감기약, 진통제, 소화제 등 의약품 13개 종류를 판매하고 있다. 약국이 문 닫은 시간에는 발만 동동 굴러야 했던 소비자들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자 마지못해 편의점에 판매하도록 허용해준 약품들이다. 이제 편의점이 배달서비스에 나선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감기약, 진통제도 집으로 배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언감생심이다.

한국에선 그런 소박한 상상도 사치다. 약사법 50조 때문이다. '약국 개설자와 의약품 판매업자는 그 약국 또는 점포 이외의 장소에서 의약품을 판매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 조항이다. 이 조항 탓에 한국에서 배달판매하는 행위는 무조건 불법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에선 원격진료나 약품 배달이 자유롭게 이뤄진다. 스마트폰 같은 전자통신 장비를 이용해 원격으로 의사에게서 진찰받은 뒤 집으로 의약품을 배달받을 수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아마존은 지난해 6월 온라인약국 '필팩'을 인수해 약품 배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어느 지역에서나 집에서 의약품을 배달받을 수 있다.

글로벌 운송업체 UPS는 지난주부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드론으로 구급약품이나 혈액 샘플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도 시작했다. 드론에 2.3kg 이하의 의료용품들을 싣고 20㎞ 떨어진 지역까지 순식간에 배달해 준다. "그동안 자동차로 30분 걸리던 곳도 3~4분이면 배달을 완료할 수 있다"며 자랑이다. 산간벽지나 섬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시도되던 드론 배송이 도심에서 상용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료용품은 배달 속도에 따라 사람의 생명까지 좌우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구글도 2014년부터 구호물품 드론 배송사업을 시도해 왔고 독일 DHL도 의약품 드론 배송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이처럼 배달 혁신은 의료 분야에서 먼저 진행돼야 정상이다.

한국은 거꾸로다. 원격의료는 의사들이 가로막고 있다. 약품 배달은 약사들이 막는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다. 혼자 생활하면서 가장 서러운 때는 아플 때라고 한다. 1인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요즈음 아프기만 해도 서러운데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의사·약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국민들은 더 서럽고 짜증난다.

입버릇처럼 국민과 민생을 강조하는 정치인·공무원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기에 이 모양 이 꼴인가. 하기야 의사·약사 밥그릇 앞에선 '제왕적'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대통령도 바지저고리에 불과하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 대통령 5명이 연달아 원격의료 도입을 지시했지만 20년째 진척이 없다. 그나마 원격의료는 "해야 한다"는 인식이라도 있다.

의약품 배달은 어떨까. 보건복지부에 전화를 걸었다. 편의점이 배달서비스를 시작했으니 감기약 등 13개 의약품은 당연히 배달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정부가 약사법 50조를 수정하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한 것인데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한다. "국회의원이 약사법 50조를 수정하는 법률 개정안을 제출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사례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약사법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50조에 단서조항이 있다. 시장·군수·구청장이 승인하면 약품 배달을 허용하는 예외조항이다. 복지부에 다시 물었다. "시장·군수·구청장이 약품 배달을 승인한 사례가 있느냐"고 했더니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국민은 불편한데 공무원·국회의원·지방자치단체장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답답해서 또 물었다. "법으로 약품 배달을 금지한 나라가 한국 외에도 있느냐"고 했더니 "그런 나라가 있기는 있다는데 조사된 자료는 없다"고 했다. 지구촌의 약품 배달시장은 천지개벽하고 있는데 한국은 갈라파고스다. 의사와 약사는 '갑'이다. 정치인·공무원은 '방관자'이고 국민은 '봉'이다.

[최경선 논설위원]

▶매경 뉴스레터 '매콤달콤'을 지금 구독하세요
▶뉴스 이상의 무궁무진한 프리미엄 읽을거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