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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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3.15. 오전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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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⑥동아시아의 서양인


왜 우리가 ‘서양인’의 모습을 낯설어하는가. 지난 5천년간 서양인들은 우리 이웃으로 꾸준히 곁에 살면서 새로운 문화를 공급하고 전달해왔다. 그러나 아편전쟁과 의화단의 난을 거치며 서양인에 대한 극도의 외국인공포증과 서구 문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대주의가 교차하면서 서양인은 이질적인 모습이 되었다.


“회회아비가 내 손을 쥐더이다.” 고려가요 ‘쌍화점’은 만두가게를 하는 위구르인과 고려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던 신라에서 통일신라를 거쳐서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국제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고려는 적극적으로 서역인의 귀화를 장려했고, 그들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회회아비’로 대표되는 실크로드의 사람들은 우리 역사의 일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후 대외적으로는 ‘소중화’를, 내부적으로는 ‘단일민족’을 강조하면서 서양 계통의 사람들은 타자화되었다. 약간 코가 높거나 이국적인 용모의 예술품이 나오면 ‘서역인’으로 통칭할 뿐, 우리 역사 속에서 서양인 계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는 지난 5천여년간 서양인 계통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실크로드에 등장한 최초 서양인

동아시아로 유입된 최초의 서양인 또는 유럽인은 약 5천년 전 목초지를 찾아서 동유럽에서 유라시아를 건너온 유목민들이다. ‘토하르’라 불리는 그들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다. 몽골을 거쳐서 중국 북방과 실크로드 일대로 진출했다. 특히 타클라마칸 사막의 로프노르 지역에 정착했던 일파의 무덤인 샤오허 유적에선 생생한 유럽 인종들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건조한 사막기후 덕분이었다.

2013년 신장 로프노르 샤오허 11호 묘지에서 발굴된 서양 여성 미라의 모습. 강인욱 제공
이들이 가지고 온 선물이 있었으니, 바로 맥주와 국수였다. 5천년 전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이들이 가져온 보리 덕분에 새로운 술인 맥주가 등장했다. 황하 상류의 미자야라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보리와 구근류를 섞어서 술을 빚었던 토기가 발견되었다. 중국 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맥주를 만든 흔적이다. 보리와 함께 밀도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도 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로프노르의 샤오허 유적에서는 손으로 빚어 만든 국수가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렇듯 서양인의 일파는 유제품과 가죽을 제공하는 목축 이외에도 새로운 곡물들도 동아시아로 전래했다.

뜻밖에도 최초의 유럽인 흔적인 샤오허의 유물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도 있다. 100년 전 일본의 실크로드 탐험대가 현지에서 수집해 온 것이다. 물론 일본 탐험가들은 그 유적에 직접 가보지 못했고, 그 유물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 때에는 풀로 만든 바구니를 거꾸로 세워서 머리에 쓰는 모자라고 전시할 정도였다. 다행히 이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의 노력으로 2년 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실크로드를 따라 오던 서양인들은 실제 한반도 땅을 밟았을까. 사실 한반도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유목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대신에 다른 단서가 있으니,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서 동아시아로 들어온 유목인이 가져온 청동제련술이다. 약 4천년 전에 아시아 전역에 확산된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기가 최근에 정선 아우라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정선 아우라지의 석관묘와 제천 황석리에서 발굴된 인골에서 서양인 계통의 흔적이 있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소수일지라도 유럽인 계통의 일파가 한반도에 흘러 들어왔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진시황은 서양인이었을까

중앙아시아의 강성한 유목민족들이 다시 동아시아로 밀려온 시기는 약 2400년 전이다. 바로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서 오랑캐들을 막던 그때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시황 일파도 서양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012년에 진시황릉 서북부 쪽에서 99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은 젊은 여성이어서 후궁들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신분이 높은 여성으로 추정되는 인골을 복원한 결과, 중앙아시아나 페르시아 사람들의 인상이 나왔다. 발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시황릉 동쪽에서 발견된 또 다른 20대 남성 귀족 또는 왕자들의 무덤에서도 서양인의 흔적이 나왔다.

중국 언론에 보도된 2012년에 발굴된 진시황릉 근처에서 발견된 남녀 귀족의 인골복원도. 강인욱 제공
사실, 지금 중국의 간쑤, 산시성 일대에는 예로부터 ‘융적’이라는 유목민들이 살았고, 그들은 뚜렷한 서양인의 특징을 보인다. 그러니 진나라 사람 중에서 서양인 계통의 사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발견된 곳이 진시황릉 근처의 커다란 무덤이라는 데 있다. 이들이 진나라의 왕족 또는 귀족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인골이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와 그의 공주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호해도 이 인골의 나이와 비슷한 20살 때에 죽었으며, 무덤의 인골도 호해처럼 살해당해서 사지가 찢겨진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 일족이 서양인이라는 주장은 아직은 호사가들의 추정에 불과하다. 진나라, 그리고 그 이전의 주나라가 건립된 지역의 사람들은 ‘융적’이라고 하는 서양 계통의 유목민들이 중심이었음이 다시 고고학으로 증명된 것이다.

전국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기원전 4세기에 확산된 서양인 계통의 유목민들은 동쪽으로는 베이징 근처의 연나라까지 이어졌다. 연나라의 왕족들이 남긴 신장터우 무덤에서 고깔모자를 한 사람의 황금장식이 나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같은 무덤에서 한반도 세형동검문화에서 쓰이는 꺽창도 같이 출토된 데에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동호와 고조선을 침략했던 진개(秦開)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했다. 베이징 근처의 연나라를 매개로 유럽인계 유목민과 고조선의 사람들이 조우한 셈이다.

연나라 신장터우 무덤에서 출토된 서양인 모습의 황금 장식은 한국식 꺽창과 함께 발견되었다. 강인욱 제공
중국 북방에 등장한 새로운 유목민의 확산 배경에는 흉노가 있다. 실제로 흉노의 왕인 선우들의 무덤인 몽골의 노용-울에서 발견된 인물상에는 전형적인 몽골인과 함께 마치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계통의 인물이 함께 나왔다. 그런데 각 인물들이 표현하는 상황이 다르다. 몽골인 계통의 사람은 사슴을 사냥하는 무사의 모습이었다. 반면에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유럽인 계통의 사람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의식을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발굴을 하면 인골들은 대부분 몽골 계통에 가깝다. 아마도 서양인 계통의 실제 비율은 높지 않았으며, 그들은 주로 종교를 담당하던 사제나 사절단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렇듯 흉노는 당시 만리장성 일대의 다양한 유목민들을 차별 없이 통합하여 거대한 유목제국을 이루었다.

흉노 고분에서 발견된 서양인의 모습은 마치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계통의 인물상이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의식의 일종으로 환각 성분이 포함된 버섯을 들고 있다. 강인욱 제공
흉노 노용-울 고분의 사냥꾼은 전형적인 몽골인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강인욱 제공
우리 안의 서양인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다. 우리도 고대 인물상 중에서 코가 크거나 조금만 이국적이면 ‘서역인’ ‘아라비아인’ ‘소그드’ ‘위구르’ 등의 이름을 무리하게 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 이웃의 서양 계통 주민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치 금발의 외국인이면 무조건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 전에 신라 월성에서 터번을 두른 듯한 서기 6세기 토우가 출토되었다. 사람들은 소그드인 인물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소그드인은 터번을 쓰지 않았으며, 아랍에서 터번은 신라 멸망 이후 한참 뒤에 유행했다. 반면에 지난 3일 끝난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 전시의 대표적인 전시품인 고려시대 승려 희랑대사상은 코가 크고 얼굴이 길쭉해 서양인과 닮았다. 하지만 누구도 서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3일까지 열린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 전시의 대표적인 전시품인 고려시대 승려 희랑대사상은 코가 크고 얼굴이 길쭉해 서양인과 닮았다. 하지만 누구도 서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인욱 제공
이렇듯 우리가 판단하는 서양인들의 모습은 객관적이라기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선입견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러니 주관적으로 외형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인간의 외모에는 유전자뿐 아니라 문화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1950년대 산업화 이전의 한국인과 요즘 젊은 사람들을 비교하면 신장과 체형은 물론 외모도 누가 봐도 다르다. 또 미국이나 러시아의 동포들을 보아도 이민을 간 지 서너 세대만 지나면 어딘지 모르게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외형은 유전적인 요소에 생활과 식습관이 결합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모에서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혈연적인 관련성과 함께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 다시 생각할 점은 왜 우리가 ‘서양인’의 모습을 낯설어하는가이다. 지난 5천년간 서양인들은 우리 이웃으로 꾸준히 곁에 살면서 새로운 문화를 공급하고 전달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지난 5천년간 살아왔던 이웃 서양인들의 역사는 망각했다. 대신에 서유럽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물결과 함께 온 서양인들만 익숙해졌다. 그러나 아편전쟁과 의화단의 난을 거치며 서양인에 대한 극도의 외국인공포증(제노포비아)과 서구 문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대주의가 교차하면서 서양인은 이질적인 모습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서양인’들이 있다. 다행히 지금 한국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며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한다. 그 시작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5천년의 우리 이웃들을 다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미지의 땅’이라는 선입견 대신에 ‘우리의 이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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