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너머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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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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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베네수엘라 되기`
-차베스·마두로 포퓰리즘과 초인플레·석유 너머…
-미녀 대회와 초콜릿의 나라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미녀 대회 열풍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베네수엘라 되기(To be a Miss)`


[넷플릭스로 본 시끌벅적 중남미-5] 2월 14일은 '밸런타인 데이'다. 초콜릿 먹고 싶어지는 날이다. '장삿속'이라는 비판도 있고, 사랑이 씁쓸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삶이 외롭고 불안하고 지칠 때 달달한 초콜릿 하나가 힘이 될 때가 있는데, 초콜릿 하면 '베네수엘라'를 떼놓을 수 없다고 한다. 요즘은 매장량 기준 전 세계 1위 석유 부자나라, 포퓰리즘(인기에만 연연하는 무책임한 정책)의 대표주자, '두 명의 대통령' 막장 정국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베네수엘라는 맛과 향 좋은 '크리오요(Criollo)' 종 카카오 나무들이 쑥쑥 자라는 곳이다. 전국 각지에서 석유, 카카오 열매와 초콜릿, 럼이 나온다.

베네수엘라는 미스 유니버스 같은 세계 미인 대회에서 우승하는 미녀 나라로도 유명하다. '의느님'이 만들어낸 미인들이라는 비난도 많지만 성형하지 않으면 예선 진출부터 힘들다는 건 어느 나라나 비슷하긴 하다.

1922년 석유 자원 발견으로 베네수엘라는 `석유 부자 나라`로 급부상했다./출처=넷플릭스 캡처


오늘은 베네수엘라 얘기다. 어디 있는 나라인가 하고 찾아보면, 미국 아래 남미대륙에서 콜롬비아와 브라질, 가이아나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카리브 바다를 옆에 두고 있다. 안데스산맥이 이어지는 곳이라 유전지대로 유명하지만 아마존 우림·정글지역에 나이아가라를 넘어선다는 세계 최고 높이 폭포와 끝없이 이어지는 카리브 최장 길이 해변까지 펼쳐져 있다.

그래서인지 베네수엘라라는 이름은 아름다움과 관련 있다. 뜻이 '작은 베네치아'인데 15세기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웠던 이탈리아 아름다운 '물의 도시'에서 따왔다. 1498년 콜럼버스 항해를 통해 스페인 정복이 시작된 후 정복자들이 베네수엘라 해변과 마라카이보 호수를 보고 베네치아를 떠올린 김에 이름 붙였다고 한다.

복 받은 나라 같은데 이 나라 사람들은 뭐하고 살까? 아쉽게도 초 인플레이션과 볼리바르화 가치 폭락, '베네수엘라 엑소더스'나 시위 무력진압 같은 얘기가 대부분이다. 요즘은 '두 대통령 사태'가 국내 시위와 국제 사회 갈등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더 심각해보인다. 2016년에 나온 넷플릭스 '미스 베네수엘라 되기(To be a Miss)'는 베네수엘라 사람들 삶 전부는 아니지만 한 부분을 살짝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미녀 대회에 나가려는 베네수엘라 10대들에게 살 빼기는 필수다. /출처=넷플릭스 캡처


베네수엘라는 미인 대회 '참가'에 열광하는 나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전 세계 미인대회 우승 유명세가 한몫했다. 세계 3대 미인대회라는 미스 '유니버스·월드·인터네셔널'에서 줄줄이 베네수엘라 사람이 최고 미녀로 꼽혔는데 우승 횟수로 따지면 2018년 말까지 미스 유니버스 7번, 미스 월드 6번, 미스 인터내셔널 8번으로 이 기록을 넘어선 나라가 아직은 없다.

요즘 미녀 대회 인지도는 내리막길이다. 그래도 베네수엘라에서 미녀대회가 인기인 이유에 대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베네수엘라 되기'는 두 가지를 꼽는다.

미녀 대회의 끝은 살빼기가 아니다. 지젤 학원 같은 유명한 모델 학원을 다니면서 후원자를 찾아 눈, 코, 가슴, 엉덩이 등 성형수술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 수술 도중 죽을 위험도 있지만 어쨌든 인생이 뒤바뀐다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전한다. /출처=넷플릭스 화면


하나는 '기회의 통로'다. 주인공 중 하나인 키아라 베르가스 씨의 대사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거예요"가 이를 한 번에 말해준다. 미녀 대회는 작은 방에서 여러 가족이 사는 전화 교환원이나 간호사 등등의 가난한 삶 대신 각종 방송과 해외 진출을 통해 이름세를 날리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좁지만 빛나는 통로다.

1944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국제 아마추어 야구대회`를 장식할 여왕 선출 대회에선 서민 출신 욜란디 레알이 상류층 출신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뽑혔다. /출처=넷플릭스 화면


다른 하나는 '정권 홍보용'이다. 나라 경제나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시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 돌리도록 미녀 대회가 활용된다는 얘기다. 영화에선 미녀 뽑기 역사를 1940년대 군부 독재정권 시절인 1944년,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국제 아마추어 야구대회'를 장식할 '여왕'을 뽑은 것을 꼽는다. 이후 보수 군부독재를 뒤엎으며 등장한 진보 군인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첫 번째 임기 1999~2002년, 두 번째 2002~2013년)도 예외는 아니다.

`국유화`는 사실 이른바 좌파 정권만 하는 건 아니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1976년 재임 당시 석유 국유화를 외치면서 국영석유사 PDVSA를 만들었다. PDVSA는 베네수엘라 정부의 중요한 자금줄이다. 현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불법 대선과 `반미·좌파 독재정권`을 비난하는 미국은 마두로 정권 돈줄 차단 목적으로 이달 들어 PDVSA 제재 조치를 냈다./출처=PDVSA


나라로 보면 베네수엘라는 '다이아몬드 수저'급이다. 석유와 관광 자원을 한 나라가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는 정권을 불문한 자원 부국 역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힌다. 네덜란드 석유사인 로열더치셸이 1922년 베네수엘라 석유 자원 매장 사실을 발견한 후 베네수엘라는 1929년 세계 2위 원유생산국가가 됐다. 1935년엔 원유가 전체 수출의 90%에 달했다. 당시 군인 출신 독재자인 후안 비센테 고메즈 대통령(재임 1908~1935년)이 외국계 석유사들이 개발에 나서는 것을 팔 걷어붙인 결과다. 석유 생산·수출이 늘면서 베네수엘라 돈인 볼리바르화 가치가 급등해 버린 결과 나름의 문제도 이어졌다.

국가 통제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국유화'는 이른바 좌파 정권만의 특징이 아니다. 좌·우 정권을 넘나든다. 고메즈 이후에도 우파·보수 군부 정권이 이어졌는데 1943년 당시 이사이아스 메디나 앙가리타 대통령(재임 1941~1945년) 시절 베네수엘라 정부는 주요 석유회사들이 낸 수익 중 절반은 국고로 회수하는 법을 만들었다. 보수·기득권 정치인이자 1970년대 유가 급등 황금기를 누린 당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첫 번째 임기 1974~1979년, 두 번째 1989~1993년) 은 1976년 석유 국유화를 외치면서 국영석유사 PDVSA를 만들었다. 나중에 자기 이름을 건 개혁·복지정책 '차비스모(Chavismo)'를 내걸며 등장한 '반미(反美)·좌파' 정치인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1999년, 민간 석유사도 국유화했다.

사실 베네수엘라에 대해선 2015년 이후 지난해 말까지 고향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 '베네수엘라 엑소더스' 규모가 최대 330만명에 이른다는 유엔난민기구(UNHCR)와 국제이주기구(IOM) 등의 통계가 주로 알려져 있다. 2018년 말엔 연간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15%나 떨어졌고 10년 전인 2008년 보다 45% 줄었다는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도 자주 언급된다.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이자 자신만의 독특한 복지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이끌던 차베스 전 대통령이 2013년 죽고, 미국이 미국 내 셰일 가스와 석유 생산을 본격화하면서 국제유가가 추락한 2014년을 기점으로 베네수엘라 경제 사정은 나빠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유명한 수출품 중 하나는 맛있는 초콜릿이다. 북동부에 있는 수크레 주 정부에 따르면 이 지역에선 매일 2만5000~3만 배럴 정도의 원유가 생산되지만 한편으론 수크레 주에서 나오는 카카오 열매도 90%수출된다. /출처=베네수엘라 정부 운영 사이트(www.correodelorinoco.gob.ve)


베네수엘라의 숨겨진 보석은 '초콜릿'이다. 성형 미인이 밥줄이 될 순 없지만, 초콜릿은 베네수엘라 시민들의 창업 아이템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하면, 맛있는 카카오 열매가 베네수엘라에서 나기 때문이다.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는 품종이 크게 세 가지다. 아프리카와 동남 아시아에서 주로 나는 포라스테로(Forastero)가 제일 흔하다. 생명력이 좋아서 키우기가 비교적 편하다는데 그래서인지 전 세계 카카오 열매 생산량 80% 정도를 차지한다. 크리오요는 맛과 향이 좋은데 농사짓기도 어렵고 수확 기간도 짧아서 비싼 고급 카카오 종으로 통한다. 제3의 종자 격인 트리니타리오(Trinitario)는 포라스테로와 크리오요를 개량했다고 한다. 이 중 크리오요와 트리니타리오가 베네수엘라에서 주로 자란다.

초콜릿 세계에서 고급 브랜드로 통하는 베네수엘라 `엘 레이`초콜릿 가게./출처=엘 레이 홈페이지
엘레이 같은 베네수엘라 고급 초콜릿은 프랑스와 일본으로 주로 팔려 나간다. 우리나라에도 베네수엘라 산 초콜릿을 파는 가게가 있다./출처=피초코 홈페이지


왕이라는 뜻의 '엘레이(El Rey)'는 초콜릿 세계에서도 고급으로 쳐주는데, 2012~2016년 세계 초콜릿 대회에서 다섯 번 금상, 한 번 은상을 탈 정도로 미식가 사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베네수엘라 초콜릿 브랜드다. 카라카스 시에 사는 낸시 실바 씨가 운영하는 가게 '키리키레(Kirikire)' 가게 초콜릿은 2014년 프랑스 파리 살롱드 초콜릿 대회에서 우승했다. 프랑스에 있는 키리키레 가게 초콜릿은 1kg당 96달러에 팔리는데, 베네수엘라 시민이 한 달 동안 일해서 버는 돈이 1달러 선에 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돈이다.

베네수엘라 초콜릿 사세 키리키레는 수크레 주 카카오 열매를 들여와 초콜릿을 만든다. /출처=키리키레 홈페이지


1964년 수도 카라카스 시에서 가게 문을 연 '디 지아코베(di Giacobbe)' 초콜릿 가게도 유명하다. 이 가게는 '원조 카카오·베네수엘라 카카오 봉봉'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사회와 학교를 초콜릿 사업과 연계하는 사업도 한다. 운영자인 마리아 페르난다 씨는 지난달 17일 BBC문도 인터뷰에서 "초콜릿은 사람들이 이민으로 떠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업"이라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생산자가 1만7000여 명이고 초콜릿 아티스트는 8000여 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이민 대신 초콜릿으로 꿈을 찾는 베네수엘라 청년들. 요즘 베네수엘라에선 단순히 카카오 열매를 해외로 내다파는 것을 넘어 `빈투바(Bean to Bar)` 형식을 선호한다고 한다. 엘 트라피체는 카밀로 레스트레포 씨가 직접 농사 지은 카카오 열매로 초콜릿 단계까지 만들어서 판다. /출처=BBC문도


베네수엘라에선 단순히 카카오 열매를 내다파는 것이 아니라 '빈투바(Bean to Bar)' 형식을 선호한다. 열매 수확부터 발효·건조·로스팅·템퍼링 등 과정을 거쳐서 완성품인 초콜릿 바를 만들어내면 일자리도 늘어나는 데다 돈도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의 엘레이 초콜릿 가게라는 '달콤한 꿈'을 품고 살아가는 청년 사업가도 있다. 베네수엘라 남서부 타치라 주에서 라 프리아 카카오 나무 농장을 운영하면서 '엘 트라피체(El Trapiche)' 초콜릿 가게를 운영하는 카밀로 레스트레포 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처음엔 의대를 가거나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하려고 했지 초콜릿에 손 댈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600달러 (약 67만원) 농장을 가진 성공 케이스로 꼽힌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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