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을 통해 보는 세계사
하나의 상품을 통해 근대의 세계사를 살펴보겠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 가외기타 미노루 교수는 이를 위해 본서에서 주로 설탕과 차, 면직물 같은 상품을 거론하지만,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상품으로 밀이나 쌀 같은 기본 식량 외에 기본적인 의류도 있다. 최근에는 석유나 자동차도 그 생산에서 소비까지의 전 과정을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세계사의 흐름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상품을 통해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계 각지 사람들이 영위했던 구체적인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입었으며 어떤 곳에서 살고 있었는지, 또 어떤 일로 즐거워하고 눈물을 흘렸는지. 이러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과 공감하기가 불가능한 만큼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더욱이 설탕과 같은 상품을 통해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왕족이나 상류계급 사람들뿐 아니라 기층민중들의 생활,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꾼들에 의해 강제로 잡혀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눈물과 땀과 한숨으로 지새웠던 카리브 해 노예들의 고단한 삶 등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계상품’의 경우는 전 세계에서 통용된 상품이므로 그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과정을 좇아가다 보면 세계 여러 지역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돼 있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잘 알게 된다. 예컨대 설탕은 주로 카리브 해에서 생산되었지만 이를 위한 노동력이 된 흑인 노예는 아프리카에서 공급되었으며 생산된 설탕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므로 설탕의 역사는 세 대륙을 동시에 시야에 두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또 유럽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설탕을 소비했는지, 카리브 해 노예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알아야 하며, 노예사냥의 대상이 되었던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필히 생각해 봐야만 한다.
설탕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
과거의 역사가들은 국가나 국민을 단위로 하여 세계의 역사를 이해했다. 국민들이 부지런한 나라는 부강해지고 게으른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가난해졌다는 학설은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카리브 해에서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흑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었으며, 단지 이 지역이 ‘세계상품’인 설탕의 원료, 즉 사탕수수의 생산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이곳에 플랜테이션을 건설하고 ‘모노컬처’사회를 도입함으로써 이 땅의 현재와 미래의 잠재성장력을 철저히 착취했다. 따라서 카리브 해에 설탕 플랜테이션이 성립된 것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된 사실은 두 현상을 함께 보아야만 그 맥락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또 아메리카합중국 남부에 노예제와 면화 플랜테이션이 성립된 것도, 18세기까지는 세계 면직물 생산의 중심지였던 인도가 면화 플랜테이션의 나라로 전락한 것도 모두 영국의 산업혁명과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설탕이나 면직물 같은 세계상품이 우리 인류의 역사에 미친 영향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이 공업의 발달처럼 인류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측면에대해서는 물론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들 상품을 놓고 벌어졌던 쟁탈전이 가진 부정적인 측면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 심각한 후유증이 아직까지도 지구상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우는 것이 연대나 사건, 인명 따위나 달달 외우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우리와 친숙한 부분부터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즉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여기에 오기까지 어떤 역사적 변천을 거쳤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역사학이다. 과거부터 ‘모든 역사학은 현대사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세계는 하나’라는 표현을 우리는 흔히 사용하는데,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설탕의 세계사』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그것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1996년 초판이 나온 이래 14쇄 이상 거듭 찍혀나왔을 정도로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당초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중고등학생을 위한 책으로 출간되었던 터라 문체가 평이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친절한 부연설명이 달려 있어 평소 역사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도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도록 씌어 있지만, 소재를 다루는 깊이나 내용 면에서 대학생 이상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읽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 책이 국내 독자들에게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보다 깊이있는 역사인식을 가능케 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 책속으로 추가 *
약인가, 식품인가?(65P-)
설탕은 본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식품이었을까? 만일 식품이었다면 칼로리 보급원으로서의 ‘식량’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조미료였을까?
실제로 설탕에는 놀라울 만큼 다양한 용도와 의미가 있었다. 이슬람 의학에서 설탕은 가장 흔히 쓰이는 약재였고 중세유럽에서도 설탕은 결핵치료 등 10여 가지 효능을 가진 약재로 여겨졌다. 그 증거로 11세기의 위대한 아라비아의 의학자 이븐시나는“설탕이야말로 만병통치약이다”라고 단언했고, 12세기 비잔틴제국 황실에서 일했던 의사도 해열제로 설탕에 절인 장미꽃잎을 처방했으며, 15세기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의 의과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한 의학서에도 설탕은“열병, 기침, 가슴의 병, 까칠까칠한 입술, 위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씌어 있다. 나아가 14, 5세기 유럽 전역에‘흑사병’이라고 불렸던 페스트가 크게 유행했을 때에도 설탕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한편 설탕은 후추나 향료처럼 고급스러운 조미료이기도 했다. 특히 백설탕에는 뭔가 신비적인 의미가 있다고 간주되었으며, 때로 정교하게 세공된 장식품으로 만들어져 국왕이나 귀족의 파티, 의례를 화려하게 장식하곤 했다. 오늘날 결혼피로연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웨딩케이크의 기원도 여기서 비롯된다.
차와 설탕의 랑데부(71P-)
17세기 이후 설탕소비가 극적으로 증가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에서 홍차를 마시는 습관이 어떻게 성립되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나갔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17세기 초 설탕과 차는 약국에서 취급될 만큼 귀중한 ‘약품’이었다. 따라서 병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이나 젠틀맨 같은 고귀한 신분의 소유자 내지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무역상인들뿐이었다. 즉 이 시대에 차나 설탕은 대단한‘스테이터스 심벌'(status symbol, 신분의 상징)로, 이는 마음껏 사치와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영국인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영국의 독특한 차 문화 이면에는 무수한 아프리카 노예와 아시아의 가난한 농민들이 흘린 눈물과 땀의 노력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식 아침식사’의 성립(149P-)
산업혁명 후의 영국에서 도시노동자들의 생활조건에 가장 적합했던 것은 홍차와 설탕, 가게에서 산 빵과 포리지로 이루어진 아침식사다. 설탕을 넣은 홍차를 기본으로 하는‘영국식 아침식사’는 제대로 된 부엌이 없더라도 뜨거운 물만 끓일 수 있으면 준비가 가능한 음식이었다. 특히 설탕을 넣은 홍차는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즉효성 있는 칼로리 보급원이었다.
즉효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아침식사뿐만 아니라 일하는 도중에 차를 마시는‘티 브레이크’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충분한 칼로리를 보급하여 정신이 번쩍 든 상태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야말로 공장 경영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던 노동자였던 것이다. 차가운 빵을 한순간에 더운 요리로 바꿔주는 한 잔의‘설탕을 넣은 홍차’가 없었다면 19세기 영국 공업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