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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백두산 화산폭발

by 도생(道生) 2016. 12. 14.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 대폭발로 추정되는 약 1천 년 전 백두산 화산 대폭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1대 임금 태조 이성계에서 25대 임금 철종 이변(이원범)에 이르는 472년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472년간 기록에는 백두산 화산폭발로 추정되는 기록이 나온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사화산(死火山)이 아니라 휴화산(休火山)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고, 내일 당장 폭발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화산분화를 잠시 멈추고 있는 살아 있는 화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은 대규모 화산 대폭발은 아니고 비교적 소규모의 화산폭발이다.

실록에 나온 백두산 화산폭발 기록 중에 숙종 때 일어난 백두산 화산폭발이 그 중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대에 백두산 화산폭발을 과학적인 논리로 설명하겠지만, 조선 시대 백성은 백두산 화산폭발은 원인도 모른 채 하늘의 재앙으로 알았을 것이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은 백두산 화산폭발의 징후를 어느 정도는 예측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기 때문에 과거의 조선 시대나 그 이전의 사람들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대규모의 백두산 화산 대폭발은 약 1천 년 전에 일어났는데, 대진국(발해)의 멸망에 원인으로 추정되며, 고려말에도 소규모의 백두산 화산폭발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대진국(발해)을 멸망으로 몰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백두산 화산 대폭발은 이후 거의 모든 세기에 걸쳐 소규모였으나 분화했다고 보고 있고, 20세기 들어 규모는 작으나 백두산 화산폭발이 있었다.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큰 화산 대폭발은 1815년에 인도네시아에 있는 탐보라 화산 대폭발이 가장 큰 화산폭발로 보고 있다.

탐보라 화산 대폭발의 규모는 화산 대폭발 함께 화산재가 500km 상공까지 올라갔으며, 반경 600km 지역을 사흘 동안 컴컴한 어둠으로 만들었다.

 

유황 방출 양은 약 2천5백에서 3천만 톤 정도로 추정하고, 탐보라 화산 대폭발 소리는 2500km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탐보라 화산 대폭발로 약 8만 명의 사망했고, 지구온도를 1도나 내리게 했다.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대폭발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 대폭발로 알려졌으나, 최근 약 1,000년 전 백두산 화산 대폭발 규모가 탐보라 화산 대폭발 규모보다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발표가 있었다.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윤3월 25일(1401년)

단주(端州)에 숯비(灰雨회우)가 내리었다.

동북면 찰리사가 보고하였다.

"단주(端州) 동북간에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것이 온 하늘을 뒤덮어 어두컴컴하였는데, 숯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으므로, 두어 개를 봉해서 올립니다."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1월 27일(1403년)

갑주(甲州) 땅인 영괴, 이라 등처에 반쯤 탄 쑥재가 비처럼 내려서, 두께가 한 치나 되었는데, 5일만에 사라졌다.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2일(1597년)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이 서장을 올렸다.

"지난 8월 26일 진시에 삼수군(三水郡)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잠시 후에 그쳤고, 27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또 지진이 일어나 성의 두 군데가 무너지고 고을 건너편에 있는 시루바위의 반쪽이 무너졌으며, 그 바위 아래 삼수동(三水洞) 중천(中川)의 물빛이 흰색으로 변했다가 28일에는 다시 황색으로 변했고, 인차외보 동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붉은 빛의 흙탕물이 솟아오르다가 며칠 만에 그쳤으며, 8월 26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소농보 건너편 북쪽에 있는 덕자이천절벽의 사람이 발을 붙일 수 없는 곳에서 두 차례나 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크기가 몇 아름씩 되는 바위가 연기를 따라 터져나와 종적도 없이 큰 산을 넘어갔습니다. 27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에는 지진이 일어나 그 절벽이 다시 무너졌고, 그날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 와 자시(子時, 오후 11시~오전 1시)에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현종실록』 14권, 현종 9년 4월 23일(1668년)

 

함경도 경성부에 재()가 내렸다.

부령에도 같은 날에 재가 내렸다.

 

 

 

 

『현종실록』 14권, 현종 9년 4월 26일(1668년)

 

상(현종)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함경도에 재가 내린 이변은 몹시 놀랐다. 박승후의 상소 가운데 말하기를 '하늘 주위가 20여 곳이 터졌다.'라고 하였는데, 좌상이 시골에 있을 때 그것을 들었는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동쪽 하늘이 갈라졌는데, 빛이 화경(火鏡)과 같았습니다.

또 붉은 말이 서로 싸우듯한 모양이 있었는데 말을 전하는 자가 몹시 많았습니다.

다음날 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으며, 또 다음날 이상한 희기운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태평의 기상이고 하늘이 갈라지는 것은 쇠란의 조짐이라고 합니다."

 

 

 

 

『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5월 20일(1702년)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서는 이달 14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1시)에 천지(天地)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혹 황적(黃赤)색의 불꽃 연기와 같으면서 비린내가 방에 가득하여 마치 화로(洪爐홍로) 가운데 있는 듯하여 사람들이 훈열(熏熱)을 견딜 수가 없었는데, 4경(更) 후에야 사라졌다. 아침이 되어 보니 들판 가득히 재(灰)가 내려 있었는데, 흡사 조개 껍질을 태워 놓은 듯했다.

 

경성부(鏡城府)에도 같은 달 같은 날, 조금 저문 후에 연무(煙霧)의 기운이 갑자기 서북쪽에서 몰려오면서 천지가 어두워지더니, 비린내가 옷에 배어 스며드는 기운이 마치 화로 속에 있는 듯해서 사람들이 모두 옷을 벗었으나 흐르는 땀은 끈적이고, 나는 재가 마치 눈처럼 흩어져 내려 한 치 남짓이나 쌓였는데, 주워 보니 모두 나무 껍질이 타고 남은 것이었다.

강변(江邊)의 여러 고을에서도 또한 모두 그러했는데, 간혹 특별히 심한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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