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아덴만 여명작전’ 영웅 석해균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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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1.22. 오후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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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해균 전 삼호주얼리호 선장이 지난 18일 해군 리더십센터 자신의 사무실에서 아덴만 여명작전’이 펼쳐진 아덴만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지난 21일은 대한민국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 해상에서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를 구출한 지 만 8년이 되는 날이었다. 부산 해군작전사령부에서는 ‘아덴만 여명작전’ 8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석자한 석해균(66) 전 삼호주얼리호 선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석 전 선장은 해마다 기념행사에 참석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복부 등에 6발의 총탄을 맞고 생사의 기로에 섰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해군 리더십센터 안보교육담당 맡아

아덴만 작전 등 경험담 들려주니 인기

정신과 치료 안 받고 트라우마 극복

용서가 도움 된다는 책 읽고 깨달아

4년 전 총 쏜 해적 무기수 만나 용서

피랍 땐 소말리아 도착 최대한 지연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저속항해

목숨 살려준 이국종 교수 무한 존경

세월호 선장 행태 도저히 이해 안 돼

선장은 배와 운명 함께하는 게 명예

앞으로 청소년 희망 멘토 되고 싶어"

석 전 선장은 뛰어난 기지와 목숨을 건 지연술로 아덴만 여명작전의 성공에 큰 역할을 한 주인공이다. 기자는 행사 며칠 전 석 전 선장이 근무하고 있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교육사령부 리더십센터를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는 2012년 6월부터 이곳에서 안보교육담당관(부이사관)으로 군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나?

“교육을 받으러 오는 해군 장병들에게 해양 안보를 강의하면서 육·해·공군부대, 중·고·대학과 공공기관에서 요청이 오면 어디라도 달려가 강의를 한다.”

-강의 내용은?

“여러 가지다. 해양 안보의 중요성을 비롯해 아덴만 여명작전 당시의 경험담, 경험 속의 위기관리와 정신력 등이다. 이론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어 인기가 많다.(웃음)”

-건강 상태는 어떤가?

“그렇게 많이 나쁘진 않지만 생활하는 데는 약간 불편이 있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증상이 심해진다. 배의 오른쪽 수술한 부위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 통증이 있으며, 왼손은 항상 많이 시리고 조금 통증이 있다. 인공 고관절 수술을 한 왼쪽 다리도 가끔 통증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아직까지는 진통제를 먹지 않고 버티고 있다.”

-트라우마(정신적 후유증)는 없나?

“가끔씩 총 맞을 당시가 떠올라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하지만 많이 좋아졌다. ‘용서’가 약이더라.”

석 전 선장은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고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며 그 비결을 소개했다. 어느 책에서 용서가 트라우마 극복에 좋다는 내용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는 4년 전 대전교도소를 찾아가 자신에게 총을 쏜 해적 무기수 아라이를 만나 가슴속에서 우러난 용서를 했다고 한다. 그는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선행’이라고 강조했다.

-기억을 되살리기가 고통스럽겠지만 ‘아덴만 여명작전’ 당시 어떻게 군 작전에 도움을 줬는지, 상황을 좀 설명해 달라.

“납치 후 감시가 매우 엄중했다. 어떻게 하면 외부로 통신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교에 있는 통신용 컴퓨터가 보였다. 해적들이 만류했지만 막무가내로 컴퓨터 게임을 하겠다고 우겼다. 당시 그 컴퓨터에는 내가 깔아둔 바둑게임 프로그램이 있어서 게임을 하는 척했다. 나는 바로 이메일 시스템으로 변환하여 납치 시간, 현 위치, 해적들의 숫자, 소지하고 있는 무기의 종류, 본선의 현 상태, 작전 전개 시 승선이 용이한 위치 등을 국제 관계기관과 대리점, 회사, 청해부대에 송신했다.”

-바로 답장이 있었나?

“회사로부터 소말리아 도착을 최대한 지연해 달라는 이메일을 수신하여 어떻게 하면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해적 두목은 당장 소말리아로 가자고 했으나 나와 선원들은 엔진이 고장 나 수리하는 것처럼 속이고 지연작전을 폈다.”

-지연작전은 순조로웠나?

“약 3시간 후에 두목이 나에게 총부리를 겨누면서 ‘거짓말하지 말고 지금 당장 소말리아로 가자’고 해 말다툼이 있었다. 두목은 나에게 ‘소말리아로 갈래 아니면 여기서 죽을래?’ 하고 협박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하지만 본선은 선장이 없으면 절대 움직일 수 없다’며 오히려 큰소리 치니까 다시 수리를 허락했다. 약 2시간 후 엔진을 작동하여 최저속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 뒤에 두목이 빨리 속력을 올리라고 요구했지만 석 전 선장은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계속 저속 항해를 했다고 한다. 1월 18일 해군과 해적 사이에 1차 총격전이 발생한 후 선박의 진행 방향을 남쪽에서 서쪽으로 돌리고 저녁에는 엔진에 고장이 발생했다면서 엔진을 정지시키고 조타기 동력장치도 절단하였다.

-해적들은 계속 속아줬나?

“해적들은 선장이 자기들을 속였다는 것을 결국 알았다. 그래서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때는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면서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며 끝까지 엔진 시동을 걸지 않았다. 두목이 밖으로 끌고 가서 위협을 하면서 ‘소말리아로 가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하지만 해적은 최후 순간까지 나를 죽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선장이 죽으면 협상이 불가능하거나 배가 못 움직일 것으로 봤겠지.”

-그 뒤로는?

“계속 지연작전을 전개했지만 해군의 작전이 없어서 3일째는 더 이상의 지연작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바다에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하든가, 소말리아에 끌려가는 방법에는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새벽 해군의 구출 작전이 전개됐다.”

해적들은 석 전 선장을 배 밖으로 밀어내면서 해군에게 사격 중지를 요청하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석 전 선장은 밖에 나가면 구출 작전에 지장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그 후 해적들은 동료들이 하나둘 사살되는 것을 보고는 석 전 선장에게 총격을 가했다.

해군의 작전 성공으로 구출된 석 전 선장은 오만 현지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급파된 이국종(아주대) 교수팀의 응급수술을 받고 한국으로 이송되어 아주대 병원에서 1년간의 치료 끝에 퇴원할 수 있었다. 석 전 선장은 자신의 주치의이자 전국 권역외상센터 개설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 교수에 대해 무한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전했다.

2015년 4월 최영함 명예함장에 위촉된 석해균(가운데) 전 선장.


-선장이 된 동기는?

“돈도 벌고 외국 구경도 할 수 있다는 호기심에 신발회사 경리 일을 그만두고 외항선 승선생활을 시작했다. 승선생활을 해보니 적성에 맞는 것 같아 계속하기로 작정했다.”

석 전 선장은 이왕에 한 일이니 최고의 위치(선장)까지 도전해보자고 마음먹고 선원 생활 중에도 공부에 매진해 당시 매우 어려웠던 3급, 2급, 1급 해기사 시험에 연달아 합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전 12년 만에 드디어 선장이 됐다.

석 전 선장은 2011년 국제해사기구(IMO)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국가 간 해적 퇴치 협력 방안을 호소했으며, 그의 제안이 채택돼 해적 퇴치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됐다. 그는 자신의 희생과 제안으로 외항선들이 맘 놓고 항해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데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세월호 이준석 전 선장의 행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같은 선장으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장은 자신의 배가 침몰하면 부하들을 모두 내보내고 자신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전통이고 명예이다. 희생 없는 명예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이순신 장군의 말씀, ‘필생즉사, 필사즉생’(살자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을 명심하고 있다.”

-향후 하고 싶은 일은?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 청소년 교육이다. 위기의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멘토가 되어 올바른 길을 갈수 있도록 인도하는 등대가 되고 싶다. 특히 청소년과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었으면 한다. 청소년지도사 2급, 인성지도 상담사 2급 자격을 취득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강연 등으로 바쁜 일정 중에도 2013년 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학과에 입학해 4년 만에 졸업했다.

-국민들의 성원이 컸는데, 한 말씀만.

“지금 국가적으로 경제가 매우 어렵다. 너도나도 다 어렵지 않은가. 어려움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서로 도와가며 조금씩 양보했으면 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고자 하면 불가능은 없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반드시 좋은 세상이 온다고 생각한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석 전 선장이 근무하는 리더십센터 건물 앞 표지판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저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웃음 잃지 않는 '8살'짜리 소년 선장?



석해균 전 선장은 올해 만 66세이다. 하지만 자신의 나이를 물으면 그는 ‘8살’이라고 웃으며 답한다. 2011년 총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뒤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제 성격이 원래 많이 급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매사에 느긋합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살거든요. 가능하면 양보하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웃어넘깁니다. 부대 내에서도 늘 웃고 다녀요.”

석 전 선장은 차를 몰고 가다 누가 끼어들면 ‘나보다 급한 일이 있겠지’라며 양보하고, 신호에 걸리면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치면서 ‘석해균, 너는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불어넣는다고 했다.

‘아덴만 여명작전’을 수행한 최영함의 명예함장이기도 한 그는 마침내 고해의 바다를 항해하는 ‘인생호(號)’의 위대한 선장이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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