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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해석 열풍 부른 영화 <어스> <곡성> <버닝>엔 어떤 메시지가?



<어스>의 조던 필 감독은 “영화의 모든 요소는 의도적으로 등장한다”고 말했다. <어스> 개봉 이후 포털사이트엔 ‘어스 해석’이라는 키워드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우리는 그의 전작 <겟 아웃>의 흥행과 함께 ‘겟 아웃 해석’을 검색한 전례가 있다. 해외 작품까지 가지 않더라도 ‘곡성 해석’, ‘버닝 해석’ 등 해석 열풍을 부른 국내 작품도 있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해석은 이들에게 속 시원한 해답을 들려줬을까? <곡성>, <버닝>, <어스> 세 영화의 해석을 둘러싼 이야기를 정리해 봤다.

경고.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의심하지 않으면 현혹되고 마는 <곡성>

<곡성> 포스터

<곡성> 첫 장면

포스터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이건 사실 <곡성>이 지금부터 관객들을 현혹하겠다는 으름장이다. 영화는 아예 첫 장면에서부터 이 메시지를 선포한다. <누가 복음> 24장 37-39절을 인용해 예수가 환생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건네는 말을 보여주고, 누군가(외지인) 낚싯바늘에 미끼를 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주인공은 물론이고 관객들에까지 미끼를 던지겠다는 선언이자 복선이다. 또, 제시된 <누가 복음> 구절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차 인용된다.

곡성의 한 마을에 사람들이 원인 불명으로 죽어나가고, TV에는 환각 버섯의 위험을 알리는 뉴스가 나온다. 손녀 딸에게 건강에 좋다는 음식을 권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이 가설에 힘을 싣는다. 하지만 환각 버섯은 하나의 미끼에 불과했다. 한국식 오컬트 영화의 재림이라 불리던 <곡성>이다. 단순한 진실로 마무리할 뻔했던 독버섯 이야기가 아니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주술적 서사로 점차 관객을 이끈다.



<곡성>

경찰 종구(곽도원)은 외지인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을 듣고 그의 정체에 의문을 품는다. 외지인의 집 한편에 자리 잡은 기묘한 사당에는 죽은 사람의 사진들, 거기다 딸 효진(김환희)의 물건까지 발견된다. 효진은 갑자기 기괴한 행동을 보이고 놀란 종구는 용하다는 무당 일광(황정민)과 결탁한다. 이때부터 <곡성>의 현혹은 제대로 발동을 건다. 일광의 조언에 따라보지만 딸의 증세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딸을 구하고자 굿판을 벌인다. 이 유명한 굿 시퀀스에서 관객들은 혼이 쏙 빠졌다. 일광과 외지인의 주술이 대결을 벌이는 교차편집. 그러나 이 장면은 굉장한 교란 작전이었다.

<곡성>

해석에 따르면, 외지인의 정체는 악마를 숭배하는 주술사요, 일광은 그의 조력자였다. 굿판 장면에서 일광은 효진을 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외지인과 대결을 벌이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으나 실은 외지인과 함께 효진에게 살을 날리고 있었던 것. 외지인과 일광이 입고 있는 훈도시, 의식처럼 죽은 자의 사진을 찍는 행위도 중요한 증거였다. 도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또 하나의 인물 무명(천우희)의 존재도 영화가 끝난 뒤에야 짐작 가능하다. 결국은 유일하게 믿어야 했던 마을의 수호신 무명의 경고를 저버린 종구는 참극을 맞이하고, <곡성>에 제대로 현혹된 관객들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어 ‘곡성 해석’을 찾아 헤맸다.

-청춘의 메타포, <버닝>

<버닝>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발표한 <버닝>은 그야말로 메타포의 영화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한국 청춘의 이야기로 각색한 <버닝>은 종수(유아인),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이라는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전체적으로는 스릴러의 구조를 띄고 있지만 관객들은 각 캐릭터가 품고 있는 청춘의 의미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쉽게 잡히지 않는 요소들을 나름대로 추측하고 나섰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20대 여성이다. 나레이터 모델을 하며 호객행위를 하다가 어릴 적 동네 친구인 종수를 만났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소설을 쓰는 대신 택배 기사 일을 하고 있다. 해미는 그에게 아프리카 부시맨들이 삶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춘다는 그레이트 헝거 춤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 종수에게는 그동안 가끔 들러 고양이 밥을 챙겨달라는 부탁을 남기고서. 그런데 홀로 떠났던 해미는 벤이라는 낯선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버닝>

해미를 사랑하게 된 종수는 벤에게 연적의 감정을 느낀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벤은 고급 빌라에 살고 고급 외제차도 가졌다. 감각에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벤에게선 패배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데다 여유가 넘친다. 그럴수록 종수는 해미 곁에 있는 ‘개츠비’ 벤을 경계한다. 지저분하게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는 벤, 그리고 해미의 실종. 종수는 해미의 실종에 벤이 관련돼 있다는 강한 직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벤이 범인이라는 심증, 물증은 언제나 반박 가능하며 부정확하다. 해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종수가 죽인 것은 벤인가, 열등감인가, 계급인가.

<버닝>

종수는 아버지 세대의 짐을 떠안고 무력하게 자란 청춘의 대변자다. 벤은 그런 의미에서 종수의 반대급부에 있는 인물이자, 종수에게 모종의 불쾌감과 열등감을 안기는 근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엔 저마다의 종수와 벤이 동시에 각각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세계가 이질적이고도 미스터리하게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버닝>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 많은 미스터리를 종수와 관객들에게 제시해 두었다. 가령, 종수에게 계속해서 걸려온 대답 없는 전화의 의미라던가, 벤은 정말로 해미를 죽였는지, 해미의 기억 속에 있던 우물은 실제로 존재했는지, 벤의 집 주차장에서 발견한 고양이는 해미의 고양이가 맞는지 등등. 하지만 <버닝>은 정답을 꽁꽁 숨겨뒀던 <곡성>과는 달리 특정한 진실을 상정해놓고 있지 않는 듯 보인다. 마치 이 모든 모호함은 종수가 갖는 의심이 열등감에서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기 위해 겹겹이 쌓은 것처럼 보인다.

<버닝>

<씨네21>에 실린 이창동의 인터뷰에서 미스터리에 대한 대답을 어렴풋이 얻었다. 이창동 감독은 종수라는 청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종수는 아버지에게 묶인 채 과거의 덫을 현실로 살고 있는 친구다. 일반화하자면 요즘 청년의 문제는 청년의 책임이 아니다. 윗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거지.” 또 그는 “지금 한국 사회의 태극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이상의 것, 우리 아버지 세대의 방향을 알아차리기 힘든 분노가 담겨 있다. 반면 벤은 대남 방송이 들리는 마당에 서서 “재밌네”라고 말한다. 사실 지금 우리는 벤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잘 안 보여서 그렇지 계급의 문제는 늘 도처에 있다”고 말했다.

또, 파주의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가 종수의 엄마에게 걸려온 것이란 추측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 엄마라고 추측할 만한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나는 좀더 일상의 미스터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보고 싶다. 일상에서 잘 알아차리기 힘든 작은 미스터리들이 큰 세계의 미스터리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이번 영화에서 전달하고 싶은 기본적인 느낌이었다”라고 답했다.

- <어스> “이것은 미국에 관한 영화다”

<어스>

관객을 현혹한 <곡성>, 모호한 메타포의 <버닝>. <어스>는 앞의 두 영화에 비해 비교적 명쾌한 해석이 가능하다. 조던 필 감독이 직접 “이것은 미국에 관한 영화”라는 언급을 했기 때문이다. 감독의 친절한 설명에 힘입어 사람들은 <어스>의 구석구석에 숨은 상징들을 척척 찾아냈다.

1986년 당시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캠페인 모습

<어스>

먼저 영화는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Hands Across America) 캠페인이 대유행하던 1986년의 미국을 보여준다. 이 캠페인은 당시 6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종과 계급,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손을 맞잡고 미국 48개 주를 가로질러 띠를 두르는 퍼포먼스였다. 손을 잡으면 해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와 희망의 메시지를 달고, 약자와 빈곤층을 돕는 사회 운동이었다. 하지만 조던 필 감독은 여기서 ‘희망’이 아닌 ‘절망’을 보았다.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던 캠페인의 반향과는 달리, 굶주림은 해결되지 않았고 양극화는 심해졌기 때문이다.

<어스>

<어스>

한편, <어스>의 핵심적 이미지인 도플갱어는 어떻게 공포의 소재가 됐을까.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에 분명한데, 완벽히 동일한 나(도플갱어)를 마주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다. 게다가 아마 우리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적으로 만든다. 마치 이 진실에 대한 반영이라도 되는 듯, <어스>는 타인의 자리에 '나'의 얼굴을 등장시킨다.

다시 영화의 제목인 '어스(Us)'를 보면 두 가지 의미를 가졌음을 눈치챌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모습, 그리고 미국(United States) 말이다. 현재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다름을 껴안는 포용주의를 버리고, 이민자를 배척하며 불법 체류자를 내쫓는 배타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철저하게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 위대한 미국의 위상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다. 조던 필 감독은 공포영화 <어스>를 통해 우리의 모습, 미국의 모습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되묻고 있다. 주인공 애들레이드(루피타 뇽)는 도플갱어 가족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붉은 옷의 도플갱어는 답한다. "우리는 미국인이다."

<어스>

<어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예레미야 11장 11절'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이 구절은 애들레이드 가족에 닥칠 재앙을 암시하는 동시에 11:11 이라는 대칭의 형태로 다가온다. 이것은 다시 도플갱어, 복제인간, 쌍둥이, 네 명의 가족, 가위 등 반복과 대칭의 메타포의 영리한 쓰임새로 읽힐 수 있다.

조던 필 감독은 "우리를 죽이고 직업을 빼앗을 것만 같은 미스터리한 침입자든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투표한 이들이든, 서로를 두려워하고 서로를 탓하는 시대다. 외부의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어스>를 만들게 된 계기를 밝혔다.

글 : 심미성(온라인뉴스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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