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혹은 봄밤의 꽃향기 [책 굽는 오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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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내가 있는 곳
ㆍ줌파 라히리 지음·이승수 옮김
ㆍ마음산책 | 200쪽 | 1만3500원



지난 주말, 스위스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습니다. 슈퍼마켓에서 샀다는 이탈리아 케이크 콜롬바의 사진이었어요.

비둘기를 닮은 이 케이크는 이탈리아인들이 부활절에 먹는 음식이라고 해요. 밀가루로 만든 기본 도에 설탕에 졸인 오렌지 껍질이나 건포도 등을 넣는다는 케이크의 맛을 가만히 상상해보았습니다. 얼마나 달콤하고 향기로울까요?

그런데 케이크도 그렇지만, ‘스위스 슈퍼마켓에서 산 이탈리아의 부활절 케이크’라는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지난겨울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기 위해 탔던 기차, 이탈리어와 스위스 악센트의 프랑스어가 혼재하던 그 기차 안의 풍경처럼요. 스위스인이나, 이탈리아인이 대부분이던 그 객차 안에서 저는 유일한 극동아시아인이었어요. 주변 승객들에게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로 말을 걸던 제 옆의 노신사는 제게 번번이 영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머리색과 피부색을 보면서 제가 이탈리어나, 프랑스어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일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겠지요.

소설가가 된 이후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제 소설에 이방인의 정서가 깔려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방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썼고, 이방인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이방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작가들의 소설에 애정을 가져왔어요. 인도계 미국인인 줌파 라히리 역시 제가 사랑하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최근에 출간된 <내가 있는 곳>은 그녀가 외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쓴 첫 소설이에요. 영어로 쓴 기존 소설들과는 분위기가 다른 이 소설에는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이방인을 바라볼 때 우리가 그러하듯, 우리는 파편적인 정보들을 통해서 그녀의 존재에 대해 어림짐작해볼 뿐이죠. 이 소설은 ‘식당에서’ ‘박물관에서’처럼 공간을 제목으로 단 짧은 챕터들로 이루어졌는데,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부유하듯 미끄러지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화자는 왜 이렇게 고독할까요?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나 양다리를 걸친 옛 애인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언급되지만, 그녀의 내면 풍경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주인공의 고독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감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머물기보다 나는 늘 도착하기를, 아니면 다시 들어가기를, 아니면 떠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움직인다.”(187쪽) 소설을 읽다가 발견한 이 문장을 오랫동안 곱씹었습니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매번 우리가 이 세계의 이방인임을 확인하는 일이지만, 이 소설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던 것은 저 역시 머물기보다는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머물기보다는 도착하길 기다리는 우리의 고독은 부드럽죠. 드러난 피부를 감싸는 봄날의 대기만큼. 달콤하고요. 밤공기를 타고 날아오는 꽃향기만큼.

백수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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