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충분히 ‘돌봄’ 받고 있는가](3)병원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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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3.13. 오후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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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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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의사와 소통 막혀…12개 알약, 뭔지도 모르고 먹어요”
ㆍ“장애인이 쓰기 편하면 모두에게 편리…보편적 설계 필요”

수화통역사와 함께 청각장애인 손화영씨(64)가 지난 2월26일 서울 한 병원의 장애인 접수창구 앞에서 같이 간 수화통역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언어·청각장애가 있는 최승현씨(55·가명)는 2015년 교통사고로 11·12번 갈비뼈와 오른쪽 손목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 두 차례 대수술을 받았다. 최씨는 “사고 당시보다 더한 공포를 수술실에서 경험했다”고 회상했다.

청각장애인은 병원 진료를 받을 때 수화통역사를 대동하는 경우가 많다. 최씨 역시 수술을 앞두고 병원 측에 수화통역사를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상태와 수술 계획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씨의 보호자였던 큰딸은 기본적인 수화는 가능했지만 전문용어가 많은 의료 수화통역은 할 수 없었다. 병원 측은 “병원에 고용된 수화통역사가 없고, 위생 등의 문제로 수술실에 들일 수 없다”며 최씨의 요청을 거부했다. 최씨는 “의료진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주장했다.

청각장애인들은 스스로를 지칭할 때 청각장애인이란 말 대신 ‘농인(보는 사람)’이란 표현을 쓴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상대방의 얼굴 표정과 입 모양 등이 중요하다. 수화나 필담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구화(입으로 말하는 것)로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의사소통한다. 하지만 홀로 수술을 받게 된 최씨는 “수술실은 구화나 필담이 불가능한 곳이었다”고 했다. “의사와 간호사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입 모양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신호도 없이 의료진은 주삿바늘을 갑자기 팔에 꽂았습니다. 마취 주사도 마찬가지였고요. 나중에 물어보니 제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청각장애가 있는 환자한테 그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아십니까. 당장 사느냐, 죽느냐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순간에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공포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최씨는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병원 측에 마취 순간까지만 통역사를 수술실에 대동할 것을 요청했으나 재차 거절당했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수화통역 거부는 진료실에서도 발생한다. 청각장애가 있는 윤인숙씨(58)는 2년 전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윤씨를 진찰하던 의사가 통역을 하던 수화통역사에게 “정신 사나우니 (진료실 밖으로) 나가서 통역하라”고 말한 것이다. 윤씨는 “그 자리에서 ‘통역이 곧바로 이뤄져야 궁금한 것도 물어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의사는 ‘한번에 쭉 설명을 할 테니 나가서 둘이 대화하라’고 고집을 부렸다”고 주장했다. 윤씨는 “통역사가 의사의 말을 다 기억해 전달하는 것도 힘들뿐더러 어려운 내용은 따로 설명을 들을 수 없어 난처했다”고 밝혔다. 결국 윤씨는 병원 측에 요청해 담당의사를 바꿨다.



■ 누가 장애인을 ‘얌전한 환자’로 만드나

서울 중랑구 수화통역센터 김정환 센터장은 “청각장애인의 소통권 보장을 위한 수화통역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센터장은 “청각장애인 다수가 진료나 수술 과정에서 의사로부터 ‘내가 알아서 해준다’거나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는다”며 “이는 엄격히 따지면 인격에 대한 무시이자 기본권 침해”라고 말했다. 그는 “수술 전에 미리 어떤 약이 어떤 시점에 투약되는지 등 기본적인 상황을 설명해주고, 환자가 마취에 들 때까지 수술실에 수화통역사를 대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다”며 “하다못해 청각장애인 수술 시 의료용 투명마스크를 착용하는 것만 의무화해도 청각장애인들이 겪는 문제의 일부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국내 청각장애인은 약 27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상급종합 병원 가운데 의료수화통역사가 있는 곳은 신촌 세브란스병원이 유일하다. 자치구 수화통역센터에서 통역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 시내 청각장애인 수는 6만명에 이르지만 서울 25개 자치구 수화통역센터마다 배치된 공인수화통역사는 4명에 불과하다. 청각장애인 손화영씨(64)는 “주말에 아프면 눈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손씨가 이용하는 수화통역센터가 주말에는 쉬기 때문이다. 손씨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갑자기 아플 때 센터가 문을 여는 월요일까지 참고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통역 없이 병원에 가는 것보단 아픈 걸 참는 게 낫다”고 말했다.

“저혈당이 온 적은 없나요?” 의사의 질문에 바쁘게 움직이던 수화통역사 서현정씨의 손이 멈칫했다. 진료실에서 한창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다 갑자기 날아든 질문이었다. 중랑구 수화통역센터에 근무하는 서씨는 이날 60대 당뇨병 환자의 의료 통역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잠깐 통역을 중단한 서씨는 의사에게 “저혈당이 오면 어떻게 되냐”고 되물었다. 저혈당이란 말 대신 저혈당에 따른 증세를 환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의사는 환자를 가리키며 “이분은 아실 테니 그냥 물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환자 역시 저혈당 증세를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서씨는 “환자분께 ‘ㅈ’ ‘ㅓ’ ‘ㅎ’ ‘ㅕ’ ‘ㄹ’ ‘ㄷ’ ‘ㅏ’ ‘ㅇ’ 하나하나 지화로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며 “결국 그 질문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넘어갔다”고 했다. 진료실을 나온 서씨는 스마트폰으로 저혈당에 대해 검색한 뒤 증세를 꼼꼼히 기록해뒀다.

1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뇌병변 장애를 갖게 된 이주승씨(58)는 매일 아침·저녁 12개의 알약을 복용하고 있다. 이씨는 두세 달에 한 번 대학병원 재활의학과에 가서 약을 한꺼번에 받아온다고 했다. 문제는 이씨가 급성기 치료가 끝난 2009년부터 10년째 같은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우울증 치료제, 근육 이완제, 뇌경색증을 예방하는 항응고제 등이 들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언어장애가 동반된 탓에 이씨는 의사에게 신체적 변화 등을 설명하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병원을 가서도 별다른 진찰 없이 약만 처방받아 나오기 일쑤였다고 했다.



어려운 의학용어도 한 요인이었다. 이씨는 “처방전을 봐도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다”며 “약국에서 복약 지도를 자세히 해주면 좋을 텐데 ‘언제 먹으면 된다’ 정도만 설명해주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씨도 처음부터 ‘조용한 환자’였던 것은 아니다. “혼자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어요. 내 상태가 어떤지, 약은 뭘 먹고 있는지. 근데 저희는 말 한마디 하는 데 비장애인보다 2~3배의 시간이 더 들어요. 노골적으로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내가 하루에 보는 환자가 몇 명인 줄 아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이런 말도 듣고. 점점 말을 하기가 무서워졌어요.”

최명신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사무처장은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환자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되는 관성적 진료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뇌병변 장애의 경우 70% 정도가 언어장애를 동반하는데, 환자가 적극적으로 의사에게 의사표현을 할 여건이 안되다보니 일부 병원에서는 관성적으로 약을 처방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또 “일부 의료진은 장애인 당사자보다 보호자나 통역사와 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면서 “어디까지나 이들은 의사와 장애인 환자 사이의 매개일 뿐, 모든 진료의 최우선은 환자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소통의 장벽은 병원으로 향하는 장애인들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된다. 보건복지부의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본인이 원하는 때 병·의원에 가지 못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장애인은 19.1%로, 5명 중 1명꼴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병·의원에 가지 못한 이유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꼽은 장애인은 4.5%였다. 특히 자폐성 장애(33.4%), 지적 장애(27.4%), 청각장애(17.5%)가 있는 장애인들의 경우 의사소통이 장벽으로 작용했다는 응답률이 높게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병원에서 의사소통 문제를 겪은 뒤 재방문을 포기했다.

■ 읽을 수 없는 건강검진, 받으면 뭐하나…

공공기관에서 상담원으로 근무하는 시각장애인 김지영씨(24·가명)는 지난해 말 종로구의 한 병원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검진을 받았다. 낯선 병원이었지만 김씨는 검진을 받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고 했다. 한 검사를 마치고 다른 검사실로 넘어갈 때마다 간호사가 안내하며 동행해준 덕분이다. 문제는 검진 이후였다. 10여일 뒤 검진 결과가 담긴 통지서가 집에 도착했지만 김씨는 한 달이 지나도록 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밤과 낮 정도만 구분할 수 있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부모님께 읽어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혹시 뭐가 잘못됐다고 하면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 김씨는 앞으로도 건강검진 결과를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김씨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때 진단서를 학교에 제출할 일이 많았는데, 점자 진단서를 끊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어요. 엉뚱한 내용이 적혀 있다거나 잘못된 진단서를 학교에 낸 적도 많아요. 점자 진단서 얘기를 꺼내면 ‘동네 병원에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니냐’는 타박을 들었어요.”

시각장애인들이 의료정보 접근권 보장을 요구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0년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는 “종합병원들이 시력 장애가 없는 사람만 읽을 수 있는 활자 크기의 종이 사본 형태로만 진료기록부를 제공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종합병원에서 시각장애인에게 진료기록부를 발급하면서 점자 자료나 인쇄물 음성변환 바코드 등 해독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라고 보고 서울대병원 등 서울시내 8개 종합병원장에게 시정을 권고했다. 복지부 장관에게는 전국의 종합병원이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을 위해 적절한 편의를 제공할 수 있도록 지도·감독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해당 병원들은 진료기록부에 점자 번역이 어려운 전문 의학용어가 많고, 병원에 점자프린터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자료 발급이 곤란하다고 해명했지만, 인권위는 ‘정당한 사유 없이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권을 제한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인권위 권고 이후 사정은 달라졌을까. 경향신문 취재 결과 당시 인권위 권고를 받은 8개 병원 중 2018년 2월 기준 점자 프린터를 도입한 곳은 서울대병원 한 곳뿐이었다.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의료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정보 문제도 거론된다. 하성준 서울시립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 사무국장은 “개인정보 문제를 거론하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고등어와 쌀밥 이야기를 한다는 반응이 많다”면서 “하지만 의료기관, 의료서비스 접근성에는 물리적인 병원 이용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원하는 때 접근할 수 있고,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까지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건강권 보장이 모든 장애인들을 다 건강검진 받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기반을 다졌다면 설계도를 잘 그려서 검진 기록 등을 잘 활용할 수 있게 해야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여기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아요.”

의료서비스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이 발표한 ‘2017 장애인백서’에 따르면 2005년 의원급 의료기관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시행된 이후 의원·한의원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율은 총 57.2%, 병원급(2차 의료기관)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율은 61.0%로 나타났다. 편의시설 설치율이 절반 수준에 머무른 것이다. 장애인의 병원 내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곳도 많다. 서울시내 한 자치구 내 의료기관 160개를 조사한 결과 병원 주출입구에서 진료실까지 장애인 이동이 가능한 기관은 13곳(8.1%)에 불과했다. 의료장비 접근성도 여전히 큰 구멍으로 남아 있다. 장애인들은 의료장비는커녕 장애인이 안전하고 편하게 대기할 공간조차 없다고 말한다.

송파구에 사는 이윤재군(17)은 태어날 때 청색증으로 인한 호흡곤란 등으로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입원한 이후 경련이 수반되면서 지적장애를 갖게 됐다. 뇌전증 장애를 등록할 만큼의 경련은 아니었지만 이군은 4살 때까지 뇌전증 치료제인 항경련제를 지속적으로 복용했다. 뇌전증은 과거 ‘간질’이라고 불렸으나, 질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최근에 변경됐다. 증상이 완화돼 잠시 약 복용을 중단했으나, 5살 때 경련이 재발해 지금까지 매일 항경련제를 복용하고 있다. 뇌파 검사도 주기적으로 받는다. 피검사자 두피에 약 20개의 전극을 붙이고 뇌파를 측정하는 뇌파 검사는 조그만 움직임이나 주변 환경에도 민감하다. 따라서 협조하기 어려운 아동이나 발달장애인의 경우 수면을 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군 어머니 성명진씨(42)는 “수면 유도 과정에서 윤재가 잠들 수 있는 공간이 없어 난처했다”고 말했다. “윤재가 어릴 때는 안거나 업고 재웠어요. 또 아기니까 그냥 대기 의자에 누여 재우기도 했고요. 지금은 윤재 키가 174㎝예요. 저보다 크죠. 이런 아이를 대기 의자에 누여 재울 수는 없잖아요. 입원까지도 필요 없고 간단한 시설만이라도, 침대에서 편하게 대기하며 잠들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해요.” 성씨는 오는 4월 뇌파 검사를 앞두고 다니던 삼성서울병원에서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성씨는 “삼성서울병원처럼 큰 병원도 뇌파 검사를 위해 잠들기 전까지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며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수면 공간을 제공하는 곳으로 병원을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여성연구원 ‘손잡다’ 원장이기도 한 성씨는 발달장애인이 특히 진료받기 힘든 분야로 치과와 안과를 꼽는다. 도전적인 행동을 하거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발달장애인은 간단한 충치치료를 받을 때에도 전신마취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도전적인 행동은 발달장애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거나,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할 때 등 의사소통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면 나타나는 자해·타해·공격성 등의 부적응 행동이다. 성씨는 “그래도 치과는 진료가 조금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성씨는 “요즘은 동네 병원 중에도 ‘장애인 진료 가능합니다’라고 쓰인 치과가 하나둘 생기고 있다”며 “그래도 많이 부족하다. 이 하나 뽑으려고 해도 마취가 되는 큰 병원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종합병원 중에도 장애인 전문 치과가 없는 데가 많다”고 했다.

성씨는 안과의 경우 문해능력이 없거나 의사표현이 힘든 장애인은 시력검사표를 읽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시력측정이 힘들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법에 명시된 거점병원은 2016년 8월 복지부에서 선정한 한양대병원과 양산부산대병원 2곳뿐이다.

성씨는 “거점병원은 한 번 가려고 하면 대기기간만 6개월”이라며 “거점병원이 있어도 이용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성씨는 말한다. “안전하고 편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건 기본적인 권리 아닐까요.”

단골병원 찾아 1급 시각장애인 하성준 서울시립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 사무국장(왼쪽)과 저시력 장애인 김두현씨가 지난 2월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의 한 내과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이유진 기자


■ 장애인 구분 없는 모두를 위한 병원으로

한국장애인개발원 유니버설디자인환경부 김인순 부장은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라며 “장애인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은 모두를 위한 병원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료장비 회사나 병원에서는 장애인용 의료장비를 만들고 설치해도 수요가 적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장애인용 의료장비라는 표현부터 틀렸다”고 지적했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문을 만들면 휠체어 장애인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죠. 이게 이분들에게만 좋을까요? 양손에 물건을 잔뜩 들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비장애인들도 좀 더 편하게 문을 드나들 수 있어요. 높이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의료용 침대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휠체어 장애인이 스스로 침대 위에 앉거나 누울 수 있겠죠. 역시 키가 작은 어린이들도 편하게 진료받을 수 있어요. 엑스레이(X-Ray)와 자기공명영상장치(MRI)도 누워서 찍으면 얼마나 편해요. 휠체어 장애인이나 신체 변형이 일어난 장애인들만 이용하는 게 아니에요. 서 있기 힘든 응급환자나 노인에게도 유용합니다.”

김 부장의 설명은 ‘유니버설 디자인’의 개념과 상통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미국의 건축가 로널드 메이스에 의해 1970년 처음 사용됐다. 휠체어 장애인이기도 했던 그는 장애의 유무나 연령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제품·건축·환경·서비스 등을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 설계’라는 의미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고안해냈다.

김 부장은 장애를 구분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통합이잖아요. 같이 살아가자는 것. 우린 점점 늙어갈 수밖에 없고 그럼 노인이 되는 거예요. 또 한순간의 사고로 장애인이 될 수도 있죠. 내가 장애인이 됐을 때 구분 없는 보편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 그게 바로 한 차원 높은 사회인 거죠.”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 사는 저시력 장애인 김두현씨(39)는 지난달 22일 영등포구 도림동에 위치한 한 내과병원을 찾았다. 도림동에 살던 김씨는 3년 전 중랑구로 이사를 갔지만 병원을 옮기지 않고 10년째 다니고 있다. 상봉동에서 도림동까지는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김씨는 신장 질환 때문에 2~3개월에 한 번씩 진료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저시력 탓에 눈을 사물에 바짝 대야 볼 수 있지만 병원으로 향하는 김씨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김씨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를 알아본 간호사가 인사를 건넸다. 접수창구에서 김씨는 종이 위에 바짝 얼굴을 댄 채 이름과 나이를 적었다. 간호사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5년 동안 이 병원에서 근무했다는 간호사는 김씨에 대해 “오래 다녀서 그런지 웬만한 건 혼자 다 하실 수 있어 도와드릴 게 딱히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보호자 없이 병원을 찾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는 게 이 병원의 장점이라고 했다.

“동네 병원이다보니 점자 처방전이나 진단서를 요구하기는 힘들어요. 대신 이곳은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죠. 의료진이 공들여 설명해주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이건 저 같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누가 와도 마찬가지죠. 마음의 장벽이 낮아지면 그다음부터는 계속 그 병원을 찾게 되고, 익숙해지면 혼자 병원에 와서 진료받는 데 큰 문제가 없어요. 거점병원 이런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아플 때 언제든 가까운 동네 병원을 찾을 수 있고,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어려운 바람일까요?”

■장애인 건강권법, 시행 석 달째…아직은 ‘빛 좋은 개살구’

‘이 법은 장애인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지원, 장애인 보건관리 체계 확립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장애인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15년 말 제정되고 지난해 12월30일부터 시행된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 건강권법)은 제1조에서 법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장애인 건강권법은 중증장애인 대상 건강 주치의 제도, 장애 유형 및 등급에 따른 편의 제공, 의료인에 대한 장애인 건강권 교육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장애계가 오래전부터 정부에 요구해 온 사안들이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시행령 발표 이후 장애계에서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57개 장애인단체로 구성된 장애인공동대응네트워크는 “법 조항 대부분이 강제성 없는 임의조항에 그치고 있어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며 하위법령 개정을 촉구했다.

우선 주치의 제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중증장애인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장애계는 주치의 사업 대상에 중증장애인 외에도 의료진에 의한 건강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된 장애인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고, 장애인 건강권법의 하위법령은 주치의 제도 대상을 1~3급 중증장애인으로 제한했다.

의료기관 등을 직접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을 위한 방문진료 내용도 하위법령에서 빠졌다. 장애인 건강권법 제9조는 장애인의 거주지를 방문해 진료 등을 행하는 방문진료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방문진료 사업의 대상 기준과 방법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위법령에는 방문진료 세부 추진을 위한 조항이 전혀 없다.

이 외에도 의료기관 접근성 보장을 위한 특별교통 수단 지원, 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 의사소통 지원에 대한 부분 등이 하위법령에 빠져 있다.

장애인 건강권법은 장애인의 ‘건강권’을 질병 예방, 치료 및 재활, 영양 개선, 재활운동, 보건교육 및 건강생활의 실천 등에 관한 제반 여건의 조성을 통하여 최선의 건강상태를 유지할 권리, 보건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라고 정의한다.

조현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은 “건강권법 시행 이전에 보건복지부와 간담회를 몇 차례 진행하고, 의견서 등을 전달했으나 장애인단체의 요구사항은 반영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 실장은 “시각장애인은 건강검진을 받아도 검진표를 읽을 수 없고, 청각장애인은 모든 병원에서 수화통역 지원을 받지 못하며, 뇌병변 장애인은 의료장비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건강검진을 거부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상 장애인이 최선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박효순·홍진수·노정연·이유진 기자

■공동기획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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