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12년 전 대전 송촌동 택시기사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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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3.07. 오후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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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 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

가끔 집을 나서기 직전 돌아서서 ‘매의 눈’으로 온 집안을 스캔할 때가 있다.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생겨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하는 엉뚱한 상상 때문인데, 가족과 친구들이 내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과 마주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린다. 괴벽이라면 괴벽일 이 버릇은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여러 모습의 죽음을 만난 뒤에 생겼다. 대전에 살던 택시기사 김정훈(가명·56)씨의 죽음도 그중 하나다. 2006년 4월10일,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은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섰다. 그것이 아내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날인 4월11일 아침. 빗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아내는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새벽 네다섯시면 귀가하던 남편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항상 귀가 직전 ‘이제 집에 간다’고 알리던 남편의 전화는 없었다. 남편에게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던 아내는 결국 아침 7시24분 112에 신고했다. 처음 신고를 받은 대원은 조금 의아해했다. 택시기사가 평소보다 두어시간 늦는다고 해서 신고하는 가족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귀가하지 않은 택시기사 남편
놀란 아내 신고···살해된 채 발견




그러나 3분 뒤, 또 다른 신고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대전시 송촌동의 한 초등학교 근처를 지나던 택시기사가 이면도로에 이상한 택시가 정차해 있다며 전화를 걸어온 것. 그가 말한 ‘이상한 택시’의 번호는 바로 몇분 전 아내가 신고한 김정훈씨의 차 번호와 일치했다.

주차된 대형 트럭을 들이받고 멈춘 택시엔 시동이 켜져 있었지만,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그는 뒷좌석에 엎드린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뒷좌석 문을 연 경찰은 경악했다. 택시 안이 온통 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뒷좌석은 천장부터 문까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고, 바닥과 시트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보통 성인 남성의 혈액량은 5~6리터가량인데, 그중 2리터가량의 혈액을 잃으면 쇼크 상태에 빠지고, 그 이상이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의 사인은 혈액의 대부분이 소실된 과다 출혈이었다. 심장이나 경동맥을 찔린 것도 아닌데 어찌 된 일일까.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는 “얼굴과 머리엔 혈관이 굉장히 풍부하게 분포돼 있기 때문에 혈액의 소실이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고 했다.

택시 내부에 가득한 혈흔을 분석하자 더욱 끔찍한 결과가 나왔다. 천장의 혈흔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피해자의 머리가 닿아 생긴 ‘묻힌 혈흔’이었다. 택시 뒷좌석 창에 튄 ‘비산 혈흔’(spatter stain)은 알고 보니 좁은 뒷좌석에서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코와 입으로 내뿜은 ‘호기 혈흔’(expectorate spatter)이라는 것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휴대전화가 그의 손 가까이에서 발견된 점이었다. 휴대전화에도 혈흔이 가득했지만 정작 전화를 걸었던 기록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실패했던 것으로 보였다. 부검 결과 그의 몸에선 모두 28곳의 칼자국이 발견됐다. 범인의 공격은 주로 상체에 집중됐는데 특히 얼굴과 머리는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 다음으로 상처가 많은 곳은 손과 팔이었다. 이 칼자국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왼쪽 팔의 관통상과 양손에 무수한 절창(베인 상처)은 범인이 휘두르는 칼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면서 생긴 ‘방어흔’이었다. 얼굴과 머리의 상처로는 피해자와 범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번이라도 사람을 찔렀거나 그러려는 시도를 했던 사람이라면 주로 가슴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처럼 얼굴에 큰 상처를 입혔다는 건 범인이 당황해서 칼을 마구 휘두른 증거라는 것.

피해자 시신에서 발견된 둔기 손상 부위도 그런 분석을 뒷받침했다. 시신의 뒤통수와 턱에서 발견된 둔기 손상은 망치 등의 도구가 아닌 주먹이나 발길질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어째서 범인은 칼을 들고도 모자라 주먹과 발까지 사용했을까? 답은 피해자의 체격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키 181㎝에 몸무게는 87㎏. 웬만한 남성과 겨뤄도 밀리지 않을 건장한 체격이었다.

이런 추론이 가능했다. 범인은 택시 강도를 하려고 위협용으로 칼을 들고 승차했으며, 호젓한 장소에 이르자 칼을 들이밀며 협박했다. 그러나 건장한 택시기사는 오히려 그런 범인을 제압하려 했다. 범인은 당황했고 필사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다른 의문이 생겼다. 강도가 목적이었다면 택시에 있던 20만원 가까운 현금은 어째서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 현금은 도어포켓과 지갑에, 즉 아주 찾기 쉬운 장소에 있었다. 그 때문에 경찰은 원한에 의한 살인에도 무게를 뒀다. 지나치게 칼을 휘두른 ‘오버 킬’이라는 점과 김정훈씨가 대전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사업가였지만 연쇄 부도를 낸 뒤 택시기사를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사건 당시 부도로 인한 채무는 모두 변제된 상태였고, 그에 대해 나쁜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탐문을 하면 할수록 평소에 그가 얼마나 유쾌한 호인이었는지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경찰은 여러 방향으로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건 초기에만 4700여가구를 탐문수사 했지만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또 피해자의 상처로 보아 범인도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인근 지역 병·의원을 모두 찾아 탐문했지만 그 역시 성과는 없었다.

다양한 형태 혈흔···사투 증거
돈은 남아 한때 원한 관계 조사



한데 사건 직후, 택시 안을 꼼꼼히 수색하던 중 뜻밖의 단서가 발견됐다. 피가 고여 굳어 있던 뒷좌석 시트에서 뒤늦게 부러진 칼날이 발견된 것이다. 칼날에는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각인돼 있었고 칼자루는 없었다. 범인이 칼자루가 부러질 정도로 격한 공격을 했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산 어떤 칼인지 알아내면 범인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너무 흔한 중국산 과도였기 때문이었다.

택시 뒷좌석에서 희미한 ‘신발 자국’(족적)도 하나 발견됐다. 피해자가 신고 있던 신발의 바닥 무늬는 아니었으니 자연히 범인의 것으로 추정됐다. 족적의 길이는 250~265㎜ 사이. 성인남성치곤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바닥 무늬를 쓰는 신발은 너무나 많았다. 심지어 남성화뿐 아니라 여성화에도 흔하게 쓰였고, 유명 브랜드에서 저가형 제품에까지 두루 쓰인 무늬였다. 제화 전문가는 “요즘엔 신발 바닥 무늬도 브랜드별로 개발해서 저마다 특징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신발 바닥 무늬엔 소홀하던 시절이라 그렇다”고 답했다.

범행도구 일부와 족적까지 찾아냈지만 범인의 정체에 접근하긴 역부족이었다. 충격적 사건인 만큼 제보도 빗발쳤지만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제보자는 범행 현장에서 5㎞가량 떨어진 위치의 세탁소 사장. 사건 발생일인 4월11일 아침 8시께, 피 묻은 티셔츠를 입은 호리호리한 청년이 와서 ‘피 묻은 옷 세탁이 가능한지’ 물었다는 것. 단호하게 거절하자 청년은 곧 돌아갔지만 한시간 뒤 다시 와서 또 한번 물었다고 한다.

세탁소 사장이 본 이 청년이 범인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범죄심리학자인 한림대 조은경 교수에게 자문을 하자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들은 옷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옷 예쁘네, 색깔이 어떠네 하는 것과는 달리, 그분들은 얼룩이 있는지 없는지 등을 쉽게 지각하는 직업적 특성이 있다. 따라서 그분의 진술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답이 왔다. 경찰은 세탁소 사장을 다시 찾아 그 청년의 키가 어느 정도 됐는지 물었다. 자신의 키가 165㎝인데 5㎝쯤 더 컸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의료융합측정표준센터를 찾았다. 세탁소 사장이 본 청년의 키와 택시 뒷좌석에서 발견된 족적의 크기에 연관성은 없을까? 센터의 박세진 박사는 “발 사이즈와 키는 상관관계가 상당히 높다. 따라서 족적으로 미루어 본 범인의 키는 대략 170㎝ 정도, 몸무게는 60㎏에서 65㎏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세탁소에 나타난 청년의 모습도 비슷했다.

그렇다면 범인의 직업이나 환경은 어땠을까.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오윤성 교수는 “범행이 발생한 시각이 화요일 새벽이고, 아침 8시와 9시에 세탁소를 찾았다면 아침에 출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으로 보이고, 파트타이머 혹은 실직자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범죄심리학자인 경기대 이수정 교수는 “목격자가 있을 가능성이 큰 출근 시간에 세탁소를 찾아 피 묻은 옷을 빨아 달라고 할 정도로 절박하게 옷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피해자의 피를 잔뜩 묻히고도 꼭 세탁소에 가서 빨아야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명 있겠느냐”며 범인이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거라 추정했다.

경찰은 범인의 승차 지점에 대해서도 집중 수사했다. 범인이 탄 지점에는 범인에 대한 정보나 단서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피해 택시의 운행기록장치(태코미터)에 의하면 범인을 태운 택시는 새벽 4시27분부터 7분 동안 3.438㎞를 이동했다. 그렇다면 범행 장소인 송촌동에서 출발해 7분 동안 3.438㎞를 되짚어 달려 도착하는 어딘가가 범인이 승차한 장소라는 얘기다. 사건 직후 경찰은 교통량과 신호체계를 비롯한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예상 승차 지점 16곳을 지목하고, 예상 시간대 기지국 수사로 1천건이 넘는 통화 기록을 확보했지만 용의자는 찾을 수 없었다.

피 묻은 옷 세탁 의뢰 제보
족적 분석 통한 용의자와 비슷


물론 아직도 희망은 있다. 피해 택시의 혈흔을 집요하게 감식한 결과 혼합 디엔에이(DNA. 여러 사람의 혈액이 섞인 혈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혈흔 두 점에서는 두 명의 디엔에이가 검출됐다. 하나는 피해자의 것, 또 하나는 누군지 모를 성인 남성, 즉 범인의 것이었다. 사건 직후 동일 수법 전과자를 비롯해 300여명과 디엔에이 대조를 실시했지만 일치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대전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여전히 끈기있게 추적 중이다.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지만, 아직도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던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침대에 누우면 바라보이는 맞은편 벽엔 남편의 사진을 걸어뒀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볼 수 있고 잠들기 전에 인사할 수 있어서란다. 매일 사진 속 남편에게 수시로 말을 건다는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좋겠소.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라. 천국은 좋아? 살 만해? 나도 곧 갈게, 이제. 기다려. 나도 얼마 안 남았어.”


조수진 방송작가

※ 이 사건과 관련한 정보가 있으신 분은 대전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042-609-2872)에 제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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