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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올림픽 멀리뛰기 메달리스트
역대 올림픽 멀리뛰기 메달리스트 좀 알려주세요 되도록이면 빨리 부탁드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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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6.10.22 조회수 1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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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생활 분야 지식인

음식점, 맛집 1위, 음식 1위, 올림픽 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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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서 가장 관중을 열광시킨 경기는 마라톤으로, 주최국인 그리스의 목동(양치기 소년) 스피리돈·루이스가 40㎞를 2시간 58분 50초의 기록으로 골인하여 대회 마지막 경기를 장식하였으며, 당시 감동의 파테론 경기장은 현재도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900 제2회 파리 올림픽 대회

육상 경기에서는 미국의 알빈·글렌쓰렌이 60m, 110m 허들, 200m 허들, 넓이뛰기에서 우승하여 올림픽의 첫 4관왕으로 탄생되었고, 미국의 레이·유리는 제자리 높이뛰기, 제자리 넓이뛰기, 제자리 세단뛰기에서 우승하여 3관왕이 되었으며, 그 후 1904년의 제3회, 1908년의 제4회 대회에서도 연승하여 초기의 정식 올림픽에서 8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가장 위대한 선수로 지명되었다. 테니스 경기에서는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여자 선수가 참가하였으며, 영국의 샤로트·쿠퍼는 여자 테니스 단식경기에 출전하여 올림픽에서의 첫 여자 금메달 리스트가 되었다.


1904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대회
육상 경기의 하나로 실시된 마라톤 40㎞ 경기에서는 미국의 프레드·로쓰가 선두로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서자 제1회 아테네 대회에서 주최국 그리스의 루이스가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섰을 때와 똑같이 장내는 환성의 도가니로 변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아리스가 로쓰에게 월계관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로쓰는 반환점인 20㎞지점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도움으로 메인스타디움에 골인한 사실이 폭로 되었고, 그로부터 약 1시간후 미국의 토마스·힉스가 지칠대로 지쳐서 골인 금메달의 영예를 안았다.


1908 제4회 런던 올림픽 대회


육상 경기의 한 종목으로 행해진 줄다리기의 미국과 영국의 시합에서는 미국 선수들은 보통의 스포츠 슈즈를 신었지만 상대인 영국의 리버플 경찰관팀은 바닥에 스파이크가 박힌 슈즈를 신고 등장였다.
미국팀이 이의를 제기 했지만 영국인만으로 구성된 심판단이 그러한 불공평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팀이 기권을 해 버림으로써 영국팀은 줄다리기에 걸린 3개의 금메달을 모두 차지해 버렸다.
육상 400m 결승 경기에서는 미국선수 3명, 영국선수 1명이 결승에 진출하여 레이스를 펼쳤으나, 선두로 골인한 미국선수가 3위로 골인한 영국선수의 앞을 가로 막았다고 하여 재경기를 선언하였고, 미국팀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분개한 미국선수들이 보이콧함으로써 혼자서 트랙을 천천히 돌은 영국선수가 올림픽 사상 상대 선수없이 독주하여 우승자가 된 유일한 예가 되었다


1912 제5회 스톡홀름 올림픽 대회
이전에 용맹을 떨친 미국인디언 삭·폭스족의 피를 받아 1888년에 태어난 24세의 청년 짐·소프는 이 대회를 통하여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최대의 찬사를 받았으며, 무명에서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되어 당시 타프트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시민 최고의 대표"라고 칭찬받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 후 메사츄세추의 지방지 기자가 밝혀낸 "소프는 스톡홀름 올림픽 수년전인 1909년 야구 경기에 나가 보수를 받았다"라는 기사에 의해, (사실은 1909년과 1910년 여름 휴가 기간에 노스캐롤라이나의 마이너리그에서 주급 25불을 받고 야구 선수로 일함) 소프의 아마튜어 규정 위반이 알려 졌고 미국 올림픽위원회도 그것에 동의하여 소프에게서 금메달 2개와 트로피를 몰수, IOC에 반환하였다.
1913년 로잔에서 개최된 IOC 총회에서는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의 보고를 받고 "IOC는 소프로부터 2개의 금메달을 박탈 했다."라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70년후 1982년 10월 IOC 집행위원회는 소프의 복권을 결정했고, 1973년 불가리아의 베르나에서 개최된 올림픽 콩그레스에서는 "아마튜어"라는 용어를 올림픽 헌장에서 삭제하게 된다. 아울러, 1983년 1월 IOC는 짐·소프의 자녀에게 2개의 금메달을 반환하였다
1916 제6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됨.
1916년 제6회 올림픽대회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최하게 되어 있었다.
독일은 거국적인 제반 준비에 착수, 35,000명 수용의 주경기장을 이미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 전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으로서 불행하게도 제6회 베를린 올림픽대회는 무산되었다


1920 제7회 안트워프 올림픽 대회

이 평화의 제전에 1959년 올림피안으로서 유일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영국의 필립·베이커 선수가 참가 했는데, 육상 남자 1,500m 경기에 출전한 그는 결승에서 같은 영국의 앨버트·힐에 이어 2위로 골인 은메달을 차지하였다.
제7회 올림픽대회의 가장 위대한 선수로는 육상 장거리의 "날으는 핀란드인" 파보·누루미로서 안트워프 대회의 금메달 3개를 비롯하여 1924년 제8회 런던 대회에서는 5개 종목에 출전, 전종목에서 우승하였으며,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1개의 금메달을 추가한 그는 총 9개의 금메달을 획득 전인미답의 기록과 함께 육상 장거리 선수들의 우상이 된다.


1924 제8회 파리 올림픽 대회

제7회 안트워프 올림픽대회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등장한 핀란드의 파보·누루미는 이번 대회에서도 육상 장거리의 5개 종목에 출전하여 5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그로부터 4년후인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도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비롯하여 총 9개의 금메달과 3개의 은메달을 차지하여 초기 올림픽의 육상 영웅으로 기억 된다.
수영경기에서는 100m와 400m 자유형, 800m 계영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한 조니.와이즈뮐러가 등장 하였으며, 그는 타잔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더욱 유명해 진다.
1928년 2개의 금메달을 더 획득한 와이즈뮐러는 자유형 100m에서 1분대의 기록을 깨트리고, 400m 자유형에서는 5분대를 깨트린 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으며, 와이즈뮐러가 주연을 맡은 타잔은 1932년에 첫 선을 보였다


1928 제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

육상 세단뛰기에 참가한 미끼오·오다 선수는 15m 21을 뛰어 일본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처음 실시된 여자 800m 결승에서 기누에·히토미 선수가 2분 17초 6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차지 하였고, 일본은 요시우끼·쓰루다가 수영 200m 평영에서 우승하여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게 된다.
1900년 제2회 파리 대회부터 실시된 축구 경기에서는 우루과이가 2회연속 우승을 차지하였고, 하키 경기에서는 인도가 첫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이후 인도는 1956년 제16회 호주 멜버른 올림픽대회까지 6회 연속 우승하게 된다.


1932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대회


여자 육상경기에서는 미국의 텍사스 출신 밀드레드 디드릭슨이 혜성처럼 나타나 투창과 80개 허들에서 우승하였으며, 높이뛰기에서도 우승하였으나, 웨스턴 롤오버(다리보다 머리가 먼저 넘어가는 폼)로 뛰었다고 하여 규칙위반으로 판정, 은메달에 머물렀다. 남자 수영경기에서는 6개 종목을 휩쓴 일본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800m 자유형 계영에서 8분 58초 4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하였고, 1928년 제 9회 대회의 200m 평영에서 우승한 바 있는 요시우끼 쓰루다는 2회 연속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인도, 미국, 일본이 출전하여 3개국 리그전으로 치루어진 하키경기에서는 인도가 일본을 11 : 1, 미국을 24 : 1 로 이겨 국제경기사상 최다 득점기록으로 우승하였으며, 일본은 미국을 9 : 2 로 이겨 2위를 차지하였다. 우리나라 선수가 비록 일본 대표선수였지만 처음으로 참가하였다. 마라톤의 김은배(6위), 권태하(9위), 복싱 라이트급의 황을수(1차전 패) 선수는 비록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였지만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첫발을 디딘 선수들이었다

 

1936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대회에 이어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마라톤의 손기정, 남승룡,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의 김용식, 복싱의 이규환 선수가 참가 하였고, 임원으로는 이상백씨가 총무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손기정 선수는 전세계 마라톤 선수들이 꿈꾸었던 2시간 30분대의 벽을 허물며 우승(2시간 29분 19초 2 ) 하였고, 남승룡 선수는 2시간 31분 42초로 3위를 차지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사진을 전송받아 호외를 발행할 때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워 버렸는데 이 일로 동아일보 관계자들의 투옥과 신문은 무기정간 되었고, 손기정 선수의 환영 행사는 일제의 방해로 좌절 되고말았다.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가장 인상적인 선수는 육상경기의 제시·오웬스(미국) 선수로 그는 100m, 200m, 400m 계주, 넓이뛰기의 4종목에서 우승하여 4관왕이 되었으며, 당시 유태인과 흑인의 참가를 차별하였던 독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1940/1944 제12회, 제13회 올림픽 대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됨.


1948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7개 경기 67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한국선수단은 역도 경기의 김성집 선수가 합계 380㎏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 올림픽 무대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복싱 경기에 참가한 한수안 선수도 아깝게 결승진출에 실패하여 동메달에 만족하였다.
런던 올림픽대회의 스타는 여자 육상경기에서 4관왕이 된 네덜란드의 화니 블랭커스 코엔으로서,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높이뛰기에 출전하여 6위를 한 바 있는 그녀는 12년만에 출전한 런던 대회에서 100m, 800m 허들, 200m, 400m 계주를 모두 석권하여 여자 선수로서 최초의 4관왕 신화를 창조하였으며, 당시 코엔은 두 아이의 엄마였으며, 훌륭한 가정주부였다.
인간 기관차 에밀 쟈토벡은 10,000m에서 우승하고 5,000m에서도 2위를 차지하며 중장거리의 강자로 혜성과 같이 등장했으며, 그는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대회에서 5,000m, 10,000m, 마라톤 3종목을 석권하는 업적을 남겼다


1952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

1952년 헬싱키 올림픽대회는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혜성같이 등장한 인간 기관차 에밀 쟈토벡이라는 위대한 선수를 탄생시켰다. 1922년 체코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쟈토벡은 헬싱키 올림픽대회에서 5,000m, 10,000m, 마라톤 3종목을 모두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 육상 장거리의 전무후무한 선수가 되었다. 쟈톡벡의 부인인 다나 쟈토프코바는 투창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부부가 금메달 리스트로서 올림픽 역사에 기록된다.
해방후 올림픽에 두번째로 참가한 우리나라는 6.25 전란 상황에서 올림픽에 참가 전세계로부터 힘찬 격려와 찬사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서 제14회 런던 올림픽대회에 이어 역도경기의 김성집 선수와 복싱 경기의 강준호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 67개 참가국중 37위를 차지한다

1956 제16회 멜버른 올림픽 대회

7종목 57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한국선수단은 복싱에서 송순천 선수가 해방후 첫 은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역도 경기의 김창희 선수는 동메달을 획득하여 종합 29위를 차지 하였다.


1960 제17회 로마 올림픽 대회

복싱 라이트헤비급에 출전한 미국의 캐시어스 M 클레이(무하마드 알리)는 춤추는 듯한 경쾌한 발놀림과 빠른 펀치로 18세의 나이에 새로운 참피온으로 등장했으며. 1964년 예상을 뒤엎고 소니 리스튼 선수를 7회 KO 시켜 사상 가장 나이어린 프로 복싱 헤비급 참피온이 되었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는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쟈토벡이 세운 올림픽 기록보다 7분 50초나 앞선 세계 최고 기록(2시간 15분 16초)으로 우승, 에디오피아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1964년 제18회 동경 올림픽대회마저 우승한 그는 초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육상 여자 단거리의 미국 선수 윌마 루돌프는 어릴적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100m, 200m, 400m 계주를 석권하여 로마올림픽의 스타로 등극하였다.
사이클 100㎞ 단체 경기에서는 덴마크의 젠슨 선수가 과도한 신경흥분제를 복용 올림픽 사상 최초로 약물 중독에 의하여 사망한 사고가 발생 하였으며, 덴마크 사이클 선수단은 남은 경기를 모두 철회 하였고 이후 올림픽에서 약물 복용을 엄격하게 규제하게 되었다.
9개 종목 57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단 1개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하였다. 레슬링 라이트급의 봉창원 선수와 역도 페더급의 김해남 선수가 각각 4위에 입상하였으며,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의 이창훈 선수는 20위에 머멀고 말았다.
복싱의 김기수 선수는 이번 대회의 우승자인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와 2회전에서 격돌하여 판정패 하였으나, 프로로 전향 1966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가진 미들급 세계타이틀전에서 벤베누티를 이겨 한국 프로복싱 첫 세계 참피온이 되며 로마 올림픽 대회의 패배를 설욕하게 된다


1964 제18회 동경 올림픽 대회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대회에서 맨발의 신화를 창조한 이디오피아의 아베베는 동경 올림픽대회에서도 우승, 올림픽 사상 최초의 마라톤 2연패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체조 경기에서는 소련의 라리사 라티니나 선수가 제16회 멜베른, 제17회 로마 올림픽과 이번 대회를 합쳐 총 18개의 메달(금9, 은5, 동4)을 획득, 개인 경기의 최다 메달 획득 선수가 되었다.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첫선을 보인 배구 경기는 남자 배구에서 소련이 체코를 꺾고 올림픽 배구 초대 우승팀이 되었으며, 여자 배구는 일본이 소련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4개 체급으로 실시된 유도 경기에서는 주최국 일본이 3개의 금메달을 차지했으나, 무제한급에서는 네덜란드의 안토니우스 게싱크가 우승해 유도 종주국 일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우리나라는 동경 올림픽대회에 올림픽 참가 사상 최대 규모인 10개 종목에 선수 165명, 임원 59명을 파견하여 은 2개, 동 1개로 종합 순위 25위에 올랐다.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 출전한 장창선 선수는 결승에서 일본의 요시다 선수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쳤으나, 불의의 기습 공격에 1점을 잃어 은메달에 머물렀고, 복싱 경기에 출전한 밴텀급의 정신조 선수는 예선전의 손가락 부상을 무릎 쓰고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일본의 나까오에게 패해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유도 경기에서는 재일교포 김의태 선수가 중량급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추가했다.
동경올림픽 대회는 북한의 참가가 IOC에 의해 거부 당했고, 1.4후퇴때 헤어진 신문주-신금단 부녀가 14년만에 감격의 재회가 이루어져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시켰으며 상봉 10분만에 북한 선수단의 철수로 헤어짐으로써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였다


1968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대회

육상 200m 경기후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1위와 3위에 입상한 미국의 흑인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시상대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높이 치켜 들어 항의 시위를 일으켰으며 결국 두 선수는 미국 선수단에서 제명 당한 뒤 올림픽 선수촌을 떠나야만 했다.
육상 경기에서는 고원지대로 인한 공기 저항이 적어 좋은 기록이 속출 되었으며 남자 넓이뛰기의 봅 비먼(미국)은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기록인 8m 90을 기록, 세계 육상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비먼의 도약은 특별히 설치된 전자 계측 장치의 한계를 넘어 착지하였을 때는 모래판의 맨 끝부분에 떨어졌고 그 거리는 당연히 세계 신기록이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농구 경기에서는 미국이 올림픽 7연패를 달성하였으며, 여자 체조 경기에서는 체코의 베라 차슬라프스카 선수가 개인 종합, 평행봉, 뜀틀, 마루 운동 등 4종목을 석권, 체조 사상 첫 4관왕이 되었다.


1972 제20회 뮌헨 올림픽 대회

미국의 유태인 수영선수 마크 스피치는 자신이 참가한 7개 전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
수영부문의 대기록을 수립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의 15세 소녀 쉐인 굴드는 3개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며 3관왕에 올랐다.
농구 경기에서는 세계 최강의 미국 농구가 소련에게 일격을 당해 7연패의 종지부를 찍었다. 경기 종반을 알리는 순간까지 미국은 소련을 50:49로 리드 환호를 올렸으나, 시간이 잘못 체크 되었다는 이유로 3초의 연장 경기가 속행되고 볼을 이어 받은 소련의 베로프가 점프슛을 성공시켜 51:50으로 소련의 역전 우승이 결정되었다.
뮌헨 올림픽의 여자 체조 경기에서는 소련의 17세 꼬마 요정 올가 코르부트 선수가 현란한 연기력과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묘기를 구사하여 전세계인의 찬사를 받았으며, 올가의 등장은 기존의 우아하고 성숙한 여성미를 바탕으로 하던 여자 체조의 추세를 깜찍하고 발랄한 소녀들의 고난이도 묘기를 겨루는 경기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올림픽 무대에 DPRK(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라는 호칭으로 처음 등장한 북한은 1백여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1, 은1, 동3개를 획득하였고, 사격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이호준 선수는 「적의 가슴을 쏘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이다」라는 말을 해 올림픽 정신이나 순수한 스포츠 이념에 크게 위배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8개 종목 46명의 선수를 참가 시킨 우리나라는 유도 미들급에 출전한 오승립 선수가 한국 유도 처음으로 은메달을 획득, 이 대회의 유일한 메달이 되었다

1976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여자 체조 경기에서 14세의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체조의 요정」과 한국계 소련인인 넬리킴의 탄생으로 TV를 시청하는 지구촌 가족을 매료시켰다.
몬트리올 대회에서 이채를 띤 것은 복싱 경기의 형제 금메달 리스트 등극이었다. 레온과 마이클 스핑크스 두 형제는 각기 라이트 헤비급과 미들급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으며, 훗날 레온 스핑크스는 프로로 전향해 세계 헤비급 참피온이 되었다.
승마 경기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 황태자가 영국 왕실에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앤 공주를 응원하였고, 역도 경기에서는 금지 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세명의 선수가 메달을 박탈 당하였다.
우리나라는 5종목 72명(선수50, 임원22)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해방후 첫 금메달을 따내는 감격을 맛보았다. 레슬링 자유형 62㎏급에 출전한 양정모 선수는 비록 최종 등위 결정전에서 몽고의 오이도프 선수에게 석패 했지만 7전 6승 승자승 원칙에 따라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유도 경기에서는 장은경 선수가 은메달 1개, 조재기, 박영철 선수가 각각 동메달 1개를 추가 하였고, 레슬링의 전해섭 선수와 여자 배구가 동메달을 따냄으로써 우리나라는 역대 올림픽 최대 성과인 금1, 은1, 동4개를 획득 종합 19위에 올랐다


1980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

레닌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800m에서 스티븐 오베트가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세바스첸 코우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 먼저 미소를 지었으나, 다음날 열린 1,500m에서는 코우가 오베트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 전날의 패배를 설욕했다. 세바스첸 코우는 그후 6차례의 세계 신기록과 세계적 권위의 각종 메스콤에서 "올해의 육상인"으로 가장 많이 선정된 선수가 되었으며, 상업광고에 출연하는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마라톤에서는 동독의 말테마르 치에르핀스키가 아베베에 이어 올림픽을 2연패한 선수가 되었고, 두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던 소련의 역도 선수 바실리 알렉세이프 선수는, 그의 후계 선수로 지목 받은 슐탄 라크마노프에게 금메달을 빼았겼다.
쿠바의 복싱 선수 스티븐슨은 소련의 자이예프를 꺾고 헤비급에서 올림픽 3연패를 기록 하였다. 남자 체조에서 소련의 알렉산더 디타이아친은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여 올림픽 사상 최다 메달리스트가 되었으며, 가장 난이한 종목으로 여겨지던 링종목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1984 제23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대회

육상 경기에 출전한 미국의 칼 루이스는 100m, 200m, 400m, 넓이뛰기에서 우승 4관왕에 등극하며 LA올림픽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오른발이 왼발에 비해 약간 짧은 불구선수 바레인의 조아큄 크루즈는 800m에서 금메달을 획득 인간 승리의 감동을 연출하며 수만 관중의 환호를 받았다.
금세기 최고의 다이빙 선수로 평가받는 미국의 그레고리 루가니스는 남자 하이다이빙과 스프링보드 다이빙에서 완벽한 입수자세로 2관왕의 영예를 차지했으며, 중국도 역도 경기에서 4개 체급을 휩쓸며 황색 돌풍을 일으켰다.
유도 경기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동일하게 4체급에 걸쳐 결승에 올랐으나, 김재엽과 황정오 선수가 일본 선수에 패해 2개의 금메달에 만족한 반면 일본은 결승에 진출한 4명의 선수 모두 승리하여 유도 종주국 일본의 위신을 지켰다.
모스크바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고 8년만에 올림픽 무대에 참가한 우리나라는 18종목 288명(선수210, 임원78)의 선수단을 파견, 6개의 금메달과 6개의 은메달, 그리고 7개의 동메달을 획득하며,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1988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

서울 올림픽대회의 가장 큰 뉴스는 남자 육상 100m의 우승자 카나다의 벤 존슨이었다.
벤 존슨은 이번 대회에서 9초79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우승하였으나, 경기 종료후 실시된 도핑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금메달을 박탈 당하고 2년간 국제대회 출전 자격이 금지되었다.
여자 수영의 크리스틴 오토(동독)는 "수영의 여왕"답게 자유형, 배영, 접영의 3가지 영법에서 6개의 금메달을 석권, 올림픽 여자 수영 최다 금메달 획득자가 되었으며, 미국의 매트 비욘디는 남자 수영에서 5개의 금메달을 차지 서울 올림픽의 스타로 탄생하였다.
다이빙 경기에서는 그레그 루가니스(미국)가 84년 LA 올림픽대회에 이어 스프링보드, 하이보드 다이빙 2종목을 2회 연속 우승하였으며, 금세기 최고의 육상 스타 미국의 칼 루이스는 100m와 멀리뛰기에서 우승 하였다.
12년만에 동서의 격돌 무대가 된 서울 올림픽에서는 소련이 미국을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하였고, 동독이 미국을 제치고 종합 2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하였으며, 3위 미국에 이어 종합 4위에 오른 우리나라의 대약진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탁구에서는 남자 단식의 유남규, 여자 복식의 양영자, 현정화조가 세계 최강 중국과 동유럽을 따돌리고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92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의 첫 금메달(사격 : 여갑순)과 마지막 금메달(마라톤 : 황영조)을 우리선수들이 차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손기정의 신화를 56년만에 재현하는 감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여자 핸드볼이 올림픽 참가 이래 구기 종목 사상 첫 2연패의 신화를 창조하였고, 세계 최강 여자 양궁에서는 조윤정 선수가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번 대회 처음으로 정식 종목에 채택된 여자 유도의 김미정 선수가 초대 참피온이 되었으며, 배드민턴 경기에서는 남자 복식의 박주봉, 김문수조, 여자 복식의 황혜영, 정소영조가 남.여 동반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작은거인 역도의 전병관 선수는 56㎏급에 출전하여 인상 132.5㎏, 용상 155㎏을 번쩍 들어올려 합계 287.5㎏을 기록, 중국의 류슈빈을 10㎏ 차이로 물리치고 한국 역도의 올림픽 출전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96 제26회 아틀란타 올림픽 대회

 


2000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대회

 

 

 

+소아마비 선수 레이 어리.
1900년 올림픽을 시작으로 1904년,중간 올림픽인 1906년,그리고 I908년 둥 4개 대회에서 10개의 금메달과 3개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미국의 레이 어리, 그는 지금은 폐지된 스탠딩 점프(제자리에 서서 하는 높이 뛰기와 멀리 뛰기, 3단 뛰기)의 일인자였다.
1873년 10월 18일 미국 인디애나주 라파예트에서 태어난 어리는 어릴 때 무척 병약했다. 더구나 소아마비까지 앓아 다리 하나가 부실했다. 휠체어에 의지해 평생을 살도록. 할 수 없어 부모는 그에게 건강 미용 체조를 시켰다.
앉아서만 지낼 수 없다는 절박한 어리의 노력도 처절했다. 조금씩 몸이 회복되어 갔다. 어느 정도 근육이 붙고 힘도 생기자 그는 매일 점프 연습을 했다. 장애자도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198cm의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한 어리는 1890년 퍼듀 대학에 입학, 1897년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전공은 기계 공학이었다. 대학에서도 그는 계속 점프를 했다. 퍼듀 대학의 육상부 주장으로 활약했고 미식 축구 선수로도 뛰었다. 부상으로 미식 축구는 포기하고 육상에만 전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년간 어리는 시카고 육상 협회가 주최하는 각종 대회에 참가해 실력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는 뉴욕으로 옮겨 발전기 회사의 기술자로 일했다.
뉴욕에서도 그는 열심히 육상을 했다. 마침내 1900년, 파리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7월 16일, 이날 어리는 3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선채로 멀리 뛰기와 3단 뛰기에서 우승한데 이어 높이 뛰기에서는 165cm, 종전보다 10cm나 높은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또 목에 걸었다. 191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그는 출전하려고 했다. 38살 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졌으니 이제 은퇴하라는 올림픽 동료인 동독의 마틴 세리단의 충고를 듣고 선수 생활을 끝냈다. 19l2년 대회 이후로 스탠딩 점프는 폐지되었다. 1937년 9월27일, 올림픽의 영웅 레이 어리는 64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1948년 올림픽 사격 속사 권총에서 연속 금메달을 딴 헝가리의 카로리 타카스는 원래가 오른 손의 명 사수였다. 1910년 1월 21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그는 1929 년부터 38년까지 헝가리 사격 국가 대표로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그런 그는 1938년 군 복무 중 수류탄 폭발 사고로 그만 오른 손을 잃고 말았다.
사격 선수에게 손은 생명과 같은 것으로 육상 선수가 다리를, 농구 선수가 팔을 상실한 것과 같은 일이었다. 타키스는 너무나 큰 충격에 어찌 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냉정했고 이성적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아직 왼 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타카스는 다시 권총을 잡았다. 오른 손이 했는데 왼 순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의지와 의욕의 문제라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타카스였다. 그리고는 훈련에 열중했다. 새로 시작하는 사격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왼 손이요, 한 팔이 없어 몸의 균형 잡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정확한 자세로 오른 손만큼 재빠르게 왼 손을 놀리게 되기 까지 l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39년 루선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그간 그의 노력이 얼마나 컸나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요, 인간의 능력이 무한함을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타카스는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다. 목표를 올림픽에 두고 훈련을 계속했다. 10년의 세월이 그렇게 지났다. 그리고 맞은 1948년 런던 올림픽, 타카스는 헝가리 대표로 속사 권총에 외팔로 참가했다. 그 동안 쌓은 실력이 헛되지 않아 금메달이었다. 52년 헬싱키 올림픽, 타카스의 나이 42살, 그는 또 속사 권총에서 우승했다.
불구가 된 것도 서러운 일인데 권총을 잡아야 하는 오른 손을 잘렸으니 사격 선수로서는 끝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타카스는 좌절하지 않고 왼 손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타카스야 말로 진정한 올림픽 영웅이 아닌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 로망형 웰터급에서 우승한 헝가리의 미크로스 질바시도 타카스와 비슷한 경력의 올림픽 영웅이다.
1946년 경찰관으로 근무할 때 동료의 오발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결과는 다리 마비라는 레슬링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걷지도 못했고 혼자 힘으로 설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강했다. 거기서 주저 앉지 않았다. 매일 다리에 커다란 돌을 매달고 각력 회복을 위한 훈련을 했다. 차츰 마비 중세가 없어졌고 다리에 힘이 붙어 갔다. 상체의 능력이 더욱 커졌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52년, 마침내 금메달을 손에 쥐게 되었다.

+ 절름발이 흑인소녀, 윌마 루돌프
1960년 로마 올림픽 100, 00m와 400m계주에서 우승, 올림픽 여자 최초로 3관 왕이 된 미국의 윌마 루돌프는 11 살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닌 장애자였다. 1940년 6월 23 일,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서 태어난 윌마는 체중이 겨우 2kg의 허약한 아이였다. 4살 때 성홍열과 소어마비에 폐렴까지 앓았다. 흑인 가정의 22명 자녀 중 20번째인 윌마는 변변히 치료도 받지 못했다.
운 좋게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 후유증으로 6살에 왼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침대에서만 지내게 된 윌마의 건강 회복을 위해 부모와 형제들은 2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다리를 마사지 했다. 가족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8살 때 윌마는 목발을 짚고서 였지만 걸을 수가 있었다. 목발에 의지해 초등학교에 다닌 그는 남들처럼 뛰어 놀 수 없어 바구니에 농구 공을 던져 넣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러는 한편 남몰래 걷는 연습을 했다.
11 살 때 마침내 목발 없이도 설 수 있게 되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농구부에 입단했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윌마는 배 이상의 연습을 했고 곧 우수한 농구 선수가 되었다. 윌마의 특출한 운동 소질을 인정한 학교에서는 그를 위해 육상부를 창단했다. 정상인을 능가하는 선수를 목표로 윌마는 달리기에 전념했다. 그의 집념은 끈질겼다. 각종 육상 단거리 부문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리고 16살 때인 56년 미국 육상 대표로 멜보른 올림픽에 출전, 400 m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에서 돌아 온 윌마는 특기생으로 테네시 주립 대학에 입학, 집안 최초의 대학생이 되었다. 계속 달리기에 집중한 그는 60년 로마 올림픽, 여자 100m에서 종전 기록보다 0.3초나 빠른 1l 초,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바람 탓에 공인 받지 못했으나 놀라운 기록이었다. 200m에서도 22.9 초로 이미 세계 기록을 작성한 그는 또 금메달을 차지했다. 400m계주 마지막 주자로 뛴 윌마는 뒤늦게 바톤을 넘겨 받았으나 발군의 스피드로 선두를 제치고 1 위로 골인, 금메달을 추가했다. 44.4초,그 또한 세계 신기록이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남자 높이 뛰기에서 2.04m,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한 미국의 월터 데이비스, 그도 8살 때 소아마비로 5년간이나 휠체어 신세를 진 장애자로 농구에서 육상으로 전향해 성공한 선수였다.
60년 로마 올림픽 10종 경기의 우승 미국의 레이퍼 존슨은 미국 텍사스주 힐스보로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콘베어 벨트에 다리가 말려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할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다. 겨우 절단은 모면했지만 23바늘이나 꿰매는 대 수술 끝에 목발을 짚고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올림픽,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10종 경기에 출전해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는 은퇴 후 배우, TV 스포츠 캐스터로 활약했고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역시 로마 올림픽 500m 에서 금메달을 딴 뉴질랜드의 머레이 할버그도 장애자였다.17세 때 럭비를 하다가 왼 쪽 어깨를 크게 다쳤고 응혈 합병증으로 생명이 위독했다. 가까스로 위기는 넘겼으나 평생 반신불수로 지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할버그는 1년 후, 왼쪽 어깨와 팔을 흔들며 달리기 연습을 했다. 6년간의 피나는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58년 그는 영연방 대회 3마일 경주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60년 로마 올림픽에 출전, 500m에서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렇듯 올림픽 대회에는 특히 육상 경기에 소아마비 등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들이 불굴의 의지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서 우리를 감동시킨 경우가 종종 있다.

+ 목뼈를 다치고도 출전해 우승.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처럼 고귀한 경험은 없다. 어떤 직업, 아무리 막강한 권력, 떼 돈도 올림픽의 경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네 번의 올림픽 투원반에서 네 번 다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집념의 사나이 알 오터가 한 말이다.
1936년 미국 뉴욕주 아스토리아 출신의 오터는 고등학생 때인 1954년에 고교 신기록을 세워 캔서스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나간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1956년 멜버른 대회로 그 이후 60년, 64년, 68년 멕시코까지 16년간 4회 연속 참가해 모두 우승했다. 그런 그는 불행하게도 62년 국내 경기 중 목뼈를 다쳐 1년 넘게 목에 깁스를 하고 지냈다. 그런데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64년 도꾜 올림픽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야 겨우 깁스를 풀었으나 목에 부목을 대고 부앧로 감아 마치 미라 같은 모습으로 경기장에 섰다. 그래도 고통이 가시지 않아 마취제인 암모니아 캡슐을 사용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세번째 시기, 오터는 부목도 붕대도 풀어버렸다. 필사적인 몸부림이었고 놀라운 투혼이었다. 역시 금메달에 세계 기록이었다. 경기 후 오터는 '누군가가 내 갈비뼈를 뽑아 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고 실토했다.

+ 스포츠 맨쉽의 귀감
1936년 LA 올림픽 육상 5000m 결승 경기, 핀랜드의 라우리 라티넨과 미국의 랄프 힐이 접전을 벌였다. 결승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라티넨이 한 발 앞서 달렸고 그 뒤를 힐이 바짝 추격했다. 힐이 사력을 다 해 라티넨을 앞서려고 바깥 쪽으로 빠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라티넨이 힐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었다. 멈칫하던 힐은 다시 방향을 고쳐 안 쪽으로 추월하려 했다. 그러자 라티넨이 또 그 쪽으로 몸을 트는 것이었다. 주춤할 수 밖에 없는 힐이었고 그렇게 라티넨과 힐은 거의 동시에 골인했다. 사진 판독 결과 라티넨의 우승으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관중석에서 야유의 함성이 이는 것이었다. 달리기 경주에서 앞지르려는 선수의 길을 막으면 실격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중들이 라티넨의 우승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힘이 달려 비틀거렸을 뿐인 라티넨은 관중들이 왜 소란을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름을 보고서야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된 라티넨은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한 진로 방해였던 것이다. 라티넨은 그 즉시 힐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그러나 힐은 오히려 민망해 하며 라티넨의 우승을 축하해 주는 것이었다. 시상대에 올라서 였다. 라티넨은 힐을 한사코 맨 윗자리로 미는 것이었다. 우승자는 자기가 아니라 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힐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사양하는 것이엇다.
둘의 실랑이를 관중석에서도 다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에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두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라티넨과 힐, 그들도 올림픽 영웅임에 틀림없다.

경기 도중 머리를 크게 다치고도 분전,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다이빙 천재 그레그 루가니스는 88서울 올림픽에서 가장 영웅적인 선수로 꼽혔다.1982년부터 87년까지 국제 대회에서 19연승을 기록했고 84년 LA 대회에서 이미 스프링 보드,프랫트폼 다이빙 두 종목을 석권한바 있는 그는 서울 올림픽에서도 당연히 우승 후보 1순위였다. 그런데 그는 스프링보드 다이빙 예선전에서 도약대에 머리를 부딛쳐 8바늘이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웬만한 선수라면 경기를 포기 했을 것인데 루가니스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계속 출전,결국 금메달을 따냈다. 그는 이어 프랫트폼 다이빙에서도 정상에 올라 올림픽 사상 최초의 다이빙 두 종목 2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영웅적인 투혼이요,정신력의 승리였다.

개인 혼영 400m 세계 기록 보유자로 64년 도꾜 올림픽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미국의 리차드 로스는 경기 이틀 전 심한 복통으로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맹장염으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일본 의사는 진단했지만 캘리포니아 출신의 17살의 로스는 "나는 금메달을 따기 위해 이곳에 온 곳이지 수술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며 진통제마저 거부, 얼음 찜질로 통증을 달래며 기어코 경기에 참가했다.그렇게 로스는 예선을 거쳐 결승에 진출,종전의 자기가 세운 기록을 무려 3초나 단축한 4분45.4초,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금메달을 목에 건 후에야 맹장 수술을 받은 로스였다.

36년 베르린 올림픽 권투 라이트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헝가리의 임레 하란기 선수도 부상을 무릅쓰고 링에 오른 고집 불통의 사나이였다. 올림픽이 있기 몇 달전에 열린 국내 대회에서 하란기는 코를 심하게 다쳤다.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올림픽 이후로 미루었다. 그리고는 맹 훈련 끝에 마침내 올림픽 시상대 맨 윗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런 후에야 코 수술을 받은 하란기였다. 금메달이 값진 것이기는 해도 건강만큼이야 하랴만 선수들에게 그런 의지,의욕,투지,정신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908년 런던 올리픽 수영 남자 800m 계영 결승 경기였다.마지막 선수가 뛰어들 때 선두 헝가리는 2위 영국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결승점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그런데 헝가리의 졸탄 할메이가 갑자기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1906년 아테네에서 열렸던 올림픽 10주년 기념 대회에서 역시 최종 영자로 금메달을 따 낸 바 있는 할메이였지만 다리에 쥐가 나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몸은 말을 듣지 않고 의식은 가물거리고, 그래도 초인적인 의지로 제 코스를 찾아 버둥대는 할메이였다. 그러나 근육 경련은 좀처럼 풀리지가 않았다.그렇게 세 번씩이나 물속에서 텀벙거리면서도 기권하지 않고 사력을 다 한 할메이는 2위로 골인했다. 그리고는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급히 임원들이 끌어 올려 응급 처치를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겨우 눈을 떴다.이 또한 투지로 따낸 은메달이었다.

1896년 1회 올림픽 사이클,아테네와 마라톤간의 왕복 87km 도로 경기에서 그리스의 콘스탄틴 티니디스가 천신만고 끝에 우승했다.이것 역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쾌거였다. 마라톤 까지 선두로 달린 콘스탄틴은 돌아 오는 길에 다른 선수와 충돌해 나 딩굴었다. 자전거는 망가졌고 부상도 입었다.응급 치료를 받고 다시 일어난 그는 보조원의 자전거를 빌어 타고 달렸다.아테네에 다 들어 와서 그는 길 가의 사람을 피하려다 또 벽을 받았다. 자전거는 못쓰게 되었고 상처도 컸다.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충 치료를 받고 이번에는 관중의 자전거를 얻어 탔다. 그렇게 콘스탄틴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그의 몸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표정에는 수 많은 고난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적고 있다.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가장 용감한여자 선수'로 모두가 기억하는 미국 여자 다이빙의 미키 킹, 그는 루가니스 못지 않은 투혼을 발휘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스프링보드 다이빙에서 마지막 두 차례의 시기를 남겨 놓고 그는 선두였다. 그러나 바로 그 마지막 두 번째의 다이빙에서 실수로 도약대에 걸려 왼팔에 골절상을 입었다. 지독한 아픔이었고 심리적 충격 또한 컸다. 그런 몸을 하고도 미키는 마지막 까지 나가 뛰었다. 메달 권에서 밀려나 4위에 그쳤지만 그의 감투 정신은 지금까지도 우리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 있다. 메달은 따지 못했어도,고작 7위에 머물렀어도 미련할 정도의 투지로 끝내 경기를 마치고 쓰러진 선수가 있다. 1936년 베르린 올림픽 근대 5종에 출전한 미국의 알프레드 스타버드,그는 당시 미 육군 중의였다. 그는 경기 직전에 발목 뼈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그런데도 그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4천 m 크로스 컨트리등 5개 종목을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치루어 냈다. 결과는 7위,그리고 곧바로 입원,수술을 받고 깁스를 했다. 36년 베르린 올림픽남자 1만 m에서 우승한 핀랜드의 일마리 살미넨은 5 천 m 에도 도전했다.세 바퀴를 남겨두고 살미넨은 선두인 동료 군나르 헥케르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차 하는 순간 군나르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막 판에 그렇게 되면 탈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선두는 이마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고 7,8명의 선수가 그를 비웃듯 앞지르고 있었다. 군나르는 주저 앉지 않았다. 다리를 절룩이며 다시 뛰는 것이었다. 앞 서 가는 선수를 차례로 따 돌리고 역주를 해보았지만 이미 늦었다.6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것도 최후의 일각까지 최선을 다 한 스포츠 정신의 표본이 아닌가.

+장애자 선수의 귀감.
1936년 LA 올림픽 수구 경기에서 우승, 지난 대회에 이어 2 연승한 헝가리 대표 팀에는 외다리 선수가 있어 화제가 되었다.그의 이름 올리버 할라씨,그는 11살 때 부다페스트에서 전차에 치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절단해야 했다. 그런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할라씨는 피나는 훈련을 거듭해 유럽 수영 선수권 대회 1500m 경기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헝가리 국가 대표 수구 선수로 96회나 출전하는 등 헝가리 수구의 주전으로 활약했다.그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나간 것은 1928년 암스텔담 대회로 그 때 헝가리는 준 우승을 했다.세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은메달 1개를 목에 건 할라씨,그는 장애자들에게 하면 된다는 모범을 보여준 인간 승리의 귀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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