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임금의 원찰 수국사

옛 정인사의 역사를 이어받은 수국사에는 조선왕조 초기 억불숭유에도 지켜낸 불교의 가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원찰을 금지한 조선
세종은 즉위 2년 7월 10일 어머니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산릉 옆에 절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를 상왕에게 묻자 11일 병조 참의 윤회를 세종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원찰 
예종 원찰 ‘정인사’로 명명
1900년 고종  ‘수국사’도 중창

“조선에 이르러 개경사 연경사가 있어 대비의 능에도 사찰을 지을 수 있으나 나는 절을 짓지 않고 법석도 역시 개설하지 아니하여, 이로부터 법을 세우려 한다.”

난감해진 세종은 윤회를 상왕에게 보내 불교의 폐단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능소를 모신 후 빈 골짜기가 쓸쓸하기 때문에 절을 짓고 수행이 바른 수행자를 두면 위로가 될 수 있으므로 다시 아뢰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뜻은 단호했다. 7월 17일 환관 홍득경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상이 절을 산릉에 설치코자 하나, 그러나 불법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라, 나로 하여금 이 능에 들어가지 않게 한다면 절을 짓는 것도 가하나, 만일 이 능에 내가 들어갈 터라면 절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태종 이전에 세워진 원찰이 있었다. 태조의 원찰 개경사이다. 이는 태조의 뜻이었기 때문에 태종이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원찰을 세우지 않는 것은 법을 세워 이를 만세의 후손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태종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손들에 의해 원찰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세종은 죽어 태종 곁에 묻혔다가 세조 때 지금 여주로 이장한 후 신륵사를 원찰로 삼았다. 세조 역시 광릉에 묻힌 후 옆에 있는 봉선사를 원찰로 삼았기 때문에 창건이라고 할 수 없다. 태종 이후 원찰을 창건한 이는 세조의 부인이었던 정희왕후 윤씨였다.

의경세자의 원찰 정인사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큰 아들을 의경세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세조 3년(1457) 9월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세간 사람들 사이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를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말을 들은 세조는 왕후의 묘를 파내 시신과 관을 쪼개어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조카의 목숨은 가볍게 여기고 자기 자식의 목숨을 안타깝게 여기는 세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다분히 후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왕위찬탈의 인간적 번민을 불교에 의지하였으며, 도덕적 약점은 검소한 생활로 민심을 얻으려 하였다. 세자의 능을 조성할 때 국장도감의 관리들은 조금 사치스럽게 조성하려 하자 다음과 같은 어찰을 내렸다.

“이번 장례는 임금의 장례가 아닌데 모든 일이 정도에 지나친 것 같다. 그 무덤 안의 모든 일은 후하게 해도 되지만, 무덤 밖의 모든 일은 비록 나의 장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박하게 해야 한다. 한갓 백성만 번거롭게 할 뿐이지 죽은 자에게는 유익할 것이 없다.”

의경세자를 고양군 동쪽 봉현(蜂峴)에 장사지냈다. 지금 서오릉이다. 다음해 내수사에 일러 능 동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찰을 세웠다. 세조는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완성할 것을 명하였다.

“내 아들 의경이 불행하게 수명이 짧아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초상 장사에 일이 거창하였으니, 거듭 국가를 번폐스럽게 하지 않고자 한다. 너의 내수사는 현실(玄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 한 구역을 만들어라. 혹시라도 폐단을 끼치지 말고 완성하게 하라.”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의 지도하에 열두 달이 걸려 완성하니 바로 정인사(正因寺)이다. 

예종의 서거와 정인사 중창
세조가 죽은 다음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예종은 재위 1년 3개월 만에 죽었다. 의경세자 옆에 장사하니 능이 창릉이다. 정희왕후 윤씨는 종친들과 의논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자산군을 보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아들이 왕이 되자 죽은 의경세자는 1470년 1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의경세자 원찰인 정인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창건할 때 서둘러서 지었기 때문에 재목이 좋지 못하고 이음새가 정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성종 2년(1471) 봄 자신이 살던 집에 새로운 원찰을 세우려 하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물을 내수사에 주고 판내시부(判內寺府) 이효지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의 어머니인 대왕대비 윤씨는 두 아들이 함께 있는 곳 가까이 원찰이 있었으면 생각하였다. 

“의경대왕과 예종대왕 두 능의 현실(玄室)이 아주 가까워 한 절의 종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곳이다. 만약 인수대비가 개축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자신과 힘을 합쳐 재물을 모아 정인사를 중창하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의경, 예종을 위해 천복(薦福)하는 정성도 이루어질 것이다.”

정희왕후 윤씨의 뜻대로 정인사 중창불사는 1471년 2월에 시작하였다. 노역에 대한 삯을 지불하자 많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나섰다. 흉년이 들어 빈궁했던 탓에 삽을 멘 자가 구름같이 모였다. 그 덕분에 10월에 모두 119칸의 정인사가 중창되었다. 부인과 어머니의 힘이 합쳐져 완성된 왕실의 원찰인 까닭에 사찰은 웅장하면서 아름다웠다. 단청이 휘황찬란하여 아름다움이 봉선사와 서로 첫째 둘째가 될 만하였다. 이런 정인사의 아름다움을 정인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원릉은 채색 구름 가에 엄숙하고, 사찰은 빼어난 메 앞에 높다랗다. 금벽 채색 빛나서 아침 햇볕이 쬐고, 달랑거리는 풍경 소리는 바람이 멀리 전한다. 불등(佛燈)은 넓게 삼천계(三千界)를 미치고 국운(國運)은 응당 억만 년에 뻗치리라. 정맹(精猛)한 두타(頭?)는 법좌(法座)에 올라 묘법을 말하고, 진전(眞詮)을 부연한다.”

두 임금의 원찰이 된 정인사는 자연히 왕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받았다. 인수대비는 ‘절은 있으나 곡식이 없으므로 승려가 의지할 곳이 없다’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미곡 백 섬을 시주하여, 본곡(本穀)은 남겨 두고 이자만 이용하여서 식륜(食輪)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불구(佛具)도 모두 여유 있게 구비하여 다른 사찰의 부러움을 샀다.

성종 4년(1473) 4월 초파일에 낙성 법회를 크게 하고 대승의 여러 경을 인출하자 오색구름이 일어나고 신묘한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서기가 하늘에 뻗쳤다. 원근에 있던 승려 수만 명이 일찍이 없었던 일임을 감탄하면서 절하였다.

정인사는 대소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외 잡역 및 노비 잡역을 감하였다. 사원전이 몰수될 때도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종은 호조에 명하여 정인사는 다른 절에 비할 바가 아니니, 봉선사의 예에 따라 쌀과 포를 주라고 명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정인사의 수난
왕실의 관심으로 불교배척은 면할 수 있었던 정인사도 화마만큼은 피해가지 못했다. 연산 10년(1504) 9월 정인사가 불에 타자 즉시 경기 감사 안윤덕과 형조 참판 박열을 불러 바로 가서 국문하도록 하였고, 두 임금의 영혼이 놀랐으므로 위안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화재로 정인사는 한 때 폐사될 운명에 놓이기도 하였다. 중종은 3년(1508) 경릉과 창릉의 원찰을 대자사로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반대 의견이 많아 다시 정인사를 복구하는 것으로 선회하면서 사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옛 모습을 전부 회복하지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종 4년(1549) 인근 유생들이 이곳에 드나들며 전해오는 기물을 파손하고 소란을 피우자 왕실은 정인사가 왕실의 원찰임을 들어 봉선사와 봉은사와 같이 방을 걸어 유생들의 침입을 금했다. 그리고 소란을 크게 피운 황언징은 1차에 한하여 식년 과거 참여를 정지시키는 등 왕실의 원찰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이후에도 정인사는 사찰 위전(寺刹位田)이 그대로 지급될 정도로 왕실의 관심은 계속되었다.

정인사에서 수국사로
정인사가 지금의 수국사로 바뀐 것은 언제일까? 안타깝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명종 이후 이에 관련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 수국사로 바뀌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고종 즉위년(1863) 12월 대왕대비가 산릉을 살펴본 의견을 들을 때 도감의 책임자 임백경이 수국사의 뒷산이 길한 곳 여덟 곳에 포함된다고 아뢰는 것을 보면 그 이전 수국사로 바뀐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사격이 많이 훼손되고 부처님도 인근 진관사로 이운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폐사에 가까웠을 것 같다.

그런 수국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한 것은 홍월초 스님이다. 진관사에 있는 수국사 부처님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중흥의 원을 세웠다. 1900년(광무 4) 세자로 있던 순종의 병을 낫게 하자 고종은 그 고마움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 자락에 수국사를 중창하였다. 정인사에서 수국사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창건과 마지막 중창까지 모두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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