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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순왕후와 인수대비에 대해 질문합니다 ..
mina**** 조회수 11,781 작성일2007.10.31

안순왕후는 예종의 계비라고 들었는데

예종의 정비는 누구인가요 ?

일찍 죽어서 안순왕후가 계비가 된 건가요 ?

 

요즘 왕과나를 보면서 의문점이 드는것은,

안순왕후가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

그녀는 성종때 왕대비 였던걸로 알고있는데 ...

왜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와 인수대비만 나오는지 .....

실제 정권은 두 여인이 잡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안순왕후는 등장조차 안하는 건가요 ;;?

드라마에 안 나올 뿐 그녀는 지금 살아있는거죠 ;;;?

아님 궐 밖에 있는건가요 ?

궐 밖에 있다면 무슨이유로 ... ?

그녀는 언제 죽습니까 ?

 

그리고 인수대비는 언제 입궁하게 됩니까 ?

성종은 예종의 양자이니, 인수대비는 생모일지라도 큰어머니가 되는데

나중에 덕종이 추존 되어 왕비의 칭호를 받기전

성종이 즉위했을때의 칭호를 알고싶습니다.

 

 

질문이 좀 많으니 내공 걸게요 ,,

쓸대없는 내공냠냠등의 답변 사절이구요,

내용 괜찮으면 감사내공 드리겠습니다.

빠른 답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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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n****
물신
한국사 26위, 사회, 도덕 84위, 전통 예절, 의식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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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이 원비는 한명회의 장녀인 장순왕후 청주한씨입니다.

장순왕후는 세조 6년 4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습니다.

이듬해인 세조 7년 11월 30일 궁밖에서 원손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인해 닷새후인 12월 5일 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이를 출산한 안기의 사저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세조가 죽은 세자빈에게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려,

이때부터 예종이 즉위할때까지 한명회의 장녀는 '장순빈'으로 불렸습니다.


세조 8년 세자를 위해 최도일의 딸을 세자의 후궁 종4품 소훈으로 간택하여 입궁시켰고,

세조 9년 7월에는 한백륜의 딸을 소훈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키니 이가 바로 안순왕후입니다.

세조 9년 10월 원손(추승인성대군)이 사망하였는데,


다행히 세조12년 3월 소훈한씨가 아들(제안대군)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세조는 죽을때까지 새로운 세자빈을 간택하지 않았고, 결국 예종은 즉위할때까지 정식배위가 없이 후궁들만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예종이 즉위한 당시 소훈 한씨가 또다시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 윤씨의 의지에 의해 한씨가 왕비로 간택되었고,

이와 함께 장순빈의 시호도 장순왕비로 추봉되었습니다.


예종이 죽자

정희왕후 윤씨는 정치적 동지였던 한명회와 결탁하여, 왕위계승서열 제3위의 자을산군을 보위에 올립니다.

인혜대비(안순왕후)소생의 제안대군은 나이가 어려서(당시 만4세), 의경세자의 장남인 을산대군은 어려서부터 병약해서가 그 이유였으나, 다분히 정치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혜대비는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인수대비는 세자빈에 책봉되면서 ‘정빈’의 빈호를 받았으나,

남편이 죽어 ‘의경’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자, 통칭 ‘의경 세자빈’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정식호칭은 아닙니다.

세조 14년 세조는 죽기 직전 홀로된 며느리가 마음에 걸렸는지, 정빈의 칭호를 ‘수빈’으로 고쳐,

인수대비는 아들 성종에 의해 인수왕비로 승격되기 이전에는 ‘수빈’으로 불렸고, 거처하던 곳은 ‘수빈궁’이라 불렸습니다.

이후 작은아들 자을산군이 왕이되자 남편 의경세자의 존호가 의경왕으로 올라가면서, 자신도 ‘인수왕비’로 책봉되었고, 수빈궁의 명칭도 ‘인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성종의 생모인 의경세자빈 수빈 한씨는 세조가 왕이 되기 이전 시집왔으며 한확의 딸입니다.

한확은 아버지가 일찍 죽어 그다지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두 여동생을 명나라 공녀로 보내고, 그중 큰여동생이 명나라 황제의 총희가 된 이후,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었던 사람이며, 한확의 딸이 세조의 맏며느리가 된 데에는 정략적인 측면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도 막내고모가 명나라 황실의 궁인으로 살고 있었기때문에, 비록 죽은 세자의 과부였지만, 수빈의 권력은 절대로 얕잡아 볼 수 없었고,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한명회의 작은딸과 혼인하게 된 데에도 이러한 면이 반영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정희왕후와 한명회, 인수대비 한씨는 당시에는 똘똘 뭉친 동지였고,

그런 상황에서 친정아버지까지 죽고 없던 인혜대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정희왕후는 며느리인 인혜대비가 권력을 잡는 것을 견제하여

성종의 즉위로 두 며느리인 인수왕비한씨와 인혜대비의 궁중내 서차를

형제의 서차를 따라야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펼쳐

세자빈에 불과한 인수왕비의 서차가 전왕의 비인 인혜왕대비보다 높아지는 말도 안되는 상황까지 생겼으니,

인혜대비로서는 어지간히 치욕적인 상황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언제 죽게 될지 모를 상황에 놓여있던 아들 제안대군을 위해서라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죠.


성종 6년에는 결국 의경왕이 덕종으로 추승되면서, 정식으로 왕후가 되었고, 그때에야 왕대비의 칭호를 받게 되었으니,


성종비 폐비윤씨까지 죽어나가게 만든 궁중의 권력전쟁에서 힘도없고 배후세력도 약했던 안순왕후가 끼어들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죠.





200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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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정비는 장순왕후 한씨(1445~1461)으로 영의정 한명회의 장녀입니다.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의 친언니로써 동시에 시숙모가 되는 셈이죠.

그녀는 1460년에 당시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예종과 가례를 함으로써 세자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서 건강이 악화되어 17세의 나이로 요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1472년(성종3년)에 장순왕후에 추존되었습니다.

능은 공릉으로 경기도 파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공릉은 조성 당시 세자빈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왕후의 능과 같은 형식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순왕후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드라마를 잘 안봐서요. ㅡ,.ㅡ;;

다만 추측하건데...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안순왕후 한씨(?~1498)는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이며, 1460년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 한씨가 병사하자

1462년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예종이 병사하자 1471년 인혜대비에 봉해집니다.

그러다가 1497년(연산군 3년)에 다시 명의대비로 개봉(다른 이름으로 봉해짐)되었으며, 이듬해에 돌아가십니다.

그녀의 소생으로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으며 그녀의 능은 창릉으로 예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묘역에

합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궐 밖에 나가서 살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인수대비(1437~1504)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입니다.

그녀는 1455년에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훗날 덕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하고, 세조의 차남이 예종이 즉위함으로써 사가로 나와 살게 됩니다.

이후 1469년 11월 자신의 차남인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소혜왕후에 책봉되어지고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게 됩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자을산군)이 있으며, 성품은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서 불경을 언해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요.

당시 조선 초기에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왕실내에 불당이 있을 정도로 왕실에서의 불교 신앙은 깊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 승녀로 출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구요.

암튼 인수대비는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서인으로 전락시키고,

그 후에 사사시켜버립니다.  그 사건이 훗날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오는 연산군의 폐비윤씨 사건의 시초가 되죠.

당시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만행에 꾸짖으며 만류를 하지만,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를 연산군이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후 홧병을 얻어 병이 더 깊어져 며칠 뒤에 향년 6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집니다.

 

제 답변에 도움이 되셨나 모르겠네요~

 

[출처 - 조선왕조실록]

 

 

200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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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대왕의 정비는 장순황후 청주 한씨로 그녀의 아버지는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의 아버지인 한명회입니다.

고로, 두 왕비는 친자매이자 동서지간이 되죠.

 

그녀가 15세의 어린나이로 출산을 하다가 원손 이분(인성대군)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 예종대왕의 차기 왕비자리(그당시 세자빈)는 공석인 상태였으나

원손이 풍질로 어린나이에 사망하고 그당시 소훈의 신분으로 후궁이었던 한씨가

회임을하여 아들을 낳자 세조가 승하하기 며칠전에 예종에게 왕위를 물리면서 그녀또한

왕비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때 그녀는 해산을하기위해 잠시 사가에서 머물던 상태입니다.

이곳에서 막내딸 혜순공주를 낳았구요.

 

드라마 초반에는 분명히 안순왕후가 등장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나오지 않는 건 드라마 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은 작기때문에

나오지않는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가 좀 더 진행되고나면 아들인 제안대군의 비중이 드러나게되니 그때가되면 그녀가 다시

등장을 할 겁니다.

 

걱장 마세요!

대궐 안에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연산군 즉위 초에 병으로 사망합니다.

 

인수대비는 성종 즉위 초에는 의경왕비에서 인수왕비로 불렸습니다.

 

 

 

200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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